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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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군의 선봉장으로서 금성군을 점령한 마초는 여세를 몰아 옹주(雍州)로 진군했다.
거센 모라바람이 몰아쳤다.
그러나 마초는 길을 헤매는 일 없이 정확하게 목적지로 나아갔다.
황량하고 메마른 열사의 대지에서 태어난 마초였기에 그 어떤 장해들도 난관이 되지 못했다. 막중한 중압감을 짊어진 채 임무에 몰두했다.
“농우(隴右)를 점령했으니 이제 무위군까지 머지않았어. 단숨에 거점들을 공격하여 한수와 관중제장 세력을 압박한다면 승기를 점할 수 있을 거야.”
금성군을 돌파한 마초는 제장들을 소집하여 앞으로의 방침을 설명했다.
무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낯빛에는 불온한 기색이 역력했다.
선봉군에 소속된 무관들은 마초의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계속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다. 모멸과 경계심으로 가득한 눈빛들이 계속 마초를 주시했다.
“휘하에 그리 전하겠소.”
무관들이 짧은 목례와 함께 바깥으로 나섰다.
냉대. 불신.
찰나에 여러 악감정들이 몰아쳤다.
그럼에도 마초는 자신에게 집중된 모멸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무고한 백성들을 잔륙했던 학살극을 방치하지 않았던가. 악행에 동조하지 않았을 뿐이다. 마초는 자신이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던 관중제장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악도라고 여기고 있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무관들이 나서자마자 바깥에서 기다리던 방덕이 우려 섞인 표정을 지으면서 다가왔다.
분명 많이 힘들겠지.
마음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 순 없을까.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는 애처로운 눈길로 무거운 부담을 떠안고 있던 아가씨를 응시했다.
“이제 무위군까지 머지않았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해도 괜찮을 겁니다. 만약 본대에서 공세를 계속 재촉해온다면 제가 군세를 이끌겠습니다.”
금성군을 돌파한 이후부터 하루도 쉬지 않았다.
계속 싸우고,
계속 승리를 거둬냈다.
결전을 앞두고 부담감에 쓰러질지도 모른다.
맹렬한 용력을 자랑하는 서량의 금마초가 마모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예리한 송곳에 심장이 찢기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금성군에서 곽헌과 장석을 죽였어. 아끼던 심복들이 죽었으니 곧 한수가 나설 거야. 비명 속에 죽어간 아버지와 동생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무리를 할 수밖에.”
마초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아갈수록 말로가 다가오고 있다.
살생부에 적힌 이름들을 하나둘씩 지울수록 자신의 죽음 또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방법을 잊어버린 수레바퀴처럼 계속해서 비탈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갈 뿐이었다.
‘나는 조조군의 사냥개에 불과해. 옹주와 양주를 정복하기 위한 사냥개…. 사냥이 끝난 이후에 제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잖아.’
그래,
나는 사냥개에 불과하다.
쓰임을 다하면 결국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존재.
가혹한 처지에 직면했음에도 마초는 불구대천의 원수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이성휘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더러운 모략으로 서량의 의지와 명예를 짓밟은 배신자들을 반드시 죽일 거야.”
중상모략에 희생된 아버지와 동생들의 통한이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한수를 죽여라.
관중제장을 모두 죽여라.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살의가 울려퍼졌다.
난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들을 모두 지켜내겠다는 결연한 꿈을 빼앗긴 마초는 복수심에 빠진 귀신으로 전락해버렸다.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방덕이 두 팔을 뻗으면서 아가씨의 손을 맞잡았다.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차갑게 변해버린 손아귀에 따스함이 맴돌았다.
여전히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었음에도 밝은 미소를 지어주는 상냥한 배려에 눈물이 차올랐다.
“으, 응…. 고마워.”
복수만을 생각하는 귀신이 되었음에도 마초가 끝까지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지켜야 할 사촌과 부하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스스로 죽음으로 다가서고 있음에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였다.
“척후들을 이끌고 무위군의 동태를 잠시 살피고 오겠습니다. 연이은 패배로 위기감을 느낀 한수는 군벌들을 소집하여 일전을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요.”
“조심해, 영명.”
“물론입니다.”
방덕이 예를 취하면서 물러났다.
‘결국 내가 죽는다면….’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나풀대면서 세찬 발걸음을 움직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만무부당의 용맹과 무력을 겸비한 방덕은 조조군도 혹할 만한 인재였다.
살생부를 완수한 이후에 이성휘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면 방덕과 마대가 군부에 출세할 수 있도록 뻔뻔하게나마 부탁을 해올 생각이었다.
“좋은 부하를 뒀네. 아까울 정도로 말이야.”
금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새침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다가왔다.
위풍당당한 발걸음으로 다가온 여인을 목격한 마초는 당혹어린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넌…. 애비 셋…?”
“씨발.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네.”
마초의 중얼거림에 여포가 얼굴을 찌푸렸다.
정포. 동포. 여포.
계속 꼬리표가 쫓아다녔다.
변방에서 활동했던 서량의 금마초조차 자신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음에 두통이 치밀었다.
“항장끼리 앞으로 잘해보자고. 다른 녀석들이 뭐라고 하건 나는 딱히 상관 안 해.”
수많은 장졸들이 학살을 묵인했던 마초를 힐난하고 규탄하였음에도 여포는 아랑곳 않았다.
부하들의 안위를 위해서였다고는 해도 양부를 배신하는 참담한 원죄를 범하지 않았던가.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낀 걸까.
여포는 항전을 포기하고 귀순해온 마초에게 배려를 선뜻 베풀었다.
“…….”
예상치 못한 배려였다.
설마 천하무쌍에게 배려를 받게 될 줄이야.
만인들로부터 모멸과 지탄을 받을 뿐이라고 여겼기에 당혹감을 느끼게 되었다.
“부하들을 위해 어려운 선택을 한 거잖아. 어떤 상황에서도 부하들의 안위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되는 게 장수의 도리니까.”
장안성의 참극은 알고 있다.
하지만 굴욕을 감수하고서 부하들을 살리고자 노력했던 고결한 의지만큼은 무인으로서 존중해주고 싶었다.
“설마 천하의 여봉선에게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들은 줄은 몰랐는데.”
“나도 몰랐거든?”
마초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에 여포는 새침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쯤 한수는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거야.”
“우리 꼬맹이 군사는 한수가 심복들을 이끌고 돈황(敦煌)이나 주천(酒泉)으로 도망칠 거라고 했는데.”
반란이 진압될 때마다 서역으로 달아나 기사회생을 시도했던 한수가 아닌가.
이번 또한 그럴 것이다.
사마의는 이번에도 패색을 완연함을 직감한 한수가 달아날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마초는 그 추측에 고개를 저었다.
“옛날의 한수라면 그랬겠지. 그때는 확고한 세력권이 없었던 떠돌이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 거머쥐고 있는 게 너무 많으니까. 우여곡절 끝에 손에 거머쥐게 된 것들을 쉽사리 놓지 않을 거야.”
의형제를 살해하여 무위군의 세력을 흡수한 한수는 천군만마를 거느린 대군벌에 등극했다.
세력을 쉽게 포기할 리 없다.
분명 흥망성쇠를 걸고 건곤일척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었다.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한수의 성정을 누구보다 훤히 꿰뚫고 있는 마초였기에 심중을 정확히 간파했다.
“오. 꽤 그럴 듯한데? 신참이 제법 쓸모가 많네.”
“누가 신참이야.”
서량의 금마초를 감히 신참으로 취급하다니.
여포의 우스갯소리에 마초가 실소를 흘렸다.
‘만약에 전우로 만났더라면 좋은 막역지우가 될 수 있었을까.’
자신을 동등한 전우로 여겨주는 여포를 바라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녀의 전우가 될 수 없었다.
천인공노할 원죄를 짊어진 본인에게 그것은 너무도 과분한 명예였다.
살생부에 기록된 이름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자신도 결국 이성휘에게 제거될 터. 그렇기에 마초는 막연한 희망을 꺾어버렸다.
* * *
수만에 이르는 군세가 흙먼지를 나부끼면서 무위군에 입성했다.
금은보화를 조건부로 약속한 한수의 회유를 받고서 변경의 두령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강족(羌族). 저족(氐族). 흉노(匈奴).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는 이민족들이 서량에 집결하여 맹위를 떨쳤다.
“흐하핫! 맹우가 위험에 처했는데 어찌 사내대장부가 뒷짐만 지고 있겠나!!”
무려 신장이 7척에 달하는 거인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무쇠처럼 강인한 두 팔을 벌렸다.
저왕(氐王) 양천만.
뿔뿔이 흩어졌던 부족들을 통합한 지배자.
저족을 대표하는 두령들로부터 왕으로 추앙받는 양천만은 풍요와 번영이 약속된 중원으로 진출하겠다는 야심을 실현해고자 한수와 손을 잡았다.
“우리들도 기꺼이 달려왔네.”
“기필코 중원 놈들을 모두 요절내버릴 것이오.”
선우(單于) 호주천.
그의 조카였던 우현왕(右賢王) 유표도 가세했다.
저족에 이어 흉노족까지 병력을 이끌고 달려왔다.
목적은 양천만과 마찬가지였다.
한수를 이용하여 중원으로 진출하겠다는 야심을 실현하고자 이역만리를 달려왔다.
“모두 고맙네.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일세.”
한수가 초원과 사막을 가로지르면서 달려온 두령들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크게 환대했다.
지원군이 5만이 넘었다.
한수군과 관중제장 세력이 보유한 병력까지 더한다면 능히 조조군을 대적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천군만마를 얻었음에 한수는 파안대소를 한껏 지으면서도 오싹한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난세에 편승하여 활개를 치기 시작한 변방의 오랑캐들이 설마 이렇게 강성해졌을 줄이야…! 나라를 세우고도 남을 정도다!’
나약하고 미개하던 오랑캐들이 어떻게 이토록 막강해졌단 말인가.
중원의 군벌 세력을 능가했다.
잘 훈련된 기마부대를 휘하에 두고 있을 정도로 강족과 저족, 흉노는 막강함 힘을 떨치고 있었다.
날카로운 창검과 견고한 갑옷으로 중무장한 정예병들을 목격한 한수는 두려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