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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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幽州) 탁군(涿郡)
범양(范陽)
업성에서 전령이 도착했다.
시급히 지원군을 이끌고 업성으로 합류하라.
전황이 급박하고 돌아가고 있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전령들이 계속해서 유주를 방비하던 초촉과 정남을 압박했다.
“안량 도독과 문추 도독께서… 전사하셨다고?”
믿을 수 없다.
어찌 그 말을 믿으란 말인가.
하북을 대표하는 맹장들이 죽었다.
여양성에 주둔하던 주력군단이 모두 무력하게 궤멸되었다는 소식에 침음을 삼켰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교위(校尉) 정남이 물었다.
그에 중랑장(中郞將) 초촉이 대답했다.
“우선… 전황을 지켜보도록 하십시다.”
공방전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음에도 초촉과 정남은 병력과 물자들을 준비하다는 핑계를 내세우면서 출병을 차일피일 미뤘다.
안량과 문추가 죽었다.
주력부대 또한 오소에서 궤멸되었다.
결국 업성(鄴城)마저 함락되는 것이 아닌가?
불신(不信)이 생기기 시작했다.
곧 불신은 배신(背信)으로 불거지게 되었다.
원소의 명령으로 유주를 관할하던 장수들은 전황을 호시탐탐 엿보면서 때를 기다렸다. 천하를 제패할 세력에 편승하기 위해서였다.
“별가가 우리를 의심할지도 모르네.”
정남이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별가(別駕) 한형.
유주를 수비하는 장수들을 감시하고자 배치된 기주 사대부 출신의 막료였다.
한형은 타협을 불허하는 강직한 외골수였기에 결코 변심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었다.
“벌써 조급함을 느낄 것 없습니다. 아직 무엇도 속단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 말이 지당하오.”
안량과 문추가 전사했음에도 여전히 업성은 건재했다.
그렇기에 지켜볼 뿐이다.
과연 누가 천하를 움켜쥐겠는가.
초촉과 정남은 전쟁의 승패에 이목을 집중했다.
* * *
반면 청주(淸州)와 병주(并州)는 지원을 결정했다.
업성이 위태롭다.
풍전등화의 위기를 결코 외면할 수 없다.
청주의 별가였던 왕수가 병력과 물자들을 규합하여 업성으로 보냈다. 또한 병주자사 고간의 부하였던 곽원도 기병들을 소집하여 업성을 지원하려 했다.
“여남원씨 가문을 위하여!”
“주군께서 위험하시다! 어서 움직여라!!”
조조군에게 두 번이나 완패를 당했음에도 여남원씨 가문을 향한 충성심은 여전히 절대적이었다.
하북 4개 주의 패자.
천하의 절반을 장악한 세력다운 저력이다.
청주와 병주가 동시에 파병을 결정했다.
엄동설한의 추위를 이겨내면서 악전고투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는 조조군으로선 당연히 초조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정예를 선별하여 오환족을 공격하겠습니다.”
청주와 병주가 움직였다.
군사좨주 곽가의 세작들로부터 첩보를 받은 이성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오환족을 급습하겠다.
무거운 목소리로 조조에게 진언했다.
“분명 본초가 움직일 걸세.”
“…예, 그럴 겁니다.”
여양성에 주둔하고 있는 조조군은 양면으로 압박을 받고 있는 형국이었다.
원소군. 오환족.
둘 중의 하나가 공격을 받는다면 나머지 한쪽이 분명 움직일 터.
조조는 업성에서 병력을 재정비하고 있는 원소군이 공세에 나서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원소군이 전면전에 나선다면 하북의 패자가 천군만마를 친히 이끌고 아군의 후미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미끼는 던져두었습니다.”
“허유 말인가?”
둔영에서 벌어진 참상을 들었다.
조조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물었다.
원소의 뇌리를 뒤흔들 미끼.
이성휘는 오환족을 토벌하기 위한 시간을 마련하고자 허유를 동원하려 했다.
과연 마련한 미끼를 어떤 식으로 써먹을까.
흑발을 늘어뜨린 미녀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허유는 철저히 본인의 안위와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입니다. 분명 이번 일에 악의를 품고서 원소군에게 다시 접근하려 할 겁니다.”
그 말에 조조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본초와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허유가 아무리 개인의 욕심만을 추구하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식솔들을 모두 처형했던 철천지원수에게 재차 귀부할 리가 없었다.
“거짓으로 꾸며낸 기밀을 던져줄 생각입니다. 저한테 원한을 품게 된 허유는 사사로운 감정을 내세우면서 원소군에게 기밀을 넘기겠지요.”
“본초가 절대 믿을 리 없네.”
안량과 문추가 기만책에 현혹되어 절멸적인 대패를 당하지 않았던가.
속을 리 없다.
오히려 논파를 당할 위험성이 높았다.
업성은 여양성과 다르다.
걸출한 참모들이 원소를 보필하고 있었기에 기만책이 먹힐 리 없었다. 조조는 혹시 남편이 섣불리 속단하는 실수를 내릴까 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만책에 속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업성의 이목을 잠깐 속이기만 하면 됩니다.”
속이지 못해도 좋다.
잠깐의 시간만 벌 수 있으면 된다.
거짓된 정보로 원소군을 맹인으로 만든다.
미끼는 준비되었다.
이제 적들을 향해 미끼를 던질 뿐이다.
“대장군, 유비군이 당도했습니다.”
그리고 사냥감을 꿰뚫을 작살까지 마련되었다.
학맹의 보고에 이성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본격적으로 몰아치기 시작한 북방의 눈보라처럼 업성의 상황 또한 살벌하긴 매한가지였다.
곽도가 실각되었다.
또한 곽도를 따르던 일파들도 쓸려나갔다.
허유가 만든 일례 때문일까.
원소는 실각된 곽도의 무리들이 허튼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고 경계했다.
“청주자사를 따르던 관료들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하옥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소?”
“물론이오. 참으로 무서운 일이외다.”
사나운 광풍이 몰아쳤다.
그에 관료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곽도가 숙청되었다.
여남원씨 가문의 중신이 숙청되면서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기주 인사들이 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삭탈관직에 처해졌던 전풍까지 복권되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잖소.”
구심점이었던 곽도의 숙청으로 예주 출신의 인사들이 힘을 잃게 되었다.
신평과 신비 형제가 그러했다.
곽도와 마찬가지로 예주 영천군 출신이었던 신평과 신비는 숙청의 칼날은 피할 수 있었지만 공범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게 되었다.
“형님, 이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분명 이대로 전쟁이 끝난다면 우리 형제들도 처분될 겁니다!”
전풍과 심배가 전권을 쥐었다.
분명 그들은 여세를 몰아 예주 출신의 인사들을 모두 숙청할 것이었다.
곽도는 시작일 뿐이다.
전쟁이 종결되자마자 숙청이 반복될 터였다.
“어떻게든 전공을 세워야지…. 충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당최 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쟁에서 살아남을 활로는 충성심을 주군에게 입증하는 방법뿐이었다.
신의를 완전히 잃었다.
반드시 기사회생의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역전을 마련할 수 있단 말인가.
신평과 신비는 곽도와 마찬가지로 정쟁을 벌이면서 출세한 막료에 불과했기에 군략에 대해선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봉기 군사는 어찌 되었답니까?”
“활을 맞고 사경을 헤맨다더구나. 업성으로 퇴각하던 도중에 적장이 쏜 활에 맞았다지.”
적장이 쏜 활에 맞은 봉기는 급히 업성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있었다.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다.
담대한 성정의 참모가 사경을 헤맬 정도였다.
과연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르신.”
영천신씨 가문의 형제가 은밀하게 모의하고 있었을 때,
그를 따르는 노복이 다가왔다.
“행색이 초라한 의문의 사내가 외곽을 순찰하던 병사들에게 붙잡혀 들어왔사온데… 몹시 기이하게도 어르신을 뵙게 해달라고 했답니다.”
“나를 말이냐?”
신평이 노복의 말에 실소했다.
나를 만나게 해달라니.
엄동설한의 추위에 지친 비렁뱅이가 굶주림을 피하고자 도움을 구걸하는 것이 분명했다.
심란한 와중에 이 무슨 괴변이란 말인가.
당장에 멍석말이로 도움을 구걸하는 비렁뱅이를 응징하고 싶을 정도였다.
“일단 자초지총을 들어보시죠, 형님.”
“크흠.”
동생 신비의 말에 신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을 데려와라.
소식을 가지고 온 노복에게 하명을 내렸다.
이윽고 외곽을 순찰하던 병사들에게 붙잡혔다던 초라한 행색의 걸인이 도착했다.
“네놈이 나를 보자고 하였느냐?”
“그, 그렇습니다….”
장시간을 엄동설한의 추위에 벌벌 떨었는지 걸인은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참혹한 몰골에 측은지심을 느낀 신평이 노복들에게 명령하여 의복과 요깃거리를 들고 오게 했다.
“저는… 허유 어르신을 따르는 병사입니다.”
“뭐, 뭣이!”
신평이 놀라 소리쳤다.
옆에서 듣던 신비도 마찬가지였다.
허유.
그 이름은 흉명(凶名)이나 다름없었다.
감옥을 경계하던 위병들을 살해하고 도망친 배신자가 아닌가. 허유는 파벌을 막론하고 모든 관료들에게 비난과 지탄을 받은 극악무도한의 역적이었다.
“이, 이것을 어르신에게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걸인으로 변복한 허유의 병사가 품속에서 조심스럽게 서신을 꺼내들었다.
꾸깃꾸깃한 봉투.
하지만 서한만큼은 온전했다.
병사가 양손으로 건넨 서한을 조심스럽게 응시하던 신평이 돌연 노성을 내질렀다.
“배신자의 주구가 아니더냐! 당장 놈을 추포하라!”
허유가 보낸 밀정이다.
배신자의 끄나풀이라는 오해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두려웠던 신평은 사병들에게 명령하여 밀정을 붙잡았다. 신평의 얼굴에는 소스라치게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허유, 이 빌어먹을 배신자가 무슨 속셈으로…!’
밀정이 건넨 서한을 움켜쥐었다.
크흠!
이윽고 신평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불상사였다.
허유가 내통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을 포섭하려고 했다는 생각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비열하고 더러운 배신자에게 동질이라며 선택받은 꼴이었으니 노발대발하는 것도 당연했다.
“형님, 그런데 그 서한은….”
“당연히 태워버릴 것이다! 더러운 배신자가 우리들을 끌어들이려고 간계를 꾸민 게 아니겠느냐!”
신비의 물음에 신평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그러면서 밀정이 가져온 서한을 구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