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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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 의심치 않았던 오랜 벗에게 온갖 모욕적인 면박을 당하고 돌아온 허유는 모멸감에 휩싸였다.
허유는 욕심이 득실대고 탐욕스러우면서 아집이 강한 성정이었기에 특히 표독하게 반응했다.
“화, 환관 년 주제에 감히! 손아귀에 권력을 거머쥐었다고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군! 환관 집안의 화냥년 주제에!”
가택으로 돌아온 허유는 입에 참지 못할 욕설을 지껄여대면서 분통을 터트렸다.
빠득-!
이를 세차게 갈았다.
기고만장하던 자존심에 큰 상처가 생겼다.
관료 시절부터 수많은 명사들로부터 악평을 받아왔기에 특히 자존심이 민감했다. 여남원씨 가문의 적손인 원술에게도 악평을 들어야 했던 허유는 더욱 아집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장막은 계속 싸고돌았으면서 어찌 나한테는 이리도 푸대접이란 말인가! 내가 장막, 그놈보다 못한 게 뭐라고…!’
허유는 오만하게도 자신을 조조의 또 다른 죽마고우였던 장막과 대등한 반열이라고 여겼다.
조조가 연주를 중심으로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장막과 자신을 동등한 위치로 여기다니 말이다.
심각한 착각이 아닐 수 없었다.
오만한 성정은 매번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만들었다.
“설마 나를 본초가 보낸 첩자로 여기는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자신을 노려보던 조조의 눈빛은 싸늘하게 살의를 보내던 원소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원소에게 내쳐졌을 때를 떠올린 허유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어야 했다.
결국 아만에게 주살될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 허유는 조조군을 배신하고 다른 세력에 귀순하는 것을 고려했다.
“아니,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머지않아 천하는 아만의 수중에 떨어질 텐데. 오히려 명줄만 재촉하는 꼴이 되겠지.”
침음을 삼키면서 머리를 굴린 허유는 계속 조조군을 신종하는 것을 선택했다.
아직 기회는 있다.
그래도 나는 오랜 벗이 아닌가.
전공을 세운다면 금세 총애를 거머쥘 수 있을 터.
권력을 향한 야심이 대단했던 허유는 조조에게 면박을 당했음에도 결코 욕망을 굽히지 않았다. 언젠가 패국조씨 가문을 등에 업고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겠다는 다짐을 새겼다.
“부르셨습니까, 어르신.”
허유는 곧장 한순을 불렀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한순과 부하들에게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어서 사대부와 호족들을 모아주게!”
무엇보다 인맥을 중시하는 허유는 수단과 방법을 모두 총동원하여 허도의 사대부와 호족들을 끌어들였다.
조조와의 친분을 이용했다.
거둬들인 재물을 뇌물로 사용하여 환심을 샀다.
간교한 협잡에 수많은 사대부와 호족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모여들었다. 모두 허유처럼 허영심으로 가득한 작자들이었다.
“원소는 무리들을 규합하여 황실과 조정을 반역하는 극악무도한 대죄를 범했소! 무법으로 군현들을 점거하고 나라에 보내던 조세를 끊었으니, 응당 죄가 무겁다고 할 수 있을 것이오!”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뒤집듯이 주군을 갈아치운 허유는 원소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반원(反袁)을 부르짖었다.
원소는 역적이다.
응당 대역죄를 물어 마땅하다.
지금 당장 대역무도한 원소군을 쳐야 한다.
허유는 교묘한 언변을 동원하여 허도의 사대부와 호족들을 현혹시켰다. 오랫동안 원소를 보필해온 세객답게 군중들을 선동하는 말재주가 매우 뛰어났다.
“그, 그렇소!”
“역적 원소를 규탄하는 상소문을 올립시다!”
한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패국조씨 가문은 출세가도의 지름길과 같았다.
어떻게든 패국조씨 가문의 총애를 받고 싶었던 사대부와 호족들은 허유의 주장에 곧바로 찬동했다.
‘승상 어르신의 오랜 벗이니 믿을 수 있겠지.’
‘분명 승상께서는 사예주를 침략한 원소를 철천지원수로 여기고 계실 터. 주장에 힘을 보탤 때다!’
원소의 심복이었던 허유는 당연히 북방의 효웅이 하북에서 이룩했던 업적들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것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주군이 이룬 업적들을 더러운 죄상으로 교묘하게 포장하여 주전(主戰)의 근거로 삼았다.
과연 비열한 모사꾼다웠다.
부귀영화를 거머쥐겠다는 야욕으로 가득한 모사꾼은 철저히 자신의 옛 친구이자 주군을 배신했다. 오직 출세만을 위한 배덕적인 결정이었다.
“노비의 소생인 여남원씨 가문의 얼녀가 대역무도한 역심을 휘둘렀소! 표리부동한 협행과 위선으로 백성들을 선동한 원본초는 왕망과 동탁보다 더한 역적이오!”
원소에게 가문과 식솔들을 모두 잃은 허유는 표독스럽게 주장을 밀어붙였다.
기필코 한을 갚겠다.
네년이 아끼는 업성을 송두리 째로 불태워주마.
서량 세력을 멸망시킨 조조군이 여세를 몰아 북상을 개시한다면 원소군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하리라.
그것이 바로 허유가 노리는 바였다.
안하무인처럼 행동하면서 비열한 가렴주구를 범했던 것에 대한 인과응보였음에도 허유는 모든 잘못을 원소에게 덮어씌우면서 복수심을 불태웠다.
* * *
허도 전역을 면밀하게 감시하는 패국조씨 가문의 세작들은 허유의 독단적인 행동을 단번에 포착했다.
주전을 부추기고 있다.
사대부와 호족들을 선동하여 여론을 들쑤시고 있다.
군사좨주(軍師祭酒) 곽가는 세작들이 보낸 정보를 추려내어 승상부에 즉시 보고했다.
“과연 주군의 예상대로 신의와 충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사였습니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과연 허유에게 잘 어울리는 속어였다.
오랫동안 보필했던 주군을 망설임 없이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는 참모는 허유뿐일 것이다.
주황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은 슬쩍 눈치를 살피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본인에게 유리하도록 여론을 뒤흔든 허유에게 제재가 가해지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흥,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더니.”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조조는 주전론을 부추긴 허유의 행동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였다.
“예? 설마 주군께선….”
“이제 본초를 칠 생각이다.”
곽가의 물음에 조조가 후후 웃음을 흘렸다.
예상대로였다.
과연 허유는 훌륭한 간신이었다.
하북 정벌에 필요한 명분이 필요했던 조조는 의도적으로 허유를 자극하여 독단행동을 부추겼다.
“과연 주군이십니다.”
주전의 불씨를 만들었다.
곧 흩뿌려진 불씨는 들불이 되어 솟구칠 터.
하북 정벌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가도에 오르려는 허유의 더러운 발버둥은 이미 예상했던 대로였다.
“일부러 상서낭중에게 진노하신 겁니까?”
“그건 아니다.”
깍지를 낀 조조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감히 무능한 간신 주제에 우리 앙이와 비에게 숙부 노릇을 하려고 하다니. 혓바닥과 뽑아도 부족하지.”
“…….”
진심으로 분노한 것은 맞는 듯했다.
그것도 매우.
만약 허유에게 최소한의 쓸모도 없었다면 진작에 요사스러운 혓바닥을 뽑았으리라.
“동문수학을 했다고 다 벗이라던가.”
“물론 아닙니다.”
“맹탁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벗을 위해 충절을 다했다. 그런데 놈은 대체 뭘 했나? 벗의 명성을 악용하며 제 잇속만 채우지 않았는가. 쓰레기 같은 놈 같으니.”
“…예, 그렇습니다.”
충절과 우의를 위해 스스로 희생을 선택했던 막역지우를 떠올리면서 쓴웃음을 흘렸다.
“제장들을 소집해라. 하북 정벌을 논의할 것이다.”
“예.”
천하의 수많은 명사와 호사가들은 조조군의 다음 방침에 대해 첨예하게 논박했다.
남쪽의 형주냐.
아니면 북쪽의 하북이냐.
남양군에서 사투를 벌였던 유표군.
형양에서 건곤일척의 결전을 치른 원소군.
두 세력들 중 어느 곳을 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형주의 늙은이보다 본초를 먼저 꺾어야겠다.”
남양군에서 스스로 철군한 유표군의 행동을 통해 조조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유표,
이 늙은이가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
하북 정벌을 일으키더라도 결코 유표군은 후방을 노리지 않을 것이다. 분명 정벌이 끝날 때까지 우유부단한 추태들만 보이리라.
“확실히 성가신 숙적은 본초다. 단번에 하북을 정벌하여 북방을 장악하겠다.”
“명안이십니다.”
전력의 격차는 7대 3.
형양 공방전의 완승으로 대세를 거머쥔 조조군은 원소군의 전력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서량을 멸망시켰다.
기세를 몰아 하북의 원소군을 도모하고자 했다.
* * *
서량 세력을 멸망시킨 정벌군이 이윽고 장안성에 도달했다.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뜨거운 함성소리가 황량한 장안성에 울려퍼졌다.
역전의 용사들이 마침내 뜨거운 열풍을 뚫고 장안성에 모습을 드러냈다. 질서정연하게 들어서는 조조군의 위용은 삼보 지역의 백성들에게 희망과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대장군 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장안성을 침략했던 반란의 수괴들이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오열을 쏟아지면서 조조군에게 갈채를 보냈다.
철천지원수들을 토벌하고서 위풍당당하게 귀환한 이성휘는 장안성 백성들로부터 무한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
선봉군이 성문을 통과하고 후열의 병력들이 장안성에 들어섰을 때,
무희처럼 어두운 망사로 얼굴을 가린 정체불명의 여인이 군세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