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화>
============================
금성군을 돌파한 이후부터 연전연승을 기록한 마초는 드디어 고토(故土)에 도달했다.
무위군(武威郡).
아버지의 야망이 시작되었던 곳.
탐스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은 그리움과 증오가 공존하는 눈길로 무위군의 정경을 두 눈에 담아냈다.
‘한수, 네놈은 반드시 내 손에 죽는다!’
흙과 바위로 쌓아올린 무위군의 성벽에는 증오스러운 한수군의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더러운 모략으로 아버지를 살해했던 변절자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음에 분탄을 토해냈다. 분노가 만연한 눈길로 무위군을 노려보면서 살의를 억눌렀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신의를 배신한 네놈들만큼은 지옥으로 끌고 가주겠다!’
살생부를 완수하기 위해선 본인의 목숨도 이성휘에게 바쳐야 했다.
동귀어진(同歸於盡)
적들과 함께 죽음으로서 임무를 달성한다.
그것이 바로 마초가 노리는 바였다.
아버지와 동생들의 복수와 살아남은 부하들의 안위가 모두 걸린 일이었기에 결코 망설이지 않았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것을 이성휘에게 보여주듯 마초는 속전속결로 모든 관문들을 돌파했다.
“누님!”
말에 오른 마대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무언가를 포착한 듯,
척후들과 무위군 주변을 정찰하고서 돌아온 마대의 낯빛에 다급함이 엿보였다.
“한수에게 군벌들이 죽었습니다!”
“뭐…?”
무위군 주변을 정찰하던 척후들이 사막에 우두커니 솟은 장대들을 목격했다.
모래에 깊게 박힌 장대.
비쩍 말라버린 나무들이 솟은 듯했다.
하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장대들이 아니었다.
비쩍 마른 장대 위에는 밧줄에 묶인 사람의 머리들이 매달려 있었다. 매달린 머리들은 놀랍게도 한수에게 가세했던 군벌들의 수급이었다.
“후선. 정은. 양추.”
굶주린 맹금들이 반쯤 뜯어먹은 뒤였음에도 신원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후선. 정은. 양추.
군벌들의 수급이 분명했다.
어째서 이들이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
잠시 심사숙고하던 마초는 한수와 관중제장 세력의 반목을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한수를 배신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한 건가? 멍청한 놈들 같으니.’
중원을 제패한 군세들이 눈앞까지 다가왔음에도 반목과 분열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실로 한심하지 않은가.
그 비열함에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군벌들과 함께 대의를 달성하고자 반평생을 바쳤던 아버지의 웅대한 야망에 회한마저 느껴졌다.
“마, 마초 장군!!”
휘하 무관들이 마초에게 가세했다.
심상치 않은 변고가 생겼다.
전황을 뒤흔들 정도의 이변이 일기 시작했다.
불길함을 직감한 마초는 곧장 말머리를 돌렸다.
둔영으로 귀환한 그녀는 자욱하게 나부끼는 흙먼지의 향연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젠장! 한수, 이 개자식이 결국…!”
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두두두──!!!
누런 흙먼지들이 하늘에 닿을 것처럼 솟구쳤다.
그뿐만이 아니다.
육중한 말발굽소리가 지축을 크게 흔들었다.
수만에 육박하는 기마군단들이 사방에서 등장했다.
요란한 고각소리로 위풍당당한 진군을 알린 변방의 기마군단들이 개선장군처럼 무위군으로 들어섰다.
“우오오오!”
“크하핫, 크핫핫핫핫핫!!”
온몸을 화려한 장신구들로 치장한 병사들이 괴성을 내지르면서 말을 재촉했다.
저족이다.
분명 저족을 불러들인 것이리라.
아버지가 이민족들과 자주 교류하였기에 마초는 저족의 언어와 특징들을 훤히 알고 있었다.
노도처럼 몰아치는 저족의 군세들을 목격한 마초는 서역의 맹주로 군림하는 양천만이 한수와 관중제장에게 가세하였음을 간파했다.
“저, 저길 보시오!”
천군만마가 질주하는 광경에 경악하던 조조군의 무관이 지평선 너머를 가리켰다.
그곳에도 또한,
자욱한 흙먼지와 함께 군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앞서 무위군에 입성했던 저족과 알력다툼을 하듯이 북방에서 도달한 흉노의 군세들은 쩌렁쩌렁한 함성을 내지르면서 사나운 용맹을 떨쳤다.
“호주천! 유표!”
강력한 기마군단을 거느린 선우들을 노려보았다.
저족의 왕.
흉노의 선우들.
북방과 서역을 거느린 우두머리들이 연이어 전장에 개입했다.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조조군을 위협으로 인식한 것이리라. 조조군의 공세를 저지하고자 북방과 서역의 이민족들이 서로 동맹하여 무위군에 집결했다.
“당장 기치를 뽑고 퇴각한다!”
무위군을 둘러싼 수만의 군세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마초가 말머리를 돌리면서 퇴각을 명령했다.
압승을 예견했을 정도로 유리했던 전황이 삽시간에 팽팽해졌다.
북방과 서역 세력의 개입.
조조군은 대전(大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 *
압도적인 전력으로 승승장구를 계속 거듭하던 조조군이 예상치 못한 난관에 직면했다.
양천만. 호주천.
서역과 북방의 세력들이 서량으로 몰려들었다.
설마 사면초가에 직면한 한수가 양천만과 호주천을 불러들이는 위험천만한 도박을 감행할 줄이야.
세력을 사수하고자 외세들을 불러들이는 계책은 사실상 자멸(自滅)에 가깝다.
전면전에서 승리를 거두더라도 결국 외세들에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족의 왕과 흉노의 선우들이 한수의 요청을 받아들일 줄이야…. 후우, 잠시 놈들을 과소평가했군.”
제장들을 소집한 이성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양손으로 깍지를 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차가운 얼음물을 끼얹어버린 것처럼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감히 장성을 넘어오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 분명해!”
차가운 적막을 깨부수듯 여포가 격앙을 내질렀다.
놈들의 속셈은 뻔하다.
병주에서 질릴 대로 겪어봤으니까.
서량을 교두보로 이용하여 중원을 침략하려는 야욕을 품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여포를 위시한 장수들은 한수군에 합류하여 도전장을 던진 이민족들을 모두 격파할 것을 이성휘에게 진언했다.
“지금은 아군이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으나… 서량 곳곳에서 후속부대들이 충원된다면 아군은 결국 우위를 내어주게 될 것이옵니다.”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기염을 토해냈지만 아직 조조군은 서량을 완전히 복속시키지 못했다.
반면 한수는 금성군을 포함한 군현들을 조조군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서량의 지배권을 거머쥐고 있었다.
병력을 증원하기 어렵다.
장거리 원정으로 보급 또한 원활하지 못했다.
단기결전으로 놈들을 모두 쓰러트려야 한다.
가후의 말뜻을 이해한 이성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장들에게 결전을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하필이면 복병들이…!”
“딱히 어렵게 생각할 거 없음. 두고두고 후환이 될 숙적들이 제 발로 와준 거 아님?”
양수가 침음을 삼켰다.
그에 사마의는 여유로운 반응을 보였다.
어차피 쓰러트려야 할 숙적이다.
서량에서 놈들을 모두 격파하여 기세를 꺾어버린다면 후환에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었다.
“중달의 의견에 찬성이에요. 절체절명의 위기가 오히려 천재일우의 기회가 될 수 있는 법이니까요.”
순유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불안감을 호소하던 후배를 진정시켰다.
참모는 그 어떤 상황에도 결코 냉정과 침착함을 유지해야 한다.
전술과 군략으로 주군을 보필하는 참모가 무너진다면 수싸움이 가장 중요한 대국에서 패배할 테니까.
“전군을 동원하여 놈들을 치겠다. 제장들은 휘하를 이끌고 전면전을 준비하라.”
“예, 대장군!”
변방을 침략한 외적들을 격퇴하는 임무는 대장군에게 주어진 사명과도 같다.
이것은 시련이다.
전면전의 승패를 통해 결과가 입증될 터.
조조군의 강행으로 새롭게 부활한 대장군부의 힘을 만천하가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결코 이민족 따위에게 물러날 수 없었다.
“마초.”
대장군으로부터 하명을 받은 장수들이 물러나고 있었을 때 마초를 불러세웠다.
그에 마초는 발걸음을 멈췄다.
“예… 부르셨습니까, 대장군.”
부름을 내릴 줄 알고 있었다.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는 뻣뻣하게 경직된 표정을 지으면서 이성휘를 마주했다.
“선봉을 여포에게 맡기려 한다.”
“예.”
현명한 결정이다.
천하무쌍이 선봉을 이끈다면 북방과 서역의 호인들이 크게 두려워할 테니.
그런데 왜 나를 불러세운 것일까.
마초가 짐짓 의문을 품고 있었을 때 이성휘가 말을 이어나갔다.
“여포를 보필하여 선봉을 사수하라.”
“…알겠습니다.”
한수군과 관중제장 세력은 복수심을 불태우는 마초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또한 무위군에는 여전히 마등을 그리워하는 호족들이 많았다. 서량의 금마초가 전장에서 무명을 떨친다면 무위군은 금세 동요에 빠지게 될 터였다.
“한수와 관중제장을 모두 죽여 하명을 반드시 완수하겠습니다.”
살생부를 완수하고자 결사의 각오로 고군분투를 이어왔다.
화살세례에 굴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창검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로지 사명의 달성만을 생각하면서 싸워온 덕분이다. 한때나마 전우였던 군벌과 장졸들을 도륙하는 일이었음에도 거침없이 활약했다.
“왜 살려달라고 부탁하지 않지?”
공을 세웠으니 참작해달라.
나를 살려준다면 분골쇄신하여 충심을 다해 보필하겠다.
지금까지 휘하에서 쌓은 전공들을 들먹이면서 자비를 부탁할 만도 했음에도 마초는 결코 이성휘에게 동정을 호소하지 않았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것이리라.
오히려 전장에서 죽기를 원하는 듯했다.
“저는…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죄인입니다. 어떻게 언감생심… 자비를 논하겠습니까.”
무고한 백성들이 자비와 동정을 호소했음에도 끝까지 귀를 닫고 외면하지 않았던가.
침묵 또한 죄다.
외면과 묵시는 사실상 동조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마초는 이성휘에게 부탁하지 않았다.
장안성을 돌파하여 학살극의 단초를 제공했던 마초는 살아있어선 안 될 죄인이다.
내가 죽어야 속죄가 완성된다.
백성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죽음으로 속죄함이 옳을 것이다.
내가 멀쩡히 살아있는 일분일초가 소중한 피붙이를 잃은 생존자들에게는 한없는 고통일 테니. 똑같은 고통을 겪는 처지가 되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