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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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의 군수기지는 함정이다.
바깥으로 끌어내기 위한 술책.
여양성을 떨어트리기 위한 기만책이었다.
은밀하게 매복하고 있던 유비군의 역공으로 조조군의 속셈을 간파한 청주자사 곽도는 심복들과 함께 누구보다 먼저 전장에서 달아났다.
“이성휘, 이놈…! 감히 나를 속이다니!!”
이성휘의 손바닥에서 계속 놀아났다는 치욕감을 곱씹으면서 말을 재촉했다.
혹시라도 적이 추격해올까 두려웠던 곽도는 병마들을 끊임없이 재촉하면서 오소를 벗어났다.
“청주자사!”
“이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곽도를 호위하던 무관들이 대경실색하며 물었다.
안량과 문추를 두고 떠났다.
분명 이 사실이 알려지면 주군의 노여움을 피할 수 없을 터.
하북을 대표하는 쌍두마차는 주군께서 총애하는 맹장들이었기에 불안감에 떠는 것은 당연했다.
“급습에 동원된 군세들을 보지 못했느냐. 제아무리 일기당천의 맹장들이라도 살아남기 어려울 게다.”
“예…?”
급습을 지휘하는 안량과 문추가 전장에서 전사하기를 바라는 듯한 곽도의 대답에 의아함을 드러냈다.
“급습의 실패는 안량과 문추가 적들의 속임수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호승심을 이기지 못하고 가벼이 여양성의 병마들을 움직였기에 생긴 일이란 말이다!”
오소를 탈출하여 조조군의 영역에서 빠져나온 곽도는 곧바로 완패의 책임을 안량과 문추에게 돌렸다.
놈들 때문이다.
우둔한 무골들이 범한 실책이다.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성정의 참모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망설임 없이 허울을 덮어씌웠다. 가장 강경하게 야전을 고집한 사람이 바로 본인이었음에도 말이다.
“여양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성벽에 온통 적들의 군기들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앞서 여양성을 정찰하고 돌아온 척후가 보고했다.
여양성이 함락되었다.
대부분 불타버린 성루와 성벽이 처참했던 공방전의흔적을 말해주었다.
결국 조조군의 속임수에 현혹되어 여양성과 병마들을 모조리 잃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 무관들은 곽도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럼 여양성을 수비하던 장합과 고람까지 모두 죽었단 말인가? 봉기…, 그 빌어먹을 놈도 죽었겠군.’
조조군의 파상공세에 살아남았을 리 없다.
그렇게 판단한 곽도는 업성으로 말머리를 틀었다.
* * *
곽도의 입장에선 안타깝게도 여양성을 가까스로 탈출한 원소군의 잔당들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하지만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여양성을 탈출하자마자 사방에 매복하고 있던 조조군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화살세례가 계속 빗발치면서 원소군의 잔당들을 위협했다. 곧이어 처절한 비명과 함께 여양성의 병사들이 사정없이 죽어나갔다.
“커헉!”
“제장들은 군사를 엄호하라!”
우여곡절 끝에 참화를 벗어났음에도 새로운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조군이 아군의 움직임을 간파하고서 도처에 매복을 배치시켰다. 분명 업성으로 향하는 길목들마다 조조군이 급습을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이성휘, 참으로 영악하구나…!’
완패다.
철저히 패배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활한 신산귀모에 말려들어 전쟁을 망쳤다.
용맹한 장졸들의 도움으로 화살세례에서 목숨을 부지한 봉기는 전투의 승패를 완전히 단념했다.
“군사 어르신!”
무관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에 무관은 봉기를 대신하여 화살에 맞았다.
가슴에 화살을 맞은 무관이 뒤로 쓰러졌다. 봉기를 대신하여 화살받이가 된 것이었다.
“어서 뚫어라!”
“반드시 업성에 소식을 알려야 한다!”
장합과 고람이 창검을 치켜들면서 외쳤다.
선두에서 조조군을 대적하던 하북의 맹장들은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분전하면서 활로를 열었다.
“놈들이 도망친다!”
“쫓아라! 저기 놈들이 있다!”
고순의 무관들이 후미를 공격했다.
함진영(陷陣營).
중원 최강의 정예병들이 공격해왔다.
맹렬하게 추격하여 원소군의 잔당들을 반쯤 궤멸시킨 함진영이 돌파를 거듭했다. 연이은 전투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던 원소군은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크하악!”
보병들을 이끌고 후미를 엄호하던 엄경이 여양성에서 출격한 조조군의 기병대에게 목숨을 잃었다.
“조조군의 기병이다!”
“어, 어서 달려라! 뒤를 돌아보지 마라!!”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강행군에 지쳐버린 보병들이 재빠른 기동력을 자랑하는 기병을 따돌릴 순 없었다.
육중한 말발굽이 대지를 걷어찰 때마다 비명횡사하는 전사자들이 급증했다. 날랜 기병들의 추격으로 일방적인 학살이 전개되었다.
“병주의 기병들은 나를 따르라!”
이대로는 모두 전멸할 뿐이다.
막아야 한다.
설령 전장의 주검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병주자사 고간이 호기롭게 말머리를 돌리면서 원소군의 중진들을 호위하던 병주 기병대를 이끌었다.
“장합 장군과 고람 장군은 남은 병졸들을 데리고서 업성으로 가시오!”
“아니 되오! 소장이 남겠소이다!”
무수히 많은 적들에게 역공을 가하려는 위험천만한 고간의 행동에 장합이 격앙된 목소리를 내질렀다.
병주자사 고간은 여남원씨 가문의 핏줄을 물려받은 주군의 조카였다. 그렇기에 장합은 마땅히 본인이 대신 나서겠노라며 병장기를 들었다.
“공격하라!!”
일당백을 자랑하는 병주 기병대가 함진영을 향해서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추격이 잠시 중단되었다.
갑작스러운 원소군의 역공에 함진영은 전열을 갖추면서 반격에 들어갔다.
기병대의 추격으로 생사의 기로에 봉착했던 원소군은 고간의 분전 덕분에 사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가, 강이다!”
“강을 넘으면 업성이다! 모두 분전하라!!”
여양성을 탈출한 원소군의 잔당들은 마침내 업성으로 들어서는 경계에 도착했다.
얼어붙은 강이 펼쳐졌다.
강을 건넌다면 조조군도 결국 말머리를 돌릴 터.
드디어 희망을 보인다.
아비규환의 참상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장졸들은 헐레벌떡 내달리면서 활로를 통과했다.
‘주군…!’
무관들을 이끌고 선두에서 내달리던 봉기가 고개를 들어 엄동설한의 설야를 바라보았다.
업성 병력이 달려오고 있었다.
주군께서 보낸 지원군이 틀림없었다.
여양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까.
사면초가에 직면한 패장들을 구하고자 병마들을 투입한 주군의 자애로움에 몸을 떨었다. 전쟁에서 완패한 주제에 염치없이 도움을 받을 뿐인 현실이 너무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크읍!!”
군마에 박차를 가하면서 질주하던 봉기가 고통으로 얼룩진 침음을 토해냈다.
화살이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금속이 봉기의 등을 꿰뚫었다.
배후를 추격하던 고순이 쏜 활이었다.
만연한 희망에 안도하는 원소군 잔당들을 위협하고자 신출귀몰한 궁술을 발휘했다. 과연 장료와 더불어 명궁을 자랑하는 장수답게 신예에 가까운 솜씨였다.
“어떤 변수가 있더라도 대장군의 명은 반드시 완수되어야 한다. 적들을 모두 척살하라.”
“예, 장군!”
무장의 책무는 명령을 수행함에 있다.
병주자사 고간을 붙잡았다.
장렬하게 달려들었던 병주 기병대까지 찢어발겼다.
중원의 최정예를 자랑하는 함진영은 원소군의 저항을 모두 끊어내고서 마지막 숨통마저 압박했다.
* * *
여양성을 함락시킨 조조군은 업성 공략을 준비하기 전에 장졸들에게 먼저 휴식을 명령했다.
업성.
최후의 보루만을 남겨두고 있다.
원소군과의 마지막 결전에 전력을 다하고자 재정비를 거쳤다. 연이은 공방전과 엄동설한의 추위로 지쳐버린 장졸들은 거의 한계에 봉착한 상태였다.
“병사들의 상태는 어떤가?”
이성휘가 물었다.
그에 둔영을 순시하고 돌아온 장료가 보고했다.
“동상에 걸린 병사들이 많아요. 악전고투를 반복할수록 장졸들에게 부담을 이어졌으니까요.”
지당한 말이다.
장졸들을 너무 혹사시켰다.
결정적인 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장졸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를 무겁게 받아들인 이성휘는 명령을 훌륭하게 수행한 장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일말의 가식 없는 진심어린 경의였다.
“문원, 너도 이제 쉬어라. 많이 힘들 텐데.”
“네에.”
흑발을 늘어뜨린 여걸이 빙그레 웃었다.
두 팔을 뻗으면서 다가왔다.
이윽고 이성휘의 품에 폭 안겨들었다.
달콤한 체취와 함께 뜨거운 온기가 감돌았다.
“하아, 이제 치유되네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했었는데.”
“아만에게 들키면 곤란하다.”
이성휘의 대답에 장료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걱정 마세요. 등불이 꺼지는 것을 제가 직접 확인했으니까요.”
포상을 바라는 응큼한 목소리였다.
장료의 귀여운 애교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대장군!”
악전고투를 완수하고서 잠시 찰나의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을 때,
안타깝게도 다급한 급보가 도착했다.
숨을 돌릴 시간조차 없었다.
골치를 앓게 만들었던 여양성을 떨어트리자마자 새로운 위협이 조조군을 노렸다.
이성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장료를 놓아주었다. 뒤이어 무관을 들어오게 했다.
“대장군께서 점령했던 내황성과 번양성이 북쪽에서 내려온 적들에게 함락되었습니다.”
“북쪽? 유주의 지원군인가.”
새로운 적들이 출현했다.
유주의 병력인가….
침음을 삼키면서 탁상에 손을 올렸다.
“아닙니다. 원소의 부름을 받고서 달려온 요서군의 오환족입니다.”
“오환족이라….”
쿠웅-.
이성휘가 주먹을 거머쥐면서 탁상을 내리쳤다.
“당장 제장들을 소집해라.”
오환왕(烏丸王) 답돈.
결코 만만하게 여길 상대가 아니다.
북방의 패권을 흉노족과 양분한 오환족의 두령들이 전쟁에 개입했다. 새로운 변수를 조우한 이성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많이 피곤하다.’
헛웃음을 흘렸다.
장료에게 심정을 표현하는 무언의 전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