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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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에게 애걸복걸하여 기회를 얻어낸 허유는 전선을 돌면서 원소군 장수들에게 항복을 종용했다.
항복하라!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너희들도 조정에 투항하면 관직과 봉토를 하사받을 수 있다.
조조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동원하여 백마와 연진을 한꺼번에 점령했다. 급보를 들은 원소군 무장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허유는 그 빈틈을 이용하여 내분을 조장하려 했다.
“여남원씨 가문은 머지않아 멸문할 것이다! 너희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병장기를 버리고 투항하여 편안과 안도를 찾도록 하라!”
엄동설한에 몸서리를 치는 것은 원소군도 마찬가지였다.
매서운 추위가 날아들었다.
성벽 위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들은 살이 떨어질 듯한 추위를 계속 견뎌내고 있었다.
또한 장수들도 마찬가지일 터.
교활한 모사꾼답게 허유는 사람의 마음을 현혹하는 재주가 탁월했다. 군세를 이끌고 목야성 인근에 당도하자마자 목야현의 여러 호족들을 전향시켰다.
“참으로 지독한 작자구려.”
“배신과 변절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인물이오.”
청주의 명사였던 도구홍은 허유를 두고 ‘위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진흙탕을 걷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라 평가한 바가 있었다.
그 말이 정확했다.
허유는 본인의 위급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나라의 위난을 걱정하는 인물이었다면 강직한 명사로 이름을 떨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허유는 오로지 본인의 위난만을 걱정하는 인물이었기에 교활한 간신으로 악명을 떨쳤다.
“항복하라! 투항하라! 너희들의 살길은 오로지 조정에 투항하는 것이다!”
허유가 재차 투항을 종용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놈들! 네놈들이 백기를 들고 투항해야 내가 일등공신이 될 수 있단 말이다!’
훌륭한 변절자가 되어야만 조조군의 신뢰와 총애를 거머쥘 수 있었다.
궁중의 축하연에서 이성휘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허유는 광적으로 전공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르신, 성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추위를 꿋꿋하게 버텨내면서 고함을 내질렀던 노력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다.
끼이익-.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눈과 얼음에 뒤덮인 성문이 마침내 움직였다.
호위병들을 지휘하던 한순과 광경을 지켜보던 허유는 기대감에 벅찬 표정을 지었다. 무혈입성에 성공한다면 당연히 공신에 책봉될 것이기 때문이다.
“배신자를 죽여라!”
“저기 허유가 있다! 어서 활을 쏴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목야성을 수비하는 병력들은 순순히 백기를 들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투항 때문에 성문을 연 것이 아니다.
더러운 배신자를 척살하고자 성문을 연 것이었다.
성문이 열리면서 기병들이 달려들었다.
쏜살같이 달려드는 기병들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 허유는 혼비백산하여 한순과 달아났다.
퍼억-!
푸화악!!
허유를 호위하던 병사들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투항을 종용하고자 성문 가까이에 접근했던 허유의 실책이 병사들의 애꿎은 목숨을 앗아갔다.
“결국 사달을 낼 것 같더라니…! 당장 기병들을 투입하세요!”
황금 갑주를 걸친 흑발의 여인이 나섰다.
헐레벌떡 도망치는 허유와 한순.
그들의 한심스러운 작태를 지켜보던 조홍은 곧바로 기병들을 투입했다.
목야성의 성문이 열렸다.
조홍은 허유와 한순을 구명하고자 기병들을 투입하면서도 병력을 급파하여 목야성을 공격하려 했다.
* * *
조조와 이성휘는 업성으로 향하는 입구인 여양성을 마주하고 있었다.
여양성(黎陽城).
반드시 뚫어야 하는 거점이었다.
연진과 백마를 순식간에 점령하여 승기를 거머쥐었던 조조군은 여세를 몰아 여양성을 포위했다.
“하북사정주가 여양성에 입성했다고 합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
원소군을 대표하는 용맹한 맹장들이 요새를 사수하고 있다.
무혈입성은 불가능했다.
낙승을 점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여양성이 무너지면 곧바로 업성이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하북사정주는 분명 목숨을 버릴 각오로 여양성을 사수할 터였다. 그렇기에 조조군은 요새를 포위했음에도 공격을 내리지 못했다.
“성을 넘을 수 있겠나?”
“반드시 함락시키겠습니다.”
태연하게 가능성을 논할 여유가 없었다.
추위가 매서웠다.
눈보라가 더욱 거칠게 기승을 부렸다.
여세를 등에 업고 있을 때를 적절하게 이용하지 못한다면 사기가 점차 하락할 터였다. 병사들이 추위에 무너질까 염려한 이성휘는 곧장 총공세를 준비했다.
“공성을 준비하라!”
“북을 쳐라! 여양성을 공격한다!”
여포와 장료가 병장기를 치켜들었다.
휘하의 팔건장이 칼자루를 뽑아들면서 장졸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공성이 결정되었다.
묵묵히 칼바람을 견디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전열을 갖췄다.
“눈을 걷어냈습니다!”
“다시 또 눈이 쌓이기 전에 공성병기를 투입하셔야 합니다!”
폭설 속의 공성전은 실로 처참했다.
눈이 쌓이고 있다.
매섭게 불어닥친 폭설이 공성병기들의 진로를 가로막기 일쑤였다.
그래서 보병들은 화살세례를 뚫는 난전을 벌이면서 진로를 방해하는 눈을 걷어내야 했다. 양손으로 삽을 거머쥔 보병들이 목숨을 건 제설에 나섰다.
“공격하라!”
“여양성을 쳐라!”
말을 탄 무관들이 소리쳤다.
뒤이어 군세가 진격하면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크학!”
“지, 진격하라! 성벽을 넘어라!”
육중한 공성병기에 의지하며 성벽으로 진격하던 병사들을 향해 화살세례가 날아들었다.
푸욱-!
화살이 빗발치며 병사들을 위협했다.
하지만 산전수전을 모두 겪었던 조조군의 정예병들은 이에 아랑곳 않고 뛰어들었다. 공성병기가 성벽에 도달할 수 있도록 방패를 들며 분전했다.
“충차를 성문까지 엄호하라!”
“두려워 말라! 계속 공세를 퍼부어라!”
학맹과 성렴이 검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성벽에 운제들이 놓였다.
병사들이 운제를 타고서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파상공세에 편승하여 위치에 도달한 충차가 여양성의 성문을 들이박았다. 숫양의 뿔처럼 생긴 울퉁불퉁한 통나무가 꽝꽝 소리를 내면서 계속 두들겼다.
“놈들이 온다!”
“운제를 모두 걷어내라! 성벽을 사수하라!”
조조군의 파상공세에 원소군은 완강하게 반격을 가하면서 성문과 성벽을 지켰다.
들썩-.
성벽에 걸린 운제가 흔들렸다.
성벽을 수비하던 원소군 병사들이 곡선으로 휘어진 병기를 동원하여 운제를 걷어냈다.
운제에 매달려 성벽을 기어오르던 조조군 병사들은 중심을 잃고 흔들리다가 아래로 추락했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팔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쇠, 쇠뇌다!”
“이놈들…! 아주 만반의 준비를 갖췄군!”
성벽 곳곳마다 배치된 쇠뇌들이 공세를 이어나가던 조조군을 위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러 수성병기들이 여양성을 호위하고 있었다.
여양성이 뚫리면 곧바로 업성이다.
그것을 숙지하고 있었기에 원소군은 여양성의 수비에 총력을 다했다.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여양성을 포위한 조조군이 난색을 보였을 정도였다.
“크아아악!!”
“기, 기름이다! 어서 피해라!!”
거무튀튀하고 걸쭉한 검은색 액체가 울컥 쏟아지면서 충차를 흠뻑 적셨다.
뜨겁게 가열한 액체를 뒤집어쓴 병사들은 혼비백산하며 비명을 토해냈다.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
숙련된 병사들은 고약스러운 냄새를 맡자마자 전열을 이탈했다.
“형양에서 당한 원수를 갚겠다!”
성문을 호위하던 안량이 활을 치켜들었다.
불화살을 겨눴다.
차디찬 칼바람에도 불화살은 하염없이 활활 타오르면서 조조군을 위협했다.
파앙-!
이윽고 불화살이 활시위를 떠나 거무튀튀한 기름에 범벅이 되어버린 충차에 꽂혔다.
그 순간,
초열의 불길이 폭산하여 조조군을 집어삼켰다.
* * *
조조군은 며칠 동안 총공세를 가했음에도 난공불락을 자랑하는 여양성은 끝내 버텨냈다.
업성이 코앞이다.
그럼에도 여양성을 넘을 수 없었다.
절대적인 충성을 자랑하는 장졸들은 결사의 각오로 침공을 격퇴했다. 형양에서 당한 치욕을 그대로 갚아주겠다는 듯이 완강하게 저항하며 침략자들을 몰아냈다.
“이대로는 끝이 안 남! 우리가 동사하는 게 먼저일 거임!”
끔찍한 패전이 이어졌다.
처참한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정공법으로는 어림도 없다.
새로운 대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맞는 말이에요. 장졸들의 사기가 추락하기 전까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해요.”
사마의의 말에 순유가 동조하며 말했다.
돌파구.
여양성을 함락시킬 방책이 필요했다.
충차를 비롯하여 수많은 공성병기들이 원소군의 화계에 소실되었다. 막대한 타격을 입은 조조군은 계속 지지부진한 전황을 이어나가는 형편이었다.
“강을 끌어다가 수공을 퍼붓는 건 어떰.”
“빙하처럼 꽁꽁 얼었거든요?”
사마의의 말에 양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황하가 얼어붙었다.
게다가 눈보라까지 몰아치고 있었다.
만약 계절이 여름이었다면 충분히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방안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이었다.
“…적들을 끌어내는 것은 어떤가.”
참모들의 갑론을박을 조용히 경청하던 이성휘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여양성은 철옹성과 같았다.
분명 사마의의 말처럼 일반적인 공세로는 철옹성을 무너트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성휘는 유인계(誘引計)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영예로운 주군. 등껍질에 숨어버린 거북처럼 완강하게 저항하는 적들을 꾀어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옵니다.”
가후가 난색을 표시했다.
유인계.
분명 아군에게 가장 절실한 계책이었다.
난공불락의 철옹성에 의지한 적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낼 수만 있다면 형양에서 거둔 완승에 이어 새로운 대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척간두에 서는 것처럼 거의 불가능했다.
어떤 속임수로 완강하게 저항하는 적들을 바깥으로 유인할 수 있겠는가?
심산귀모의 귀재인 가후조차도 난색을 드러낼 정도였다. 뛰어난 군재로 수많은 전장들을 승리로 이끌었던 순유 또한 쉽지 않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에 이성휘가 말했다.
“오소에 후방의 모든 물자들을 모아라.”
오소(烏巢).
뜬금없는 이성휘의 명령에 참모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