<5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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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전선을 빠져나온 원소는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내성으로 향했다.
사방이 온통 적이다.
성문을 돌파한 조조군과 비열한 배신자들이 업성을 장악한 상태였다.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충성스러운 장졸들이 업성 각지에서 항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불리한 전세를 뒤집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문교위 심영에 의해 동문이 열렸을 때부터 이미 업성의 운명은 몰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주군, 힘을 내소서!”
“소장들이 목숨을 다해 호위하겠나이다!”
맹대와 등승이 검을 치켜들면서 원소를 호위했다.
근위병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방을 경계하면서 신속하게 내성으로 전진했다.
“원소다!”
“근위병들과 도망치고 있다! 잡아라!!”
자중지란에 빠져든 인파들을 뚫고서 내성에 도달했을 때,
복병이 들이닥쳤다.
원소를 배신하고 조조에게 붙은 배신자들이었다.
급보를 접하고서 내성으로 도주할 것이라고 예측했던 장수들은 미리 관문을 선점하고 있었다. 사냥감이 함정에 걸려들자마자 벌떼처럼 들이닥쳤다.
“네놈들!”
“마연, 장의…! 더러운 배신자들아!!”
맹대와 등승이 칼끝을 들었다.
근위병들도 또한 병장기를 치켜들면서 비열한 무리를 경계했다.
조조군과 내통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주군에게 위해마저 가하려는 후안무치한 역적들의 태도에 근위병들은 비분강개하며 살의를 드러냈다.
“항복하라!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이미 조조군이 업성을 점거했으니 모든 게 끝났단 말이다!”
중랑장 소유가 근위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일말의 승산도 없다.
이대로 싸워봤자 개죽음만 당할 뿐이다.
조조군을 신종(臣從)하기로 결정했다.
조조군에게 신종의 조건으로서 관직과 봉토를 제의받은 소유는 격앙된 목소리로 근위병들을 꾸짖으면서 연이어 항복을 압박했다.
“어서 투항하라!”
“지금이라도 개심한다면 목숨만큼은 살려주겠다!”
마연과 장의도 가세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주군을 버려라.
조조군을 따르겠노라 맹세하라.
완전히 마음이 돌아선 장졸들은 원소를 포위하면서 천천히 압박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드러냈다.
“닥쳐라!”
“뭣들 하느냐! 역도들을 쳐라!!”
투항 따위는 없다.
결단코 네놈들의 의도대로 항복하지 않겠다.
근위병들이 검을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다.
“멍청한 놈들…!”
“결국 가라앉는 배에 몸을 맡기겠다는 것인가!”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내분에서 비롯된 동족상잔이 벌어졌다.
하북 출신의 장졸들이 서로에게 병장기를 휘두르면서 유혈을 일으켰다. 함성과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울릴 때마다 덧없이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더러운 배신자들이!”
“닥쳐라! 대세를 따른 것뿐이다!”
지옥이다.
아비규환의 현장이 펼쳐졌다.
함께 충성을 맹세했던 전우들이 동족상잔을 벌이는 광경은 너무도 참혹했다.
“그만…! 제발 그만!”
금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절규를 토해냈다.
죽어가고 있다.
수많은 목숨들이 눈앞에서 죽어갔다.
이상과 대의를 공유하면서 함께 나아갔던 전우들이 서로가 휘두른 칼날에 쓰러졌다.
이보다 더한 참극이 있을까.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오열을 토해냈다.
피를 쏟아내면서 쓰러지는 동족상잔의 현장은 지금까지 보았던 어느 참상보다도 끔찍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악몽을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아아…! 아, 안 돼!!”
찬연한 이상이 핏물로 얼룩졌다.
견고하던 대의가 동족상잔에 무너졌다.
얼녀의 신분으로 천하의 권력을 거머쥐겠다는 야심을 가슴에 품고서 도전을 반복했던 여인에게 가장 비참한 운명이 내려졌다.
“원소가 저기 있다!”
“선수를 빼앗기기 전에 쳐라!”
두두두두두!!
날랜 기병들이 달려들었다.
중랑장 소유의 휘하였다.
병장기를 치켜든 기병대가 원소를 호위하던 근위병들을 급습했다.
“커헉!”
“등승 장군!”
검을 휘두르면서 반란군을 밀어내던 등승이 배후를 급습한 기병에게 짓밟혔다.
콰직-!
꽈드득-!
거친 말발굽에 짓밟혔다.
이윽고 날카로운 병장기들이 날아들며 등승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주, 주군!”
기병들의 급습으로 전열이 무너졌다.
전열의 와해는 죽음을 뜻했다.
뿔뿔이 흩어진 근위병들은 기병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맹대가 어떻게든 분전하려 하였으나 근위병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내가 원소의 목을 가져오겠소!”
“눈물을 흘리면서 오열하는 꼴이라니…! 결국 원본초는 계집에 불과했던 것이오.”
마연과 장의가 부하들과 함께 나섰다.
계집처럼 벌벌 떨고 있다.
지금이라면 아주 수월하게 목을 거둘 수 있을 터.
맹장들처럼 무예에 능한 원소가 전의를 회복하기라도 하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
그렇기에 부하들을 동원하여 단번에 원소의 숨통을 끊어놓으려 했다.
“…읏!”
맹수처럼 천천히 다가오는 장졸들을 목격한 원소가 몸을 떨면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윽고 애처롭게 물러서던 발걸음을 멈췄다.
초탈한 웃음을 흘렸다.
사면초가에 직면한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차피 잔인하게 살해당할 운명이라면 지금까지 자신에게 보필해준 부하들에게 죽고 싶었다.
자신의 수급을 맹덕에게 가져간다면 제후에 책봉되는 영예를 누릴 수 있겠지. 두 눈을 슬며시 감으면서 마지막 의지마저 단념했다.
“멈춰라!!”
흉수들의 칼끝이 다가왔을 때,
사내가 현장이 난입했다.
그는 정로장군(征虜將軍) 국의였다.
국의가 난데없이 쳐들어오자 마연과 장의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던 국의가 갑자기 등장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정로장군…!”
“갑자기 끼어들다니.”
예상치 못한 변수가 벌어졌다.
이윽고 치열했던 접전은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살아남은 근위병은 많지 않았다.
주변이 온통 원소를 적대하는 반란군이었다.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맹대가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저항하고 있었지만 이제 한계였다. 전투가 계속 이어진다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었다.
“어서 오시오, 정로장군! 그렇지 않아도 정로장군이 합류하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소이다!”
중랑장 소유가 두 팔을 뻗으면서 말했다.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그럼에도 소유는 단기필마로 쳐들어온 국의에게 선의를 내비쳤다.
노여움을 받아 좌천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복귀하였으니 원소를 향한 복수심이 대단하겠지. 분명 국의가 거사에 합류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를 말이오?”
국의가 물었다.
그에 소유가 말을 이어나갔다.
“어리석고 나약한 군주 때문에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푸대접을 받으셨소? 북방의 귀신을 무찔렀던 하북의 명장께서 삭탈관직의 오명을 쓰다니…! 모든 분란들의 원흉이 바로 저 계집이오!”
날카롭게 소리치면서 원소를 노려보았다.
저 년이 원흉이다.
위태롭게 이어지던 하북이 이토록 참담하게 무너진 것은 어리석은 암군의 무능 때문이리라.
소유는 원소에게 연전연패의 책임을 전가하면서 강경하게 몰아붙였다. 그에 마연과 장의가 소유의 주장에 가세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렇게 생각하시오? 설마 중랑장에게 그런 과찬을 받을 줄은 몰랐소만.”
국의가 쓴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칼자루를 거머쥐었다.
그러면서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주군을 응시했다.
결정을 망설이듯이 심사숙고하는 반응을 계속 이어나가던 국의는 마침내 칼자루를 뽑아들었다.
“병장기를 들어라! 역적들을 모두 일소하라!”
그러나 국의는 예상과 상반된 행동을 벌였다.
배신에 합류하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음에도 주군을 향한 충성을 선택했다.
“반기를 든 역도들을 쳐라!”
“주군께서 위험하시다! 어서 주군을 구하라!”
사방에서 병력이 난입했다.
모두 정로장군 휘하의 군세들이었다.
반란군의 배후를 노렸다.
원소의 근위병들과 싸우느라 체력이 소진된 상태였던 반란군은 국의에게 무용지물처럼 무너졌다.
“국의, 네 이놈!”
“쓸개도 없는 졸장부 같으니라고!”
원소를 시해하고자 반기를 들었던 반란군은 국의의 급습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사생결단을 낸다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유는 철퇴를 결정했다.
업성은 몰락을 앞두고 있다.
제아무리 발악하더라도 조조군의 압도적인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마연과 장의는 조조군에게 증원을 요청하여 군세들을 쓸어버리겠다며 격앙된 목소리를 내질렀다.
“주군.”
신속하게 현장에 난입하여 반란군을 일소한 국의가 말에서 내려섰다.
뒤이어 원소에게 고삐를 내밀었다.
“말에 오르십시오.”
“…네.”
어째서.
대체 왜.
불안감이 감도는 시선으로 사내를 응시했다.
동요를 드러냈다.
혼란을 감출 수 없었다.
한없이 경계하고 의심했던 부하로부터 결정적인 도움을 받게 된 원소는 의아함을 숨기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명에 복종할 뿐입니다.”
어깨를 떨면서 혼란스러워하는 주군의 모습을 지켜보던 국의는 쓴웃음을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