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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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량은 조조군의 진중에 숨어든 세작들로부터 오소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오소(烏巢).
백마와 연진 아래에 위치한 지역이다.
오소에 방대한 군수기지가 건설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여양성의 장수들은 크게 노발대발하며 격앙하는 반응을 보였다.
“오소에 군수기지라니…!”
“놈들은 분명 장기전에 대비할 작정입니다!”
대규모의 군수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은 조조군이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여양성에서 적의 본대를 격퇴하더라도 전쟁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업성은 어찌 되었는가!”
안량이 고개를 들어 윤해에게 물었다.
무엇보다 업성이 걱정이다.
분명 적의 파상공세에 시달리고 있을 터.
주군의 안위를 걱정한 안량은 대대적으로 척후들을 파견하여 업성의 소식을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척후들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뭣이? 모두 연락이 끊어졌단 말인가!”
업성의 전황을 살피고자 파견했던 척후들이 조조군에게 붙잡혀 모두 추살되었다.
통탄할 노릇이었다.
안량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걸상을 내리쳤다.
여양성을 포위했던 적들이 포위망을 풀었음에도 여전히 눈뜬장님 신세였다. 견고한 경계망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단 한 명의 척후도 여양성에 돌아오지 못했다.
“참으로 무심하군. 왜 눈보라가 걷혔단 말인가.”
안량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서 탄식했다.
눈보라가 그쳤다.
우중충한 먹구름이 걷히면서 하늘이 밝아졌다.
시야가 말끔하게 트이면서 척후들을 보내기가 더욱 난감해졌다. 눈보라가 그치면서 성을 몰래 나섰던 척후들이 모두 붙잡힌 것이기 때문이다.
“거머리 같은 놈들…! 포기를 모르는군!”
계속 연전연패를 경험했음에도 여전히 조조군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전력의 격차가 원소군의 발목을 집요하게 붙잡았다.
불리한 전황을 뒤집을 수단이 필요하다.
난황을 타개할 방법.
조조군에게 치명타를 가해야만 했다.
안량을 위시한 원소군의 제장들은 저마다 궁리하면서 방책을 의논했다. 이성휘가 주변 성채와 요새들을 공격하면서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인 여양성은 무거운 부담을 거듭하고 있었다.
“도독! 어서 결단을 내리시오!”
청주자사 곽도가 크게 일갈했다.
한꺼번에 적들을 소탕해야 한다.
계속 안량에게 건곤일척의 결전을 요구했다.
“오소에 군수기지를 건설했습니다!”
“이제 수성만으로는 적들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조조군은 이미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다.
수성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청주자사 곽도의 진언처럼 적들에게 치명타를 가해야만 하북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곽도의 의견에 동참하듯 제장들이 벌떼처럼 일어서면서 안량을 설득하려 했다.
“도독!”
주전(主戰)이 파랑처럼 몰아치고 있었을 때,
참혹한 소식이 여양성에 도착했다.
“내황성과 번양성이 함락됐습니다!”
대장군 이성휘의 파상공세에 결국 내황성과 번양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철옹성의 위용을 자랑하던 요새들이었으나 결국 조조군의 책략에 빠져 궤멸되었다. 성을 수비하던 병력들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이어지면서 여양성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장수들은 대체 뭘 했단 말이냐!”
내황성과 번양성을 수비하던 맹대와 엄경이 붙잡혀 참수되고 휘하 장졸들 또한 뒤를 따랐다.
불과 보름이다.
업성을 호위하던 성채들이 불과 보름도 안 되어 무너지고 만 것이다.
대장군 이성휘가 내황성과 번양성을 차례대로 함락시키면서 업성의 방비가 무너졌다. 계속 항전을 이어나가던 여양성의 입장에선 최악의 결과였다.
“당장 업성을 지원해야 합니다!”
“아니오! 오소부터 먼저 공격해야 하오!”
장수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분란에 휩싸인 모습을 통해 동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조군의 군수기지를 모두 불살라야 하네!”
곽도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천재일우의 기회다.
더 이상 망설여선 안 된다.
오소의 군수기지를 불사른다면 결국 조조군은 업성으로 보낸 여포와 장료에게 귀환을 명령하겠지. 또한 모든 군량을 잃게 된다면 조조군은 하북 정벌을 중단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 곽공칙이 주역으로 떠오를 절호의 기회다…!’
곽도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강렬한 희열을 느꼈다.
뜨거운 혈류가 온몸에 확산되는 듯했다.
드디어 하늘께서 나에게 손을 뻗어주셨다.
뒤늦게 임관한 주제에 중신이랍시고 거들먹대는 오만한 기주 사대부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하북의 2인자로 군림할 기회였다.
‘전풍! 심배! 이제 네놈들도 끝장이다! 네놈들이 업성에서 가만히 방관하는 동안에 나는 이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위대한 전공을 달성할 것이다…!’
설욕을 할 때가 왔다.
후발주자였던 전풍과 심배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청주자사로 밀려나는 굴욕을 겪지 않았던가.
기주 놈들.
오만방자한 네놈들을 짓눌러주겠다.
곽도는 재차 심기일전하며 안량과 문추에게 건곤일척의 일전을 주장했다. 오소를 공격하여 적들의 파상공세를 받고 있는 업성을 구원해야 한다는 책략을 장수들에게 내세웠다.
“청주자사의 고견이 지당합니다!”
“진화타겁(趁火打劫)의 상황입니다! 절대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됩니다!”
조조군의 군영에 파견했던 세작들이 전황을 완전히 뒤집을 기회를 물고 왔다.
곽도에게 완전히 감화된 장수들은 결전을 주장하면서 안량과 문추를 설득했다. 강경한 목소리에 장합과 고람도 결전을 바라는 모습을 보였다.
“도독!”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장수들이 재차 외쳤다.
절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격앙된 목소리에 각오가 담겨 있었다.
침음을 삼키면서 고민을 거듭하던 안량은 장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야습을 결정했다.
“알겠네…. 청주자사, 자네의 말에 따르지.”
위태로운 전황이 불러온 의심암귀에 빠져버린 안량은 주군께서 계신 업성을 한시라도 빨리 구원해야 한다는 초조함에 빠져 있었다.
그렇기에 결국 반신반의하면서도 곽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잘 생각하시었소, 도독.”
지금까지 우유부단한 모습을 일관하던 안량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곽도가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결전이 성사되었다.
야전을 지휘할 하북사정주는 내가 고안한 계책대로 움직이는 훌륭한 바둑돌들이 되어줄 터.
직접 장졸들과 출격하여 조조군을 완파할 것이다.
곽도는 쾌재를 부르면서도 계속 침묵을 이어나가고 있던 봉기에게 조소를 보냈다.
‘그래, 네놈은 매번 점잔을 떨면서 고고한 학자로서의 모습을 보일 뿐이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설령 속물이라며 지탄을 받더라도 권력을 거머쥘 것이다!’
여남원씨 가문을 오랫동안 보필했던 영천군의 명사는 오로지 권력만을 추구하는 욕망의 화신이었다.
매번 정쟁만을 일삼았다.
정적들을 몰아내기 위한 권모술수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강경한 목소리로 하북사정주에게 결전을 주장한 것도 오로지 기주의 정적들을 숙청할 무소불위의 권력을 거머쥐기 위해서였다.
* * *
야습을 결정한 원소군은 조조군이 대응하지 못하도록 사흘 뒤에 곧바로 작전을 실행했다.
조조군으로 위장한 병력들이 야음을 틈타 여양성을 은밀하게 움직였다. 뒤이어 안량과 문추가 이끄는 병력들이 빠져나와 평구(平邱)에서 합류했다.
작전은 매우 순조로웠다.
여양성을 포위했던 조조군이 군진을 후방으로 물린 덕분이었다.
“수상쩍군. 너무 잠잠하지 않은가?”
병마들과 함께 은밀하게 이동하던 문추가 안량에게 물었다.
너무 쉽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성을 빠져나왔다.
여양성 인근의 경계망이 놀라울 정도로 느슨했다.
업성으로 출발했던 척후들이 모두 붙잡혔을 정도로 삼엄했던 경계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아무리 장졸들이 조조군으로 위장을 했더라도 무탈하게 경계망을 빠져나온 것은 충분히 경계할 만한 일이었다.
“뭐가 그리 의심스러운가? 조조군은 업성 방면에만 경계를 기울이고 있지 않나. 여포와 장료가 업성으로 출진하고 이성휘가 주변 성채들을 정벌하러 출진하였으니 경계망의 병력이 비는 것은 당연하네.”
안량과 문추에게 가세한 청주자사 곽도가 그럴싸한 근거들을 대면서 조목조목 반박했다.
들키지 않은 게 당연하다.
연이어 병력들을 출병시킨 조조군은 광활한 전선을 모두 경계할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된 상태였다.
곽도의 설명에 안량과 문추처럼 불안감을 경계하던 장수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단번에 연진을 들이친 뒤에 오소로 진격하여 군수기지를 모두 불태워야 하네. 알겠는가?”
곽도가 안량과 문추에게 지시를 내렸다.
본인이 총사(總司)라고 생각하는지,
상전처럼 기고만장하여 명령을 내리는 곽도의 태도가 실로 오만방자했다.
“어서 움직이세.”
낙장불입(落張不入).
이제 돌이키기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아갈 뿐이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도독, 이제 연진입니다.”
심야의 그림자에 숨어들어 은밀하게 기동한 원소군은 강행군을 반복하여 연진에 도달했다.
연진이다.
저 너머에 오소가 있을 터.
여양성을 수비하던 1만의 군세를 야습에 동원했다.
장합과 고람에게 여양성을 맡기고서 전선으로 출병한 안량과 문추는 이윽고 창끝을 높게 치켜들면서 매복하고 있던 장졸들에게 우렁찬 고함을 내질렀다.
“연진을 돌파하라!”
“공손독 장군은 오소를 먼저 공격하게!”
조용히 숨죽이며 공세를 기다리던 원소군 장졸들이 벌떼처럼 일어섰다.
역전의 때가 왔다.
오소를 불태워 주군에게 승리를 바치리라.
용맹무쌍한 여양성의 장졸들이 일제히 함성을 크게 내지르면서 병장기를 들어올렸다.
야습에 투입된 원소군은 무방비나 다름없는 상태의 연진을 일제히 공격했다.
“원소군의 야습이다!”
“지금이다! 어서 불을 밝혀라!”
원소군이 공세를 결행한 순간,
칠흑처럼 어두운 그림자가 내리깔린 풀숲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불빛이다.
수많은 불빛들이 원소군을 포위했다.
야습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풀숲에 매복했던 조조군 병력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