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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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심기가 매우 까칠해진 상태였다.
어제도,
이틀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실수를 범한 시녀에게 화를 냈다.
오늘따라 유독 미련하게 생겨먹은 호위장에게 괜스레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일할 기분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조회에도 참석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힌 조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칩거를 이어나갔다.
‘떠난 지가 언제인데! 어째서 아직도 성휘는 소식이 없는 겐가! 설마 서량에서 다른 여자라도 생긴 건 아닐 테지? 그랬다간 이번에야말로 이혼이야! 불쌍하게 애걸복걸해도 진짜 이혼이라고!!’
꾸득-. 꾸득-.
애꿎은 베개를 움켜쥔 채 초조함을 곱씹었다.
왜 아직도 소식이 없지?
혹시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게 아닐까?
관중과 관서의 군벌들을 일소하고자 이역만리로 떠난 남편이 걱정되어 마음이 항상 심란했다.
‘감히 나와 성휘를 이별시키다니…! 모두 서량 놈들 때문이다! 독수공방의 설움을 겪게 한 죄, 멸문지화로 갚아주겠다!’
감히 한나라의 승상에게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겪게 한 죄는 백 번 죽어 마땅하리라.
못된 놈들.
빌어먹을 놈들.
나와 성휘를 방해하는 역적 놈들.
흑발을 늘어뜨린 미녀가 분통을 터트리면서 베개를 박박 찢어발겼다.
과연 흉포하고 괴팍한 성정으로 유명한 조승상다운 폭력이 아닐 수 없었다.
“게 있는가!”
조조가 소리쳤다.
후다닥-.
다급한 움직임과 함께 문이 열렸다.
아연실색한 기색의 시녀들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부, 부르셨사옵니까….”
또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까,
조조를 수발하는 시녀들은 가녀린 어깨를 움츠리면서 하명을 기다렸다.
사나운 악력에 찢어발겨진 채로 운명해버린 베개의 잔해들을 본 시녀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머지않아 본인들도 저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렴과 자효를 데려와라.”
“예엣!”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다.
시녀들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과 신경질이 모두 사촌들에게 향할 터. 당분간은 진노를 모면할 수 있겠지.
“언니께서 부르셨다고요?”
“…….”
조홍과 조인이 아연실색한 모습으로 관저에 들어섰다.
한나라의 모든 실권들을 장악한 승상의 부름이었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부름에 불복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하지만 아예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 하나,
언니의 화를 누그러뜨릴 방안이 존재했다.
“어마니!”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조홍과 조인은 패국조씨 가문의 귀여운 후계자를 앞세웠다.
불안과 초조함에서 비롯된 짜증을 사촌들에게 해소할 예정이었던 조조는 또랑또랑 빛나는 예쁜 눈을 보자마자 따스한 모성애가 담긴 미소를 지었다.
“앙아, 갑자기 어쩐 일이니?”
귀여운 아들을 품에 안아든 조조가 분명 잔꾀를 부린 게 분명한 사촌들을 노려보았다.
감히 아들을 앞세우다니.
나중에 아주 병신을 만들어주겠다.
감히 이 조맹덕에게 잔꾀를 부려…?
약삭빠른 사촌들을 남만(南蠻)과 동이(東夷)가 있는 곳으로 유배를 보내려 했다.
“어마니가 보고 싶어 왔숩니다!”
히히.
조앙이 해맑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귀여운 아들의 애교에 엄동설한처럼 매섭던 악감정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네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아들이 뺨을 부비면서 애교를 부리는데 어찌 넘어가지 않을까.
흉포하고 괴팍한 성정이었던 조승상은 금세 팔불출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리광 많은 조카님께서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함께 왔습니다!”
“마, 맞습니다….”
조홍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 말에 조인이 어눌한 목소리로 동조했다.
어떻게든 화를 모면하려는 사촌들의 필사적인 발버둥에 조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뻔히 보이는 수작을.
당장 괘씸죄를 물어 일벌백계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쏙 빼닮은 아들이 너무 귀여웠기에 관용을 베풀기로 했다.
‘살았다아….’
‘어서 서방님이 돌아오셔야 할 텐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잠시 화가 풀렸을 뿐,
짜증의 응어리는 여전히 꿈틀대고 있었으니까.
이역만리를 정벌하고 있는 이성휘가 허도로 돌아와야만 불안과 두려움의 연쇄를 끊어낼 수 있으리라.
“주군!”
좌불안석처럼 불안에 떨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촌들의 간곡한 염원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마침내 학수고대하던 낭보가 날아들었다.
“대장군께서 대승을 거두셨다고 합니다!”
무위군을 돌파하여 만리장성까지 몰아세웠던 6만의 군세들을 모두 포위하여 섬멸했다.
손에 꼽을 완승이었다.
한수와 관중제장을 격파하고 저족과 흉노족까지 대파하여 패권을 거머쥐었다.
관중(關中). 관서(關西). 서량(西涼).
중원 지역에 버금가는 광활한 군현들이 정벌군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대장군 이성휘는 모든 난제들을 극복한 난세의 주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앙아! 아빠가 이겼다는구나!”
조조가 사랑하는 아들을 덥석 안으면서 외쳤다.
이겼다.
격전에서 승리를 거둬냈다.
이역만리를 정벌하고자 떠났던 남편이 대승을 거뒀다는 말에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만연한 미소를 짓는 어머니의 모습에 조앙도 헤헤 웃음을 터트렸다.
‘드, 드디어… 언니의 노여움이 끝났다!’
‘후우.’
한 달 동안 지속된 조승상의 공포정치가 서량의 승전보로 막을 내렸다.
이제 살았다.
드디어 두 발을 쭉 뻗을 수 있게 되었다.
조승상의 공포정치에 바들바들 떨어야 했던 신민들은 서량의 승전보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 * *
대규모 포위전술로 결정적인 완승을 거둔 조조군은 전투에서 탈환한 무위군에 주둔했다.
병마들을 추스르면서 재정비를 거친 이성휘는 장안성으로 전령을 보내어 보급을 재촉했다. 오랜 전투로 인해 물자들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보급로가 너무 멀다.
또한 교통이 불편하고 치안이 불안정했다.
그렇기에 조조군은 결정적인 완승을 거뒀을 때까지 고질병처럼 보급을 걱정해야만 했다.
“밤이 되니 춥군.”
“해가 저물면 열도 가라앉으니까요.”
이성휘와 순유는 화로에서 발산되는 열에 의존하면서 차를 마셨다.
군막 안의 두 남녀.
훈훈하게 데워진 공기와 분위기.
아내에게 불륜 의혹을 당하기 딱 좋은 환경이다.
하지만 우려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적막만이 살육전에 지친 두 남녀의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네가 죄책감을 떠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찻잔을 든 이성휘가 중얼거렸다.
무거워진 마음을 어찌 모를까.
이성휘는 훤히 내려다보듯 순유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 명령으로 치러진 전투이니.”
“…….”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가 씁쓸함을 머금은 미소를 흘렸다.
들켜버렸다.
역시 한없이 예리한 분이시다.
이렇게 간단하게 마음을 들켜버리다니.
“후우. 정말 한심하죠? 항상 명경지수처럼 맑은 평정심을 유지해야 될 참모가… 죄책감에 흔들리다니.”
입술을 꾹 깨물었다.
쓰러트려야 할 적들이었다.
살육과 약탈을 반복했던 오랑캐 족속들이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들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
순유는 갈대처럼 애처롭게 흔들리는 본인의 마음에 크게 동요해야만 했다. 동요와 혼란으로 마음을 흐트리는 본인의 나약함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항상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돌덩이가 아니고서야 완전한 무정(無情)이 가능할 리 없겠지.”
“주군도… 죄책감을 느끼시나요?”
“어쩌면 가끔씩.”
이성휘의 대답에 순유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서툴다.
그리고 많이 어색했다.
위로하고 다독이는 모습이 영 어설펐다.
언변과 융통성이 결여된 주군답게 어색한 면모들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럼에도 자신을 호출하여 다독여주는 상냥함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부드러운 깃털로 뺨을 간질인 것처럼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하핫…! 주군, 위로가 엄청 어색하시네요.”
“나는 상담사가 아니다.”
본인도 머쓱함을 느꼈는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아,
정말 귀여우셔라.
이성휘를 바라보면서 웃음을 쿡쿡 터트리던 순유는 그의 품에 달려들어 입맞춤을 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시도하진 않았다.
굳이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앞으로도 계속 애태우기에 전념하기로 했다.
“이제 마초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순유가 물었다.
“변동은 없다.”
예견했던 대로 일을 처리하려 한다.
무거운 목소리로 질문에 대답했다.
“주군, 준비가 끝났습니다.”
고순이 군막으로 들어와 소식을 알렸다.
이제 마무리를 할 때다.
유종(有終)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서량 정벌을 완전무결하게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마지막 관중제장을 응당 세상에서 없애야 했다.
* * *
마지막 관중제장에게 날카로운 칼끝을 겨눈 흑발의 여인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가를 바르르 떨었다.
어깨를 움츠리면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칼끝은 여전히 목덜미를 위협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장료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부하들을 위해 노력했던 모습에서 천하무쌍의 위용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미안해요,
진심으로 유감이에요.
솔직한 마음을 담아 유감의 뜻을 전했다.
비록 적대관계에서 시작된 만남이었지만 함께 전선에서 분투하면서 우애를 쌓았다. 장료는 애처로운 눈길로 마초를 바라보면서 칼자루를 쥔 손을 떨었다.
“괜찮아. 받아들이기로 했으니까.”
갈색 머리카락을 둔부까지 늘어뜨린 여인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발걸음을 내딛었다.
“누님!”
“아가씨! 멈추세요!!”
마대와 방덕이 소리쳤다.
격앙된 고함과 함께 달려들었다.
그러나 장창과 방패를 치켜들면서 막아선 근위병들 때문에 현장에 가세할 수 없었다.
“약속대로… 제 목숨을 드릴게요.”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거리를 좁혔던 마초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사내에게 말했다.
“대장군 덕분에 아버지와 동생들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그래.”
한수를 죽여 마씨 일가의 한을 갚았다.
미련은 없다.
더 이상 후회 또한 없었다.
그렇기에 잠시 연명했던 목숨을 건네주겠다.
내 목숨은 이제 온전히 당신의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