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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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 위의 격전.
새카맣게 밀려든 중원의 군세들이 백색으로 점철된 황하를 뒤덮었다.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 위에 병사들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빙하처럼 얼어붙은 황하를 통과한 군세들은 용맹한 포효를 내지르면서 달려들었다. 아연실색하는 반응을 보이던 원소군도 이윽고 태세를 정비하고서 병장기를 치켜들었다.
“공격하라!”
“조조군이 쳐들어왔다! 반격하라!”
중원의 병마들이 벌떼처럼 전장을 가로질렀다.
그 위를 수많은 화살세례가 수놓았다.
파바바바박!
파바바바바바바박──!!!
처절한 비명이 확산되었다.
날카로운 화살이 머리를 관통했다.
선봉에서 질주하던 수많은 기병들이 화살세례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조조군의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새하얗게 물든 하늘을 뒤덮은 화살세례조차도 돌격을 개시한 14만 대군의 진격을 멈출 순 없었다.
“목책을 박살내라! 참호를 넘어라!”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걸이 입김을 토해내면서 적들을 향해 창끝을 겨누었다.
연진(延津)을 공격했다.
조조군의 선봉이 전장을 우회하여 연진을 사수하던 원소군의 배후를 쳤다.
또한 백마(白馬)도 마찬가지였다.
이전과 우금이 지휘하는 기병들이 백마를 급습하여 원소군을 뒤흔들었다.
“놈들이 동요하고 있다!”
“공격하라! 백마를 빼앗아라!”
하북을 수비하는 요충지였던 백마와 연진이 총공세에 휩싸였다.
견고한 목책들을 부수고 얼어붙은 참호를 뛰어넘은 조조군이 병장기를 거머쥐고서 원소군과 격전을 벌였다.
전투가 벌어졌다.
동시에 여러 곳에서 참호전이 시작되었다.
엄동설한의 전장에 참전한 장졸들은 새하얀 입김을 토해내면서 병장기를 휘둘렀다.
“더러운 중원 놈들!”
“하북의 역적들을 참살하라!”
서로에게 창끝을 휘둘렀다.
핏물이 흙바닥에 쏟아졌다.
수많은 시체들이 눈밭에 쓰러졌다.
처절한 죽음이 백색의 전장을 물들였다.
하지만 무자비하게 살육과 유혈에도 장졸들은 꿋꿋하게 혈전을 이어나갔다. 수많은 전장을 누볐던 숙련된 강병들에게 있어 치열한 혈전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기에.
“제법 빡센데! 역시 원소군이야…!”
참호들을 연이어 점령하면서 승세를 올리던 하후돈이 월도에 묻은 피와 살점을 털어냈다.
과연 원소군이다.
사납기 이를 때가 없었다.
강철처럼 견고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원소군은 패국의 여걸조차 질리게 만들었다.
구덩이를 파던 삽과 곡괭이를 휘두르면서 저항하는 원소군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물러서지 마라! 연진을 무너트려라!!”
역경과 고난은 항상 뒤따르는 숙명과도 같다.
물러설 순 없다.
계속 진격만이 있을 뿐이다.
패국의 여걸이 달려들었다.
그에 가세하여 조조군 또한 공세를 반복했다.
“거기장군을 따르라!”
“우리는 몇 배는 많은 대군이다! 계속 공격하라!!”
결사를 각오한 저항에 직면했지만 조조군은 압도적인 격차로 원소군의 의지를 짓밟았다.
당랑거철(螳螂拒轍).
원소군은 달리는 수레바퀴를 막으려는 만용을 부리는 사마귀에 지나지 않았다.
사마귀는 결국 수레바퀴에 뭉개졌다.
연이어 점령당하는 백마와 연진의 참호들이 풍전등화의 결과를 말해주고 있었다.
“연진이 무너졌습니다!”
“적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서 퇴각해야 합니다!”
병주자사 고간과 청주자사 곽도가 장수들을 동원하여 공세를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적들이 너무 많다.
대체 얼마나 많은 병력들이 동원되었단 말인가.
중원의 병력들을 모두 투입한 것이 분명했다.
불리한 전황을 통보하듯이 연이어 전령들이 비보를 전했다. 조조군이 전장을 집어삼키는 광경을 고지 위에서 지켜보던 고간과 곽도는 침음을 삼켜야 했다.
“연진에서 퇴각하라!”
“여양까지 물러나서 태세를 정비한다!”
항전을 반복하던 원소군이 말머리를 돌렸다.
시간은 충분히 벌었다.
이제 업성의 본대가 여양에 당도했을 터.
나발을 울리면서 전군에 퇴각을 명령했다.
얼어붙은 참호에 의지하며 조조군과 난전을 벌이던 원소군은 거점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물러났다.
“원소군이 퇴각한다!”
“연진과 백마의 고지들을 점령하라!”
연진과 백마가 무너졌다.
강경하게 저항하던 원소군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14만 대군이 황하를 넘었다.
조조군의 군기들이 험준한 고지 위에 펄럭였다.
총공세로 교두보로 사용될 요충지들을 점령한 조조군은 전열을 재정비했다. 잠룡처럼 업성에 똬리를 틀고 있는 원소군의 본대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 * *
연진과 백마가 함락되었다.
조조군이 움직였다.
그 숫자는 무려 14만에 이르렀다.
전령으로부터 급보를 받아든 전풍은 무거운 침음을 흘리면서 참모들을 소집했다. 연진과 백마를 모두 점령한 조조군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백마와 연진은 점령하긴 쉽지만 수성을 하기엔 어려운 거점들일세. 병력을 애꿎게 허비할 바에야 차라리 조조군에게 내어주는 것이 상책이네.”
적들에게는 교두보가 되어줄 중요한 요충지지만 아군에게는 애물단지나 다름없었다.
백마. 연진.
두 거점들은 황하의 지류를 앞뒤로 끼고 있었다.
업성을 호위하는 성채와 요새들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확장한 원소군에게 있어 백마와 연진은 잃어도 상관없는 거점에 불과했다.
“하지만 백마와 연진의 장졸들이 분전한 덕분에 업성의 본대가 무사히 여양에 당도할 수 있었지 않나.”
백마와 연진을 잃었다.
아무리 애물단지여도 아쉬움을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백마와 연진에서 장졸들이 분전해준 덕분에 하북사정주가 무사히 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풍의 말에 대답한 심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북사정주만으로는 저들을 막아낼 수 없소. 일전에 천하제일검에게 패배하지 않았는가.”
“지원군을 더 보내야 하오!”
신평이 말했다.
그에 신비가 형 신평의 의견에 가세했다.
안량. 문추. 장합. 고람.
네 명의 장수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북을 대표하는 맹장들을 모두 투입하였음에도 상대가 이성휘였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조조군의 병력은 무려 14만에 달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성채와 요새들마다 장수와 병력들을 파견했네. 섣불리 군세를 움직였다간 진형이 무너질 걸세.”
조조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축조한 성채와 요새들은 철옹성과도 같았다.
야전을 치르는 일은 없다.
철저히 수성전을 고집하면서 적들을 엄동설한에 지치게 만들 것이다.
철옹성에 의지하여 견고한 수성을 이어나간다면 제아무리 이성휘라도 전진이 어려울 터. 북방에서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조조군을 묶어두려 했다.
“교활한 놈들이 성채와 요새들을 무시하고 곧장 업성을 노린다면 낭패가 아니겠나?”
“오히려 바라는 바일세. 이성휘가 무리하게 업성을 도모한다면 팔방에서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니.”
성채와 요새들을 동원한 방어선은 거미줄처럼 매우 촘촘하고 견고했다.
결코 방어선을 뚫을 수 없으리라.
확신이 섞인 단언으로 신평의 물음에 대답했다.
“별가종사.”
참모들이 의논을 이어나가고 있었을 때,
휘하 장수인 율성이 다가왔다.
“답둔이 발해군을 넘었습니다.”
오환왕(烏丸王) 답둔의 군세들이 기주에 도착했다.
도합 4만.
원소군을 지원하고자 산하의 두령들을 이끌고 개입한 것이다.
공동의 적이었던 공손찬군을 멸망시키고자 함께 단결했던 원소군과 오환족은 이번에도 공적을 섬멸하고자 서로 공투하게 되었다.
“오랜 동맹이라고는 해도… 탐탁치가 않네. 북방의 오랑캐를 하북으로 끌어들이다니.”
만리장성 이북과 유주 일대에서 호령하는 두령들을 복속시킨 오환족은 매우 막강한 세력이었다.
수많은 기병군단을 거느리고 있다.
또한 오환족 출신의 장졸들은 사납고 용맹했다.
분명 전쟁에서 큰 전력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심배는 오랑캐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불길하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만…. 우선은 오환족의 용맹을 믿어볼 수밖에.”
동맹의 도리를 지키고자 오환족은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군세들을 동원하여 원소군을 지원했다.
그 신의만큼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전풍과 심배는 오환족을 경계하면서도 동맹의 신의를 지키려는 답둔의 결정만큼은 존중했다.
“이제 곧 주군께서 돌아오시겠군.”
원소는 여남원씨 가문의 종친들과 위군을 순회하면서 협력과 단결을 호소하고 있었다.
조조군을 격퇴해야 한다.
위군의 호족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여남원씨 가문을 추종하는 호족들은 원소의 간청에 응답하여 사병과 물자를 빌려주었다. 여러 악재가 있었음에도 호족들은 여전히 원소를 신뢰하고 있었다.
“목야성에서 급보가 도착했소!”
참모 순심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목야성(牧野城).
업성을 호위하는 성채들 중의 하나였다.
“조조군이 벌써 목야성을 포위했소! 배신자 허유를 앞세워 목야성에 투항을 요구했다는구려!”
“허유! 이런 죽일 놈이!”
순심의 말에 참모들이 비분강개하며 소리쳤다.
허유.
더러운 배신자가 전면에 섰다.
주군을 배신하고 도망친 변절자는 완전히 조조군의 심복이 되어 향로(向路) 역할을 하고 있었다.
원소의 심복이자 원소군의 원로였던 허유는 인맥을 동원하여 목야성의 장수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