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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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량을 호령했던 마등과 한수가 무너지면서 유언군은 조조군과 경계를 접하게 되었다.
익주(益州)에 전운이 흘렀다.
유언군은 내부의 혼란과 조조군의 침공을 경계해야 하는 내우외환의 상황에 직면했다.
이를 어찌 타파해야 한단 말인가.
대장군 이성휘의 완승은 수많은 군벌들을 쓰러트리고 익주를 제패한 파촉(巴蜀)의 지배자를 대경실색하게 만들었다.
“결국 환관 년의 손아귀에 넘어갔단 말이냐…!”
쿠웅-.
수염을 늘어뜨린 노년의 사내가 걸상을 내리쳤다.
중원을 제패한 조조군과의 완충지역으로 삼으려 했던 양주와 옹주가 모두 넘어갔다.
내 실책이다.
장남의 죽음에 분개하여 서량의 마적들을 공격했던 정벌이 도리어 조조군을 도와준 격이 되고 말았다.
강세를 떨쳤던 원소군마저 완파한 조조군과 경계를 마주하게 되었음에 유언의 시름이 더욱 깊어졌다.
“탄아, 네가 목문도(木門道)의 수비를 맡아라.”
“제가 말입니까?!”
전장으로 나섰던 형님께서 눈 먼 화살을 맞고 절명하지 않았던가.
무섭다.
본인도 화살을 맞고 죽을 것 같았다.
유탄은 온실에서 키워진 화초처럼 아버지의 후광으로 순탄하게 낙양에서 관료 생활을 했기에 담력이 매우 부족했다.
군세들을 직접 이끌고 출정하라는 아버지의 엄명에 벌벌 떠는 것은 당연했다.
“목문도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거점이다! 양주에서 우리 익주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임을 모르느냐!”
휘하 제장들이 보는 앞에서 겁에 질린 모습을 보이는 아들의 추태에 유언이 날카롭게 일갈했다.
“용맹한 장수와 병사들을 붙여주마. 적들에게 맞서 목문도를 어떻게든 지켜내라.”
“아, 알겠습니다….”
꺼려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로 한심스럽다.
어찌 자식들이 모두 용렬하단 말인가.
졸장부처럼 유약한 아들의 모습에 유언은 애석함에 젖은 한숨을 흘렸다.
“주군, 어찌하여 공자를 보내십니까. 소장들이 대신하여 출정하겠나이다.”
유탄이 전각에서 물러나자 냉포가 유언에게 다가서면서 말했다.
그에 유언이 고개를 내저었다.
“익주의 후계를 강하게 키우기 위함일세.”
“…….”
“내가 살아봤자 얼마나 더 살겠나. 내 아들에게 익주를 물려줘야 할 터인데…. 저리 유약해서야.”
“주, 주군!”
이미 유언은 초로(初老)에 접어든 노령이었다.
혈기가 말라버렸다.
우후죽순처럼 거병했던 익주의 반란들을 모두 진압하느라 힘을 소진하고 말았다.
천하를 거머쥐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그때의 젊은 효웅은 어디로 가버리고 노쇠한 늙은이만 있을 뿐이다.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유언은 장남을 대신하여 차남에게 후계를 물려주고자 결심했다.
유탄에게 목문도의 사수를 명령했던 것은 제장들에게 익주의 희망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어떻게든 환관 년을 막아내야 할 터인데.”
과연 버틸 수 있을까.
환관 년의 기세가 날카로웠다.
당장이라도 험준한 산맥들을 넘어 익주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유표가 그러했듯이 유언 또한 조조군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소장들이 공자를 지키겠습니다!”
냉포가 우렁찬 어조로 호언했다.
뒤이어 다른 장수들도 그에 동조하며 나섰다.
결코 익주는 뚫리지 않는다.
외세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험준한 산맥들로 둘러싸인 익주는 천혜의 요새였기에 다른 지역들과는 달랐다.
중원의 환관 년이 백만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오더라도 거뜬히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헌데 독의사마는 왜 아직도 연락이 없는가.”
군세들을 이끌고 관문을 넘어섰던 독의사마(督義司馬) 장로가 계속 연락이 없었다.
무슨 변고라도 발생한 것일까.
한중군(漢中郡)의 소식이 완전히 끊어졌다.
위풍당당하게 한중을 정벌하고자 떠났던 장로는 조조군이 서량을 정벌했던 이후부터 의도적으로 왕래를 중단해버렸다.
“설마 이놈이….”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다시 전령을 보내보시죠.”
불안감을 토로하는 주군의 모습에 냉포는 한중군으로 재차 전령을 보낼 것을 간언했다.
독의사마 장로는 유언이 총애했던 심복이었기에 결코 역심을 품을 리 없다고 여겼다.
제 어머니와 가족들이 성도에 있다.
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반역을 꾀하겠는가.
“주군!”
전령들과 함께 한중군으로 향했던 부금이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다가왔다.
“독의사마 장로가 배신했습니다! 함께 출정했던 장수들을 모두 살해하고 한중을 거머쥐었습니다!”
“자, 장로… 네 이놈!!”
부금의 급보에 유언이 노발대발하며 울화통에 물든 역정을 내질렀다.
독의사마 장로.
놈은 예상을 뛰어넘어선 독종이었다.
제 모친과 가족들이 모두 성도에 인질로 붙잡힌 상태였음에도 거병을 선언했다. 조부 장릉이 창시한 오두미교(五斗米道)를 부흥을 위해서였다.
“장로의 식솔들을 모두 끌고 나가서 참수하라!”
총애했던 심복이 배신했다는 소식에 유언은 방희를 불러 명령했다.
감히 나를 배신하다니…!
지금 당장 피눈물을 쏟게 해주겠다.
장로의 모친이었던 노씨와 종친들을 모두 저잣거리로 끌고 나가 거열형에 처하도록 했다.
* * *
뇌쇄적인 무희 복장으로 이성휘를 보필하던 마초는 여포와 장료로부터 집요한 종용을 받게 되었다.
시녀가 될 생각 없냐.
두둑한 급여와 안락한 편의를 제공해줄게요.
부담을 느낄 정도로 강렬한 집착이었다.
원수를 갚도록 도와주고 부하들의 안위까지 보살펴준 이성휘를 따르기로 결심한 마초는 두 시녀들의 앙큼한 제안에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흥, 시녀는 무슨…. 자존심이라는 게 있지.”
회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냉소적인 웃음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어떻게 사내에게 간드러지는 아양이나 떠는 시녀가 될 수 있겠는가.
무장으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다.
“근데 왜 시녀복을 입고 있는데?”
“큭! 저 여자들이 시켰다고!”
호기롭게 큰소리를 친 조운이었지만 그녀도 여포와 장료처럼 음란한 시녀복을 입고 있었다.
새하얀 어깨와 풍만한 가슴이 훤히 드러난 상의.
허벅지를 그대로 노출한 짧은 치마.
예쁜 머리장식.
양손으로 쥐고 있는 빗자루.
영락없는 시녀의 모습이었다.
포로로 붙잡혔던 이후부터 반강제적으로 시녀로 전직한 조운은 불평을 해대면서도 가사를 돕고 있었다.
“주인니임.”
“어서 저희들을 귀여워해주세요.”
병주군을 이끄는 용맹한 여걸들이 요염한 목소리로 주인에게 아양을 떨어댔다.
어깨를 주물렀다.
업무를 도와주면서 팔에 매달렸다.
지금까지 누적된 피로들을 씻어내려는 것처럼 욕구불만의 시녀들은 농밀한 애정행각을 벌였다.
쪼옥-.
금발을 늘어뜨린 아름다운 시녀가 수줍음을 무릅쓰고서 뺨에 입맞춤을 했다.
뒤이어 흑발을 늘어뜨린 고혹적인 시녀도 웃으면서 맞은편 뺨에 입맞춤을 해주었다.
“파, 파렴치하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음란한 광경에 조운은 홍당무처럼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여포와 장료에게서 흘러나오는 요염한 체취 때문일까.
고양이처럼 전각에 몰래 숨어들었다가 우연찮게 듣게 되었던 시녀들의 신음소리가 떠올랐다.
육욕에 빠져 신음소리를 허덕였던 시녀들의 모습을 상상한 조운은 얼굴에 피가 쏠리는 것을 느꼈다.
‘서, 설마 시녀가 되면…! 나도 저렇게 음란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거야?’
예정된 후배에게 현장을 보여주는 것처럼 대담하게 행동하는 선배들의 모습에 마초가 마른침을 삼켰다.
어떻게 저럴 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지켜보았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여포와 장료의 얼굴은 같은 여성이 보기에도 색기를 느낄 정도로 요염했다.
사내를 기쁘게 하는 가슴.
사내를 만족시켜주는 엉덩이.
무엇 하나 야릇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음란한 복장으로 사내를 유혹하는 시녀들의 모습에 가슴이 쿵쾅쿵쾅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흐응….”
안타까움에 젖은 비음을 흘렸다.
자극이 흘러나왔다.
하복부에서 시작된 짜릿한 감각이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쾌락의 감각에 마초는 크게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주륵-.
허벅지를 타고 맑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동경하는 대상에게 품은 애절한 감정에서 흘러나온 한 줄기의 응어리였다.
“누가 볼까 무섭다. 다시 환복해!”
이성휘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피이-.
주인님의 명령에 시녀들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조금만 더 살갗을 맞대고 싶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엄중한 태세를 유지하는 상황이었기에 군막 안에서 음란한 접대로 주인님을 즐겁게 해주었던 여포와 장료는 다시 갑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오늘 밤에 찾아갈게요.”
장료가 배시시 웃으면서 속삭였다.
음욕을 자극하는 달콤한 속삭임.
사내의 마음을 뒤흔드는 음마(淫魔)처럼 야릇한 매력이 흘러넘쳤다.
과연 대장군이 가장 총애하는 애첩다웠다.
* * *
장안성에 군량이 도착했다.
홍농군과 하동군에 계속 비축해둔 물자였다.
급히 시일을 서둘러야 한다.
이성휘의 요청에 조조는 사예주의 물자를 조달하여 장안성을 지원했다.
“더 이상의 구휼미는 안 됩니다. 어서 병력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해산시켜주세요.”
뒤이어 한 달이 흘렀다.
허도에서 파견된 관료들이 장안성에 도착했다.
백발을 늘어뜨린 소녀가 대범한 목소리로 이성휘에게 구휼미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동경하던 대상을 처음으로 마주한 소녀는 숫처녀처럼 수줍어하는 모습 대신에 냉철한 참모의 면모를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새로 온 관료인가?”
실로 당돌한 참언이다.
처음 보는 소녀에게 관심이 생긴 이성휘가 물었다.
그 물음에 방울꽃처럼 청아한 소녀가 대답했다.
“제갈량…. 상서대의 제갈량이라고 합니다.”
와룡(臥龍).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주인공.
훗날 위국충절의 화신으로 기록될 명재상.
패국조씨 가문의 위나라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촉나라의 지주.
소녀의 통성명에 이성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