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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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규환의 참사가 벌어졌던 장안성은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다 무너진 성벽.
검게 그을린 시가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가옥들.
참혹하게 붕괴된 잔해들을 모두 걷어내고 다시 기둥을 세워야 할 정도였다. 중원의 오랜 수도였던 장안성의 영화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비축한 군량들을 구휼미로 베풀어라.”
“예, 대장군.”
장안성에 당도한 이성휘는 잠시 행군을 멈추고서 삼보 지역의 백성들에게 구휼을 베풀었다.
이대로 기아와 궁핍을 방치한다면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은 겨울을 넘기기 어려울 터. 그래서 이성휘는 장졸들을 동원하여 미봉책으로나마 장안성을 보수했다.
“행군은 어떻게 할까요?”
“잠시 장안성에 머문다.”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의 물음에 잠시 한숨을 푹 내쉬면서 대답했다.
귀환을 잠시 멈춘다.
휘하 제장들에게 강행군의 중지를 알렸다.
궁핍한 처지에 놓인 장안성 백성들의 모습을 방관할 순 없다. 이성휘는 허도에 전령을 보내어 장안성에 구휼미를 더 보내도록 요청했다.
“승상께서 대장군이 귀환하기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릴 텐데요.”
“시일이 늦을 것 같다고 전령은 보냈다.”
순유의 물음을 단번에 일축한 이성휘는 김이 모락모락 흘러나오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승상과 아이들이 많이 보고 싶으실 텐데….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선정을 베푸시다니.’
순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성휘를 바라보았다.
천하제일검의 무명을 떨친 대장군.
그는 도덕성을 바탕으로 한 인품 또한 뛰어났다.
난세를 주도했던 역적들을 모두 참살하여 수많은 민중을 도탄에서 구해낸 한나라의 대장군은 분명 찬사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좋아한단 말이야. 대체 얼마나 더 여자 마음을 흔드시려는 건지…. 정말 야속한 사람.’
봄바람처럼 마음이 흔들렸다.
모두 이 남자 때문이다.
너무도 완벽한 사내이기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순유는 히죽히죽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몹시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성휘를 향해 순유는 고양이처럼 갸름한 미소를 터트렸다.
귀여운 사람,
자꾸 놀려주고 싶게 만들기는.
순유는 이성휘를 매번 짓궂은 장난으로 놀리면서 풋풋한 애정을 표현했다. 이성휘가 곤혹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일 때마다 뿌듯한 행복감을 느꼈다.
“제장들에게 명령을 전달할게요.”
“그래.”
순유가 빙그레 웃으면서 군막을 나섰다.
그 이후,
바깥에서 기다리던 여인이 들어왔다.
“…대장군.”
사막도시의 무희처럼 두터운 망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이성휘에게 다가왔다.
“신변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라. 네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예, 명심하고 있습니다.”
“장안성에 들어오지 않는 편이 나았을 텐데.”
“…….”
이성휘의 무거운 발언에 입을 꾹 다물었다.
맞는 말이다.
장안성에 들어서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불의를 외면했던 태만과 방관으로 인해 벌어진 참사의 흔적들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간곡하게 부탁하여 대장군의 허락을 결국 받아낸 여인은 도탄에 빠진 장안성 백성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무거운 죄악감을 느꼈다.
“…그래도 보고 싶었습니다. 야욕에 눈이 멀어 백성들을 유린했던 흔적들을 말입니다.”
“그런가.”
여러 환난들을 맞이했던 장안성은 잔풀만이 무성한 폐허가 되고 말았다.
동탁.
이각과 곽사.
마등과 한수. 관중제장.
매번 늑대와 이리들에게 침탈을 당해야만 했다.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생업을 위한 지지기반 또한 잿더미가 되었다.
낙양과 장안성의 몰락으로 한나라의 찬란했던 역사는 난세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권력을 차지하려는 군벌들이 일으킨 야욕의 말로였다.
“한 달 정도 장안성에 주둔하면서 백성들에게 구휼을 베풀 계획이다. 겨울까지 머지않았다. 최소한의 월동준비라도 해둬야지.”
궁핍한 장안성 백성들이 한파가 몰아치는 엄동설한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어렵다.
분명 모두 얼어죽을 게 틀림없다.
그것을 예견한 이성휘는 가족들과 재회하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면서 발걸음을 멈췄다.
“감사… 합니다.”
원흉인 내가 감히 ‘감사’를 지껄여도 되는 걸까.
나는 천하의 공적이다.
정체가 발각된다면 만천하가 나서서 규탄할 터.
서량의 군벌들을 이끌고 장안성을 침략했던 원흉이었기에 당연했다. 소중한 가족과 친지들을 잃은 백성들 중에 원망하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정체가 발각될지도 모른다. 일단은 내가 기거하는 군막에 머물러라.”
“예….”
함께 군막에 머물 것을 제안한 이성휘의 말에 마초는 긴장된 반응을 보였다.
정체를 은닉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숫처녀가 사내와 같은 공간에 계속 머물다니.
어깨를 움츠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설마 이대로 밤시중을 들라는 말씀이신가? 하지만 나는 대역을 범한 죄인인데…. 그래, 대장군께서 그러실 리가 없지. 정체를 숨기기 위한 고육책일 거야.’
후우.
깊은 호흡을 내쉬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럴 리가 없다.
눈앞의 사내가 수많은 처첩들을 들인 호색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부정했다.
도탄과 곤궁에 허덕이는 장안성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 정도로 도덕적인 위인이 아닌가. 마초는 이성휘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기에 의심을 거뒀다.
“대장군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마초는 정체를 숨기고자 현란하고 음란한 춤사위로 사내들을 즐겁게 하는 무희로 변장한 채였다.
얼굴을 반쯤 가린 망사.
시선을 현혹시키는 화려한 장신구들.
최대한 옷감을 절약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무희 복장을 걸친 마초는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서량의 금마초가 살아있음을 모르는 일반 병사들은 음란한 복장을 걸친 마초를 보며 ‘이번에도 대장군께서 새 여자를 들이셨다.’라며 수군댔다.
매번 있었던 일이다.
병사들은 정체불명의 여인이 생겼음에도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럼 차를 내오겠습니다!”
이성휘를 마주하는 것이 부끄러웠던 마초는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면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 * *
위병들을 죽이고 달아났던 허유가 조조군에 귀순하여 상서낭중에 임명되었다는 첩보에 원소는 참모들이 소집된 자리에서 분통을 터트렸다.
허유가 살아있다.
더러운 역신이 기어코 숙적에게 들러붙었다.
분명 지금쯤 조조의 환심을 사고자 온갖 아첨과 간살을 떠들어대고 있으리라.
“결국 맹덕에게 붙었군요…!”
간교한 방법들로 가렴주구를 저질렀던 것으로 모자라 위병들을 살해하고 업성에서 달아났다.
심지어 허유는 숙적인 조조군에 투항하는 배은망덕한 불충마저 범했다.
불의(不義). 불충(不忠).
과연 더러운 협잡꾼다운 행동이다.
원소는 미리 더러운 협잡꾼을 죽이지 않은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거열형을 내려 팔다리를 모두 찢어발겼어야 했는데 말이다.
“허유, 이 더러운 놈!”
“석 달 동안 척후들을 동원하여 수색했는데… 어찌 놈이 허도까지 달아났단 말입니까!”
원소군의 참모들이 이를 빠득 갈면서 말했다.
충절을 배신하고 달아난 허유의 존재는 주군의 위엄과 명성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약점과도 같았다. 분명 조조군은 그것을 이용해먹을 게 틀림없었다.
“주군!”
원소와 참모들이 허유의 소식에 비분강개를 내비치고 있었을 때,
안량이 다급한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다가왔다.
“조조군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북을 도모하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연이어 완승을 거두면서 승승장구하는 조조군이 결국 하북을 향해 화살을 겨누기 시작했다.
전면전이 틀림없다.
정벌을 위한 대군을 준비하고 있으리라.
금발을 늘어뜨린 여인은 입술을 깨물면서 손아귀를 꾹 움켜쥐었다.
‘맹덕…! 허유를 앞세워 하북을 침략할 셈인가요.’
모든 수단들을 총동원하여 목적을 반드시 완수하는 벗에게 어울리는 결정이었다.
서량 세력을 멸망시키면서 삼면전쟁의 위협을 말소한 조조군은 황하 전선에 총력을 집중했다.
유표군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지레짐작으로 남양군을 버리고 장강 이남으로 철수하지 않았는가.
뒤이어 양면전쟁의 위협마저 사라진 조조군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들을 하북 정벌에 투입시켰다.
“중원 4개 주의 병력들이 모두 집결할 겁니다!”
“서량 정벌에 나섰던 이성휘의 정벌군까지 모두 투입된다면 대체 어느 정도일지…!”
사태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마등과 한수가 멸망했다.
조조군의 배후를 위협해야 하는 유표군은 꼴사납게 남양군을 버리고 도망쳤다.
형양에서 벌어진 완패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당장 제장들을 모두 소집하세요!”
“예, 주군!”
원소의 엄명에 안량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조조군이 총력을 동원할 것이다.
족히 10만이 넘는 병력들이 황하를 넘으리라.
폐부를 관통하는 위기감을 직감한 원소는 제장들을 동원하여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난공불락의 방어선을 펼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