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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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의 패자였던 유표군을 분쇄하여 강동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한 손견군은 빠르게 팽창을 이어나갔다.
동쪽으로 오군(吳群). 서쪽으로 시상(柴桑).
남쪽으로 회계(會稽). 북쪽으로 역양(歷陽).
수많은 군현들에 군기를 꽂았다.
동오(東吳)의 정복자.
모든 이들이 강동의 호랑이를 두려워했다.
군사동맹을 맺는 조건으로 오후(吳侯)에 책봉된 손견은 제후의 권위로 양주의 지방관들을 복종시켰다.
“투, 투항하겠소.”
“어찌 제후에게 거역할 수 있겠소이까.”
오군의 변방에서 무리들을 규합하여 거병을 이끌었던 엄백호가 손견에게 투항했다.
회계군의 태수였던 왕랑은 강동의 제후에게 전권을 위임하고는 가솔들을 이끌고 허도로 떠나버렸다.
이미 대세는 정해졌다.
누가 날뛰는 호랑이를 막을 텐가.
엄백호와 왕랑의 세력까지 복속한 손견군은 여세를 몰아 단양태수 주흔을 공격했다.
“손견!”
“원술의 사냥개였던 놈이 감히!”
원술군에 대적하여 양주를 사수했던 주흔은 동생들과 결사항전을 벌였음에도 끝내 패하고 말았다.
주흔이 처형되었다.
동생인 주앙과 주우도 뒤를 따랐다.
원소의 명령으로 구강군의 원술을 견제하고자 양주로 파견되었던 주씨 형제들이 결국 처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주흔이 죽었다!”
“이제 양주는 오후 어르신의 땅이다!”
마침내 손견이 양주의 주인이 되었다.
주객전도(主客顚倒).
양주의 사대부와 호족들이 손견을 그리 평가했다.
군세들을 이끌고 난입했던 객장이 기존의 주인들을 몰아내고 양주를 점령했기 때문이었다.
“후우, 아버지의 숙원이 드디어 끝났네.”
백금발을 늘어뜨린 여성이 대검을 내려놓으면서 가쁜 한숨을 내쉬었다.
원소의 잔당들을 물리쳤다.
드디어 아버지께서 유일무이한 양주의 지배자가 되신 것이었다.
마침내 숙원이 이루어졌다.
손책은 아버지의 염원을 달성하였음에 뜨거운 고양감을 느꼈다.
주씨 삼형제가 마지막까지 항거했던 요새를 함락시킨 손책은 높은 성루에 군기를 꽂음으로서 양주 정벌의 완성을 장식했다.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백부.”
수려한 용모의 미공자가 다가왔다.
손책의 벗이었던 주유였다.
“재앙의 불씨들이 양주 전역에 산재되어 있다.”
점령과 지배를 반복하면서 양주의 군현들을 제패했기에 손견군은 지지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손견군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대부와 호족들이 많았다. 무뢰배처럼 힘과 위압을 동원하여 군현을 점령한 손견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제후의 권위로 짓밟으면 그만이잖아. 산불이 될지도 모르는 불씨들은 짓밟아서 꺼트려야 돼.”
“그렇게 속단할 문제가 아니다.”
강압은 반발을 일으킬 뿐이다.
원술의 전례를 보지 않았던가.
폭정으로 억압했던 수춘성의 폭군은 결국 인과응보처럼 거센 반발에 직면하여 멸망했다.
어르신을 제2의 원술로 만들 순 없다.
주유는 손견에게 사대부와 호족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유화책을 진언했다.
‘통치의 명분이 여전히 부족하다.’
양주 사대부와 호족들에게 있어 손견은 벼락출세한 졸부에 불과했다.
수춘성의 폭군을 따른 무뢰배.
미관말직을 배출한 부춘현(富春縣)의 한미한 가문.
대명문가와 개국공신 가문의 소생인 원소와 조조에 비하면 출신이 너무도 뒤떨어졌다.
오만불손한 자존심으로 유명한 양주의 사대부와 호족들은 그런 손견을 비천한 무골이라며 비웃었다.
‘조조…! 이제야 네년의 음흉한 속셈을 알겠군!’
반간계(反間計)다.
치밀하게 계산된 반간계가 분명했다.
미주(美酒)로 포장한 독주(毒酒).
제후 책봉이 도리어 화근이 되어 날아들었다.
한미한 가문의 장수가 양주의 제후로 책봉되었다는 사실은 사대부와 호족들에게 질투와 불만을 초래시켰다.
-네놈 따위가 제후라고?
-원술을 따랐던 주구 놈이…!
-작은 현에서 조세를 징수하던 미관말직 가문이 아니냐!
뒤늦게 알아차렸다.
조조는 교활한 여인이다.
군사동맹을 맺었다고 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쌓아올린 군벌에게 순수한 호의를 베풀 리 없었다.
강동에서 튼튼한 지지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손견군에게 있어 제후의 명성은 무거운 족쇄가 되었다.
“유화책을 중점으로 내정에 치중을 둘 때다.”
“우리 아버지를 깔보고 괄시하는 저깟 놈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빼앗은 것들을 어떻게든 지켜야 하니까.”
주인들을 내쫓고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아니,
스스로를 주인이라 주장하는 손님에 불과했다.
무력을 동원하여 군현들을 강제적으로 점령한 장수를 누가 주인이라 인정하겠는가.
그렇기에 손견군은 양주 전역을 전광석화로 석권하는 기염을 토해냈음에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네가 나서야 할 때다, 백부. 너는 흉포한 성정이지만 그래도 얼굴이 반반하니 간판으로 제격이지.”
주유가 재촉하며 말했다.
그에 손책은 ‘무슨 개소리야’ 라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 * *
삼보 지역의 백성들을 위무하던 이성휘를 불러들이고자 조조는 사마방을 경조윤(京兆尹)에 임명했다.
장안성을 재건하라.
황폐화된 삼보 지역을 부흥시켜야 한다.
한나라의 승상으로부터 억지에 가까운 요구들을 받게 되었음에도 사마방은 삼보의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망설임 없이 경조윤의 관직을 받아들였다.
…결코 조조군의 보복이 두려워서 관직을 사양하지 못했던 게 아니다.
“아버지! 귀엽고 똑똑한 딸아이를 보러 온 것임?!”
흑발을 늘어뜨린 소녀가 발랄한 목소리로 아버지와 해후의 기쁨을 나눴다.
수개월만의 재회였다.
훈훈한 미소를 지으면서 안부를 확인했다.
전선으로 떠난 딸아이를 얼마나 걱정했던가.
평소와 다름없이 개구쟁이처럼 씩씩한 딸의 모습에 사마방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귀엽고 똑똑한 아이는 숙달이 아니더냐.”
“흥! 본좌 삐졌음!”
여동생 사마부를 치켜세우는 아버지의 짓궂은 농담에 사마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반응에 사마방이 허허 웃었다.
“오셨습니까, 사마방 어르신.”
“대장군.”
사마씨 부녀가 정겨운 재회를 나누고 있었을 때,
이성휘가 다가왔다.
선생과 학부형의 만남이라고 할까.
이성휘와 사마방은 사마의를 사이에 두고서 담화를 나누게 되었다.
“제 불민한 여식이 혹여 대장군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기우이십니다. 중달은 아군이 수세에 몰렸을 때마다 현명한 계책으로 저를 보필해주었습니다.”
이성휘의 설명에 사마의가 어깨를 으쓱으쓱 흔들면서 “에헴!”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본좌가 최고임.
서량 정벌의 일등공신이 분명함.
온몸으로 기고만장한 자존심을 뽐냈다.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여 대장군 이성휘를 보필하는 딸아이의 모습에 사마방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승상께서 귀환을 서두르라 하셨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돌아오라.
어서 돌아오라.
앙이와 비가 아버지를 매일 찾는다.
조조는 장안성에 수차례 전령들을 파견하여 이성휘에게 귀환을 재촉했다.
아이들을 내세우면서 복귀를 독촉하는 사랑스런 아내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현모양처의 사랑스러운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기에 이성휘는 휘하 제장들에게 귀환을 명령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이성휘는 경조윤으로 부임한 사마방에게 곧바로 관중과 관서, 서량의 전권을 위임했다.
사마방은 덜떨어진 장녀를 슬하에 두었지만 어질고 현명한 성품으로 유명한 사대부였다. 그를 굳게 신뢰하였기에 백성들의 안위를 맡겼다.
“본좌가 안내해주겠음!”
사마의가 아버지의 옷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이성휘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사마방은 딸아이의 안내를 받으면서 관료들이 모인 장소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먼길을 오셨사옵니다.”
앞서 장안성에 파견되었던 허도의 관료들이 사마방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들었다.
사마방은 조정의 원로였다.
지방관으로 발탁된 관료들은 엄숙하게 예를 취하면서 맞이했다.
‘개국공신 가문의 원로….’
‘하남윤과 경조윤을 역임했던 거두가 아니신가.’
인자하면서도 근엄한 사마방의 풍채에 관료들은 깊은 동경을 보냈다.
가문의 어르신을 맞이하듯 공손한 모습으로 사마방과 악수를 나눴다. 손을 맞잡은 관료들은 황송하다는 듯이 어깨를 떨었다.
“좌풍익 제갈현이라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이윽고 제갈현이 사마방과 손을 맞잡았다.
바짝 긴장을 한 걸까.
경직된 표정으로 땀을 줄줄 흘렸다.
개국공신 가문의 고관대작을 마주했다. 사시나무처럼 떠는 것은 당연했다.
“제 조카딸이… 어르신의 여식과 함께 대장군을 보필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제갈현의 말에 사마방이 반색하며 되물었다.
호오….
크게 감탄하며 딸아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저씨가 제갈씨의 숙부님임?”
“그, 그렇습니다….”
비록 사마의는 조카딸과 비슷한 또래였지만 개국공신 가문의 여식이었기에 경어를 붙였다.
그에 사마방은 딸아이의 머리를 누르면서 제갈현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게 했다.
“경어를 붙일 필요는 없네. 부디 조카딸을 대할 때처럼 격식 없이 대해주게.”
천방지축인 딸아이를 엄격하게 대하는 사마방의 모습에 제갈현은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염치를 불문하고 조카딸의 지기를 편히 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기-?””
지기(知己).
즉,
친구라는 뜻이다.
지기라는 말에 사마씨 부녀가 격하게 반응했다.
제갈씨가 본좌의 지기라고?
여태껏 친구 하나 없던 딸에게 벗이 생겼다고?
사마방과 사마의의 맹렬한 시선이 제갈현에게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