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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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만날 수 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강렬한 고양감이 넘쳐흘렀다.
강인한 체력을 강요하는 고된 강행군이었음에도 작은 소녀는 꿋꿋하게 나아갔다.
‘대장군 이성휘…!’
주군에게 천하의 패권을 안겨주었던 역전의 효웅을 연접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였기에 제갈량은 고된 강행군을 견뎌야 하는 고난조차 참아내면서 장안성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 사람을 만나면 뭐라고 말하지? 당연히 예를 갖추면서 통성명을 해야겠지…. 나는 그저 시골 촌년으로만 보일 테니까. 아무리 장원으로 급제한 관료라도 천하제일검의 명성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잖아.’
거침없이 덜컹덜컹 흔들리는 수레에 앉은 제갈량은 고백을 앞둔 소녀처럼 전전긍긍하며 이성휘를 연접했을 때를 상상했다.
뭐라고 말할까.
일단 뭐라고 운을 떼지?
처음 있는 일이다.
면식도 없는 상대를 상상하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아직 미관말직에 불과한 내가 대장군과 단둘이 독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리 없잖아.’
중원의 효웅에게 고견을 진언하면서 우수한 내장관으로서의 자질을 선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한낱 미관말직이다.
한나라의 군부를 관장하는 대장군과 독대하는 광영을 누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방울꽃처럼 청아한 소녀는 동경하는 대상을 마음속으로 그리면서 기대감을 키워나갔다.
“먼 길을 오느라 수고 많았다.”
한 달하고도 보름.
허도를 출발했던 관료들이 마침내 도착했다.
강행군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이성휘는 직접 병력을 대동하고서 관료들을 맞아들였다.
“양주자사로 임명된 서막이라 합니다.”
상서령 순욱으로부터 추천을 받고 양주자사로 임명된 서막이 이성휘에게 예를 취했다.
“농서태수 곽현신입니다!”
“하, 한양군에 발령받은 문직이옵니다!”
뒤이어 함께 장안성에 도착한 관료들도 이성휘에게 예를 취하면서 통성명을 나눴다.
대장군이다.
천하제일검을 앞에 두고 있다….
척박한 변방에 파견되었음에도 관료들은 들뜬 환열에 물든 표정으로 이성휘에게 반가이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의 구휼미는 안 됩니다. 어서 병력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해산시켜주세요.”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을 때,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왔다.
모난 자갈 같은 말이었다.
대장군에게 통성명하던 관료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밝은 은발을 늘어뜨린 소녀를 응시했다.
이성휘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 여자애가 있지….
우락부락한 남성들 사이에서 홀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소녀의 모습에 발걸음을 세웠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새로 온 관료인가?”
이성휘가 물었다.
그에 제갈량이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제갈량. 상서대의 제갈량이라 합니다.”
“……!”
작은 소녀에게 이름을 듣게 된 이성휘의 얼굴에 당혹감에 차올랐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짐짓 망설이는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발걸음을 멈췄던 이성휘는 은발을 늘어뜨린 소녀의 용모를 찬찬히 바라보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무엇을 곰곰이 생각하는 걸까.
둘 사이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무슨 경거망동인가!”
불경스럽게 느껴지는 제갈량의 참언에 양주자사 서막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구휼을 끊으라니…!
그럼 백성들을 다 굶겨죽이라는 뜻인가.
어린 소녀의 허무맹랑한 장난으로 넘기기엔 너무도 불경스러웠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당황하던 관료들도 제갈량을 책망하는 눈길로 흘겨보았다.
“어디서 감히 망발을….”
“백성들에게 주는 쌀이 아깝단 말인가?”
“상서령 어르신께서 추천한 인재라더니… 오만불손하군.”
구휼을 중단하라.
백성들을 모두 해산시켜라.
오해성이 다분한 발언이다.
관료들이 노기를 띠는 것은 당연했다.
기고만장한 자존심을 자랑하는 상서대의 와룡은 독불장군처럼 보일 정도로 직설적인 화법을 펼쳤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성휘가 물었다.
불쾌감을 품기보다는 진의를 파악하려 했다.
깊은 저의가 있을 터.
구휼을 중단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한손을 뻗으면서 서막과 관료들을 제지한 이성휘는 작은 소녀가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구휼미를 충당하고 있지만, 결국 바닥이 보일 테니까요.”
삼보 지역에서 구름처럼 몰려든 민중들을 한꺼번에 모두 먹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월동은 결코 불가능하다.
아니,
겨울까지 버틸 수도 없을 것이다.
이윽고 구휼미가 바닥을 드러낸다면 민중들은 무능한 황실과 조정을 규탄하면서 폭거를 일으키리라.
무계획적인 구휼은 도리어 백성들을 게으르고 이기적이게 만들 뿐이라며 호소하듯 말했다.
“일리가 있군.”
제갈량의 참언에 이성휘는 심사숙고를 하듯 무거운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생각해둔 방안이 있나?”
높은 지위에 오르면 아랫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는 거만한 성정이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성휘는 탁월한 고견이라 판단되면 미관말직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파격적인 성품의 위인이었다.
당당하게 나선 소녀에게 방안을 물었다.
그에 소녀는 당찬 표정을 지었다.
“네, 물론입니다!”
* * *
우선 제갈량은 인산인해를 이루는 백성들을 사예주 곳곳에 분산시키는 방안을 내놓았다.
인파가 너무 과열되었다.
병력을 동원하여 피난민들을 장안성과 가까운 군현으로 보냈다.
하동군(河東郡), 홍농군(洪農郡).
수많은 백성들이 동쪽으로 이주했다.
장안성에 몰려든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소란이 뒤따랐다.
하지만 민란으로 확대되는 일은 없었다.
황폐화된 폐허에 남겨졌던 백성들은 내심 풍족하고 기름진 군현으로 거취를 옮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는 민둔을 할 셈인가?”
“네. 구휼미는 결코 공짜가 아니니까요.”
이성휘의 물음에 제갈량이 옅은 눈웃음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민둔(民屯).
백성들을 동원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짓는 토지제도를 말했다.
-소비를 생산으로 바꿔야 한다.
어떻게든 자급자족이 가능하도록 기반과 밑천을 마련하는 쪽으로 구휼을 진행해야 했다.
그것을 이성휘에게 알리고자 제갈량은 직접 허도에서 장안성으로 온 것이었다.
“사람의 성정은 태생적으로 이기적입니다. 계속 호의를 던져주면 당연하다고 여기죠. 그래서 구휼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방울꽃처럼 아름다운 은발을 늘어뜨린 소녀는 노련한 면모를 보이면서 구휼의 문제와 한계를 설명했다.
구휼미는 미봉책일 뿐이다.
결코 문제해결을 위한 방안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백성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강제이주와 민둔을 실시하려는 이유였다.
“하지만 문제점이 존재할 텐데요? 장안성의 백성들을 강제적으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나올 거예요. 결국 민심의 악화로 이어지겠죠.”
강제적인 방법으로 삼보 지역의 백성들을 통제하려는 제갈량의 방책에 종사중랑(從事中郞) 양수가 인상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반발이 클 수밖에 없다.
강제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생이별을 겪는 가족들이 생겨날 테니까.
민심의 악화로 이어질 위험성이 높다.
양수는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불만과 반발이 이어질까 매번 걱정하면 어떻게 정책을 펼칠 수 있겠어요, 어수룩한 젖탱아.”
“저, 젖탱…?!”
시시껄렁한 잡배에게 어울리는 상스러운 욕설에 양수가 가녀린 어깨를 움찔 떨면서 뒷걸음질 쳤다.
어수룩한 젖탱이.
그것을 증명하듯이 풍만한 가슴이 위아래로 출렁였다.
“푸하하! 가슴 괴물, 얼레리꼴레리임.”
옆에서 지켜보던 사마의가 짓궂은 웃음을 터트리면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있던 양수를 놀려댔다.
쿡쿡.
쿡쿡-.
손가락으로 가슴을 찔렀다.
그러자 양수가 학을 떼는 반응을 보였다.
“매일 밤마다 경전을 읊으면서 공부하잖음. 얼마나 더 학식주머니가 커지려고 하는 거임?”
“마, 만지지 마요!”
사마의가 양수가 티격태격하며 말싸움을 했다.
그에 제갈량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저 어수룩한 젖탱이보다 악질인데요? 보아하니 친구 한 명 없게 생겼는데.”
“마, 많음…! 본좌를 음해하지 마삼!”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촌철살인에 사마의는 아연실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흔들리는 시선.
경련하듯 바르르 떨리는 뺨.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까지.
정곡이 찔렸을 때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이다.
멍청함이 돋보이는 말투를 쓰는 사마의에게 일침을 가한 제갈량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친구 많음! 다들 허도에 있음!”
“허도가 아니라 하늘나라겠죠. 아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늘나라도 아니네. 그럼 땅속인가?”
“히이이익!!”
약점을 붙잡고서 비웃음을 히죽이는 제갈량의 안하무인 같은 모습에 사마의는 분노를 떨어야 했다.
“무주공산의 황무지와 둔전을 개간할 노동력. 모두 갖추고 있으니 분명 민둔이 가능하겠지. 민둔에서 성과를 거둘 때까지 물자를 지원해주면 되는 건가?”
“네!”
고참들을 악랄하게 대하던 제갈량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성휘에게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답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성휘에게 다가온 제갈량은 과거에 여러 나라에서 시행되었던 토지제도들을 열거하면서 민둔의 필요성을 알렸다.
“훌륭하다. 과연 상서령이 추천한 인재답군.”
“아니에요….”
이성휘의 칭찬에 얼굴이 붉어지는 제갈량의 변화를 지켜보던 양수와 사마의는 입을 쩍 벌려야 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나운 하악질을 하지만 주인에게만큼은 한없이 순종적인 고양이.
그것이 바로 제갈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