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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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천에 떠올랐던 태양이 서쪽으로 점점 저물어가고 있었을 때,
피비린내가 요동쳤다.
시체의 산들이 황량한 벌판을 뒤덮었다.
장성까지 저족과 흉노족을 몰아세운 조조군은 일방적인 학살을 거듭했다.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하는 중원 군단들의 공세에 저족과 흉노족은 점점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 밀 셈이냐!”
“이제 막다른 길…! 장성이란 말이다!!”
패퇴를 이어나가던 수만의 장졸들이 만리장성이 위치한 산등성이에 이르렀다.
공세에 대응하지 못한 채 뒷걸음질만을 거듭하면서 궁지에 치달았다. 해가 기울 때까지 전투가 이어졌음에도 저족과 흉노족은 역공에 실패하고 말았다.
“공격하라! 공격하란 말이다!!”
“우리에게 도망칠 곳은 없다! 벼랑을 등에 업고 적들과 싸우라!!”
퇴로는 없다.
전투에서 이기는 것만이 유일한 활로다.
오로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수밖에 없다.
저족과 흉노족의 두령들은 결사를 부르짖으면서 장졸들을 이끌었음에도 사태는 악화일로를 거듭했다.
“왕이 한나라의 대장군에게 죽었다!”
“주, 죽었다고?! 서융의 괴력난신이…!!”
사정없이 꺾여버린 사기는 기적에 필적하는 변수가 없이는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양천만이 단칼에 목이 떨어졌다는 흉보가 날아들었다.
기적적인 변수는 없었다.
그저 한없는 절망만이 날아들었을 뿐.
낭떠러지로 떨어진 사기는 이윽고 막장으로 치달았다. 포위망의 압박에 후퇴를 거듭하던 저족과 흉노족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천만 왕이 죽었다!”
“으아아…! 으아아아아!!”
전의와 투지의 상실은 혼란과 절규로 이어졌다.
선두의 병력은 물론,
후열에서 받쳐주던 병사들까지 패주를 선택했다.
벼락소리에 놀란 망아지처럼 대경실색한 비명과 함께 달아났다. 날카로운 창검을 피해 무작정 도망치던 장졸들은 서로 부딪치고 밀치면서 혼란을 야기했다.
“오랑캐들이 달아난다!”
“계속 장성으로 밀어붙여라! 삼면에서 동시에 놈들을 압박하라!!”
정면.
좌측과 우측.
군단을 통솔하는 장수들이 진공과 압박을 이어나갔다.
포위망 달성까지 머지않았다.
이제 적들은 아비규환의 지옥에 휩싸이리라.
조조군 장수들은 순유의 책략이 성공적으로 달성될 수 있도록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대장군, 놈들이 계속 패퇴하고 있습니다!”
학맹이 소리쳤다.
그에 저족들을 도륙하던 이성휘가 고개를 들었다.
“작전대로 흘러가고 있군.”
피와 살점이 뚝뚝 흐르는 칼끝을 늘어뜨렸다.
적들이 패퇴하고 있다.
스스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연쇄적인 압박에 수만의 군세들은 움츠린 거북처럼 밀집대형을 이루었다. 곧이어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빈틈없는 과밀화에 치달았다.
“괘, 괜찮으십니까… 대장군.”
“뭐가 말이냐.”
양천만을 도륙한 이성휘는 부건과 부쌍까지 참살했다.
그리고 혼비백산하여 패주하던 적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수십 명을 죽였다.
피가 하천을 이루고 시체들이 산을 이루었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성휘가 누비는 곳들마다 연이어 시산혈해가 펼쳐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핏물을 뒤집어쓴 이성휘의 흉흉한 모습을 본 무관은 마른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과연 천하제일검이다….’
‘혈혈단신으로 수십 명을 베어죽이다니.’
이성휘를 보자마자 저족과 흉노족이 악신이나 괴물을 눈앞에 둔 것처럼 달아나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
천하제일검은 그보다도 무서운 존재였다.
신화와 전설상에 기록된 악신과 괴물은 비현실적인 공포만을 선사할 뿐이다.
그러나 눈앞의 악귀는 다르다.
온몸을 도륙하는 공포를 바로 눈앞에서 선사했다.
핏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괴물이 칼끝을 늘어뜨린 채 다가오는 모습은 실로 괴악스러웠다.
“으, 으아아악!!”
“괴물 같은 놈! 놈은 귀신이다!!”
한나라의 대장군은 사람이 아니다.
굶주린 괴물이다.
광기에 미친 귀신이 틀림없다.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괴물과 귀신을 이기겠는가.
투지를 상실한 저족 병사들은 병장기를 내던지면서 달아났다. 병사들 중의 일부는 갑옷까지 훌떡 벗어던지는 추태를 벌였다.
“우와, 또 엄청난 모습이네.”
붉은 갑옷을 걸친 여장부가 다가왔다.
또 피칠갑을 하고 있다.
코를 찌르는 농밀한 피비린내에 미간을 찡그렸다.
혼전을 승리로 이끌고서 돌아온 여포는 천하제일검의 위용에 다시금 감탄했다. 사방에 널린 시산혈해를 통해 일방적인 살육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저족의 왕을 죽였다며? 내 몫도 좀 남겨주지!”
여포가 툴툴대며 말했다.
총대장이 다 해버리면 부하들은 뭘 하란 말인가.
잡졸들만 치우게 생겼다.
서융의 거인이라 불리는 양천만과 창검을 겨뤄보고 싶었던 여포는 아쉬움에 찬 볼멘소리를 냈다.
“전황은?”
이성휘가 물었다.
그에 여포가 입을 열었다.
“좌측도 한계까지 몰아붙였어. 아마 고순도 적들을 한 곳으로 밀어붙였겠지.”
삼면에서 몰아붙인 압박은 수만의 군세들을 한계까지 밀집시키기에 이르렀다.
도망치지 못한다.
놈들에게는 퇴로가 존재하지 않으니.
역공세로 활로를 열어젖히려 했던 양천만의 돌파는 본인의 죽음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가파른 산등성이에 막혀버린 저족과 흉노족은 사실상 사면이 포위된 상태였다. 압박과 밀착으로 형성된 각축장에 가로막힌 것이다.
“대장군,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수고했다.”
마침내 우측을 지휘하던 고순이 돌아왔다.
물 샐 틈 없는 포위망이 펼쳐졌다.
마침내 전면전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온 것이다.
“북을 울려라.”
“예, 대장군!”
이성휘가 손을 들어 명령했다.
곧이어 웅장한 북소리들이 군중을 가득 메웠다.
두웅-! 두웅-! 두웅-! 두웅-!!
신호가 떨어졌다.
후방에서 대기하던 병단들이 드디어 최전선에 발걸음을 내딛었다.
“대장군의 명령이다.”
“진격하라. 오랑캐들을 진멸할 때가 왔다.”
견고한 방패로 무장한 방패병들이 진군을 가로막는 장해물을 좌우로 걷어내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장창을 늘어뜨린 장창병들이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전장에 가세했다.
방패병과 창병.
삼면을 압박하여 형성된 포위망에 결정적인 쇄기를 가하고자 수만의 방패병과 창병들이 움직였다.
드드드드드드드!!!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방패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질서정연하게 발걸음을 내딛는 굉음이 들렸다.
촘촘하게 방진(方陣)을 형성한 창병과 방패병은 난공불락의 거대한 성벽과도 같았다.
날카로운 날붙이들로 무장한 강철의 성벽이 밀려들었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저족과 흉노족 군세들은 앞다투어 가파른 산등성이를 등반하기 시작했다.
* * *
수만의 창병과 방패병들이 결집한 난공불락의 성벽은 촛불처럼 남은 마지막 전의마저 말살했다.
이길 수 없다.
어떻게 저 성벽을 뚫으란 말인가.
오로지 도망치는 것만이 살길이다.
흙먼지를 나부끼면서 천천히 육박해오는 강철의 성벽은 실로 위협적이었다. 장창과 방패들의 연쇄에 저족과 흉노족은 가슴 깊이 절망해야 했다.
“으아악!”
“비켜! 비키라고!!”
“이 개자식들! 비키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리겠다!”
전의가 사라지고 생존하고자 하는 의지만이 남아버린 현장은 아비규환의 지옥과도 같았다.
서로를 강하게 밀쳤다.
당기고 때리면서 싸움이 벌어졌다.
생존의 의지에서 비롯된 다급함은 폭력으로 변질되어 무질서를 열어냈다.
협소한 공간에 빼곡하게 몰려버린 군세들은 전열을 수습하지 못한 채 무너졌다. 오로지 혼란과 무질서만이 가득했다.
“비켜…! 비키란 말이다…!!”
“난 살아야 돼! 난 살아야 한다고!”
“성벽이 밀려온다! 벌써 코앞까지 왔단 말이다!”
산등성이에 위치한 만리장성을 넘어 전장에서 달아나고자 수많은 병력들이 밀집되었다.
그로 인하여 수만의 군세들은 칼 한 번 휘두르지도 못하고 서로의 압박과 발길질에 압사당하는 어이없는 최후를 맞이할 위기에 처했다.
끄악!
크아, 크하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발치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압박에 부딪쳐서 흙바닥에 쓰러진 병사들은 전우의 발길질에 금세 파묻히고 말았다. 그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곤죽이 되어야 했다.
“커헉!”
“으… 아아악!!”
마침내 느릿하게 진군하던 난공불락의 성벽이 과밀된 밀집대형에 도달했다.
콰앙-!
콰아앙-!!
방패로 힘껏 밀었다.
조조군 병사들은 협소한 공간에 봉쇄되어 옴짝달싹 못하는 저족과 흉노족을 방패로 두들겼다.
비좁은 공간으로 몰아넣는 방패병들의 압박에 빽빽하게 몰려든 과밀은 더욱 심해졌다.
“놈들을 벌집으로 만들어라!”
“오만한 오랑캐들에게 죽음을 선사해주자!”
난공불락의 요새를 호위하던 창병들이 날카로운 장창을 힘껏 내질렀다.
연이어 파육음이 울렸다.
방금 도축한 고깃덩이들을 꼬챙이로 관통하는 듯한 소리였다.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핏물이 울컥 쏟아졌다.
그럼에도 진군은 계속되었다.
삼면에서 형성된 성벽들이 거침없이 압박을 이어나갔다.
“빨리 가라고!”
“이미 중원 놈들이 살육을 시작했다!”
가파른 산등성이에 오르기 시작한 흉노족 병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기어올랐다.
떨어지면 죽는다.
두 번 다시 올라오지 못한다.
절벽처럼 가파른 지형을 기어오르던 병사들은 아래에서 들리는 고함과 비명소리에 온몸을 벌벌 떨었다.
“힘이 안 들어가…! 아, 안 돼!!”
산등성이를 오르던 흉노족 병사가 위에서 등반하던 전우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래에서 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한 저족 병사가 그만 아래로 굴러떨어진 것이다.
“크아악!”
“우와아아악!!”
눈이 소복소복 쌓인 언덕 위에서 눈덩이를 굴린 것처럼 절벽을 기어오르던 인파들이 일거에 쏟아졌다.
수백 명이 한꺼번에 휩쓸린 낙상사고가 벌어지면서 쑥대밭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