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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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짙은 함박눈.
굵고 탐스러운 눈송이가 펑펑 쏟아졌다.
서량 정벌의 완수를 경하하는 축하연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혹한의 백색이 허도를 뒤덮었다.
“눈이닷!”
“빨리 눈덩이를 드는 것입니닷!”
두터운 털옷을 껴입은 아이들이 눈더미가 소복소복 쌓인 공터로 몰려들었다.
오매불방 기다렸던 아버지가 돌아와 기분이 들떴던 아이들은 모든 기우를 털어낸 듯한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서로에게 눈덩이를 휙휙 던졌다.
“에코!”
“꺄하핫!”
추위에 코를 훌쩍이고 재채기를 연신 반복했음에도 아이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받아랏!”
“즉시 돌려주는 것입니닷!”
파악-!
파바박-!
눈덩이가 꽂혔다.
얼굴에.
그리고 몸에.
맹렬하게 쏟아지는 눈덩이가 전장의 화살세례를 떠올리게 했다.
정월이 지나면 하북 정벌이 개전된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서량에서 돌아온 아버지와 다시 이별하게 되겠지.
그러나 그것을 알 리가 없었던 아이들은 그저 눈싸움을 즐길 뿐이었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에게 있어 전쟁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으니까.
“공자님.”
우산을 들고 있던 시녀가 다가왔다.
“많이 늦었습니다. 이제 환행하셔야 합니다.”
“네엡.”
떠들썩한 광경을 뚫어져라 주시하던 남자아이가 시녀의 재촉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억지를 부려도 되건만,
남자아이는 고개를 꾸벅이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아장아장-.
짧은 다리로 눈더미를 소복소복 밟았다.
명문가의 유모와 사병들로 위장한 인원들이 뒤따르면서 작은 아이를 호위했다. 혹시라도 괴한이 들이닥칠까 시녀와 근위병들이 사방을 살폈다.
“공자님, 저 아이들과 놀고 싶으십니까.”
“…아니요.”
좌중랑장 전위가 물었다.
그에 조앙은 고개를 내저었다.
불가능한 억지다.
시녀와 병사들을 곤란하게 만들 게 분명했다.
혹시라도 자신의 고집 때문에 곤란을 겪게 될까 두려웠던 조앙은 꿋꿋하게 마음을 억눌렀다.
만약 말괄량이 조비였다면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내면서 억지를 부렸겠지. 하지만 조앙은 자유분방한 성정의 여동생과는 달리 어른처럼 조숙했다.
자신의 행복보다는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안위를 우선으로 여겼기에 벌써부터 절제된 모습을 보였다.
“다녀왔습니다아.”
방한복을 꽁꽁 껴입은 남자아이가 뒤뚱뒤뚱 걸으면서 궁궐로 돌아왔다.
궐문에 서서 아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여인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맞이했다.
“바깥 산보는 재밌으셨나요?”
“네엡.”
순욱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습기에 축축해진 조앙의 얼굴을 닦았다.
“많이 춥죠?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따뜻한 유자차를 마련해뒀어요.”
뺨이 많이 차갑다.
맑은 콧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시가지를 돌아다니느라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고뿔이라도 걸릴까 걱정된 순욱은 또래들이 시끌벅적하게 노는 모습을 보고 돌아온 조앙을 사방으로 이끌었다.
“마시면 몸이 따뜻해질 거예요.”
“감사합니다아.”
후우-. 후우-.
입으로 바람을 불면서 차를 식혔다.
그 뒤 조심스러운 손길로 찻잔을 내밀었다.
순욱의 품에 안긴 조앙이 적당히 식은 유자차를 홀짝홀짝 마셨다. 어미새의 품에 들어와 고개만을 배꼼 내민 채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새 같았다.
“이제 몸도 따뜻해졌으니까 글공부를 시작할게요.”
“네엡.”
패국조씨 가문의 후계자를 훈육하는 스승으로 발탁되어 한문을 가르쳤다.
조정의 문무백관을 대표하는 상서령이 글방의 훈장처럼 글공부를 가르치는 것에 불만을 느낄 법도 했음에도 순욱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아이를 가르치는 일이다.
어찌 주군의 제안을 마다할 수 있을까.
남몰래 연모하는 사내를 빼닮은 어린아이를 바라보면서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 * *
내년에 네 살을 맞이하는 조앙은 당차고 의젓한 모습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 어머니들.
외할아버지와 이모들.
패국조씨 가문을 섬기는 시녀와 근위병들에 이르기까지.
장래가 촉망되는 후계자.
특히 아버지를 쏙 빼닮은 잘생긴 용모 덕분에 아리따운 어머니들에게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도련님, 오늘도 활기가 넘치네.”
“네엡.”
머리카락을 화사한 금발로 물들인 여인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허리를 숙였다.
싹싹하고 순박한 도련님.
말랑말랑한 뺨이 특히 귀엽다.
과연 시녀와 근위병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만했다.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게 아닐까.
벌써부터 패국조씨 가문을 추종하는 사대부와 호족들의 기대를 받을 정도로 온화한 성품을 본유한 조앙은 완벽한 후계자로 촉망받고 있었다.
“글공부를 시작하면서? 어렵진 않아?”
진궁이 물었다.
그에 조앙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어렵지만… 괜찮슙니다.”
이틀 전부터 시작한 글공부가 많이 어려운 듯하다.
당연했다.
이제 첫 단계에 발을 디뎠으니까.
경전을 잠시 훑은 것만으로 줄줄 암기하는 양수 같은 천재가 아니고서야 글공부가 쉬울 리 없었다.
“너무 무리하진 마. 혼자서 끙끙 앓는 것은 엄청나게 나쁜 버릇이거든.”
기대와 관심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면 부담과 근심이 될 뿐이다.
이제 네 살이다.
천진난만하게 뛰어놀 나이였다.
우려스러운 눈길로 후계자를 바라보았다.
무거운 중압감을 떠안고서 장렬하게 산화했던 벗을 떠올린 진궁이 슬픈 미소를 흘렸다.
“명쉼하겠습니다아.”
그 모습이 안타깝게 보인 걸까.
조앙이 품에 달려들었다.
양팔을 뻗으면서 슬픈 미소를 짓던 진궁을 꼭 끌어안았다.
부드럽고 따스한 온기가 공허함을 가득 채웠다.
“자, 이건 선물.”
진궁이 곱게 포장한 선물을 내밀었다.
종이. 붓. 벼루. 먹.
흔히 문방사우(文房四友)라 불리는 글공부에 꼭 필요한 학용품들이었다.
조앙이 놀란 표정으로 학용품들을 건네받았다.
깜짝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히히 웃으면서 학용품들을 양팔로 안아들었다.
어린아이에게 어울리는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조조군의 참모장이 웃으면서 귀여운 후계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의미에서 우리 귀여운 도련님에게 주는 선물이야. 뭐, 가끔씩은 땡땡이 쳐도 괜찮아. 나도 그랬으니까.”
“네에!”
도련님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나도 이런 아들이 있었으면….
조앙에게 흐뭇한 시선을 보내면서 중얼거렸다.
* * *
조앙이 지필연묵을 들고 돌아오자 전각에서 기다리던 조홍과 조인이 맞이해주었다.
이모들이다!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꾸벅였다.
어머니에 버금갈 정도로 이모들을 좋아했기에 강아지처럼 달려가서 품에 안겨들었다.
어째서인지 전각을 방문한 조홍과 조인은 방한복을 입고 있었다. 산짐승의 모피로 만든 털옷. 설산이라도 탐험할 것처럼 두터운 복장이었다.
“눈이 엄청 쌓였더라! 가서 놀자!”
조홍이 발랄한 목소리로 귀여운 조카에게 눈놀이를 제안했다.
“공부만큼이나 노는 것도 중요하다고 들었다.”
조인이 양팔을 뻗으면서 조카를 번쩍 안아들었다.
“히히! 네엡!”
부지런히 글공부에 매진한 조카를 응원하고자 이모들은 설원처럼 드넓게 펼쳐진 광활한 공터로 향했다.
울타리들이 둘러진 공터.
중원 제일의 부자인 조홍이 소유한 땅이었다.
이모들과 마차를 타고 이동했던 조앙은 도화지처럼 새하얗게 펼쳐진 설원을 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어린아이에게 어울리는 순진무구한 반응을 보였다.
“자, 이렇게 굴리면 돼.”
“와! 눈사람!”
조앙이 조홍의 도움을 받아 설원 위에서 작은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했다.
꾸욱-. 꾸욱-.
고사리처럼 작은 손으로 눈덩이를 굴렸다.
주먹처럼 작았던 눈덩이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더 크게!
더 높게!
눈덩이를 굴리면서 주변을 돌았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둘레를 돌 때마다 눈덩이가 빠르게 커졌다.
뭉치고 굴리기를 반복할수록 작은 눈덩이가 빠르게 덩치를 불려나갔다. 꾹꾹 뭉친 눈덩이가 어느덧 작은 도련님보다도 커지게 되었다.
“야, 석녀! 굴리던 눈덩이를 위에 올려!”
“흥…! 매번 나만 시키지.”
조홍과 조앙이 커다란 눈덩이를 완성했다.
그 위에 조인이 새로운 눈덩이를 올렸다.
“와아!!”
눈사람이 완성되었다.
조앙이 장갑을 낀 손으로 박수를 쳤다.
커다란 눈사람.
제법 웅장한 크기를 자랑했다.
뒤이어 자갈과 나뭇가지들을 이용하여 커다란 눈사람에게 이목구비를 붙여주었다. 마차를 끌던 말의 간식이었던 당근을 꺼내 눈사람의 코로 꽂았다.
“어마니하고 닮았어요!”
조앙이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툭툭.
두 손바닥으로 눈사람을 두드렸다.
커다란 눈사람의 모습이 늠름함을 자랑하는 어머니를 닮았다고 생각한 듯했다.
“아하핫! 언니를 닮은 눈사람이면 가슴을 절벽처럼 깎아내야겠네.”
조홍이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두 손을 뻗었다.
눈사람의 가슴 부근을 직각으로 깎아냈다.
풍족과 풍요가 말라버린 절벽가슴을 나타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아냐, 더 깎아야 돼.”
무덤덤한 표정을 일관하던 조인이 짓궂은 장난기를 보이던 조홍에게 가세했다.
더 깎아.
가슴 부근을 움푹 깎아냈다.
가히 절벽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뒤이어 눈썹 역할을 맡았던 나뭇가지를 대각선으로 옮겨서 화난 표정을 짓게 했다. 입술 역할을 맡은 자갈들도 고쳐서 꾹 다물고 있는 형상으로 바꾸었다.
“서방님한테 새 여자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극대노하는 언니 같지 않아?”
“흠, 양손에 칼만 들면 똑같겠어.”
조홍과 조인이 팔짱을 끼며 눈사람을 평가했다.
극대노하는 언니.
살벌한 모습이 과연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언니가 짝사랑하던 사내를 몰래 가로채는 불륜행각을 벌인 당사자들답게 비분강개하던 사촌언니의 모습을 매우 훌륭하게 재현해냈다.
“언니를 닮은 눈사람인데 너무 키가 크네.”
“깎아낸 가슴처럼 많이 줄여야겠지.”
조홍과 조인이 군략을 착안하듯 진지하게 눈사람에 전념하고 있었을 때,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조앙이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두 팔을 뻗었다.
“어마니!”
대체 언제부터 뒤에 있었던 걸까.
흑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있었다.
아마도 계속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던 듯했다.
* * *
업무를 속전속결로 끝내고 돌아온 조조는 사랑스러운 아들과 놀아주고자 현장에 도착했다.
함께 눈덩이를 굴렸다.
서로에게 눈덩이를 던지기도 했다.
보는 사람들에게 훈훈함을 선사할 정도로 다정다감한 모자(母子)의 모습이었다.
“앙아.”
“히히힛! 차갑슙니닷!”
자신을 형상화한 눈사람을 박살내버린 조조는 새롭게 두 개의 눈사람을 쌓았다.
뒤에서 대기하던 위병들에게 새로운 눈사람을 만들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을 기만했던 조홍과 조인을 꽁꽁 얼어붙은 눈사람에 처박아버렸다.
“어, 언니!”
“시… 실언을 했습니다!”
머리만 배꼼 내민 채 온몸이 눈사람에 파묻힌 사촌들이 허둥대며 자비를 구했다.
혼연일체.
사람과 눈사람이 하나가 된 모습이었다.
사촌들을 처박아버린 뒤에 찬물을 끼얹었기에 눈사람이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조홍과 조인은 감히 언니를 기만한 대가로 해가 저물 때까지 눈사람에 갇혀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