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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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미세한 떨림은 온몸으로 확산되었다.
천하제일검을 마주하고 있다.
호흡을 내쉬는 것조차도 망각해버릴 정도로 무거운 중압감이 밀려들었다.
“…천하제일검.”
밀물처럼 몰려든 조조군이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음에도 마초는 오로지 이성휘만을 응시했다.
이를 꽉 깨물었다.
창을 움켜쥐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내게 치욕을 안겼던 호적수.
다음에는 기필코 이기겠노라고 굳게 맹세했던 호적수와의 재회는 최악의 국면에서 이루어졌다.
“누님!”
칼자루를 움켜쥔 마대가 마초에게 다가섰다.
꽈악.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죽는다.
활시위에 내걸린 날카로운 화살들이 마대에게 날선 경고를 보냈다. 수상한 행동을 벌인다면 즉시 온몸을 벌집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살의가 느껴졌다.
“안 돼, 멈춰!”
마초가 소리쳤다.
두 눈을 번뜩이고 있는 궁노병들이 무려 수백 명에 달했다.
서량 제일의 맹장조차도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세례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올가미들에 팔다리가 모두 묶여버린 맹수처럼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마초는 침묵을 이어나가는 이성휘를 바라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눈앞에서 창끝을 겨누고 있는 조운을 뿌리치더라도 수천 명의 조조군 병력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여포와 장료가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
백병전이 벌어진다면 천하제일검도 가세하겠지.
사면초가의 위기에 직면한 마초는 치욕스러운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지금까지 관철해온 무인의 자존심을 내던지는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싸울 의사는 없어.”
마초가 손을 놓았다.
투아앙-!
굳게 움켜쥐었던 창이 바닥에 떨어졌다.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고자 병장기를 버렸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부하들을 우선시한 마초는 무인의 자존심을 포기하면서까지 치욕스러운 불명예를 선택했다.
“투항하겠다는 건가.”
이성휘가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말했다.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마치 강철로 된 방벽이 열리는 듯했다.
무거운 위엄을 발산하면서 다가선 이성휘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인 짐승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 말고는 네게 방법이 없을 테니.”
이성휘가 단언하듯 말했다.
그에 마초는 분탄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
한수와 관중제장 세력의 배신으로 세력이 멸망하고 마씨 가문이 멸족했음을 들은 것이리라.
“예…! 그, 그렇습니다…!”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투항하고자 한다.
저항의지를 꺾고 항장이 되기를 원한다.
지금까지 조조군과 공방전을 벌였던 서량의 금마초에게 있어 다시없을 치욕이었다.
“그럼 일단은 무릎부터 꿇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성휘를 배후에서 호위하던 장료가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마초에게 날선 경고를 보냈다.
움찔-.
마초가 몸을 떨었다.
이윽고 단념했는지 무릎을 천천히 굽혔다.
갈대처럼 천천히 내려앉던 무릎이 황량한 흙바닥을 접하게 되었다. 서량의 금마초가 결국 한계에 봉착한 채 이성휘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크윽!”
“매, 맹기 님…!”
서량의 금마초가,
서량 제일의 맹장이 무릎을 꿇었다.
그를 지켜보던 부하들은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침음을 토해냈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마대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으면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모든 부담을 떠넘길 순 없다.
마대와 방덕은 병장기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마초를 따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마초와 잔병들을 모두 포박하라. 본영까지 압송할 것이다.”
이성휘가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면서 좌우의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항장’으로서가 아닌,
우선은 ‘포로’로 취급하겠다는 결정이었다.
“…큭!”
마초가 신음을 삼켰다.
어깻죽지와 등이 짓눌렸다.
일기당천의 맹위를 두려워한 조조군의 무관들은 억센 손아귀로 단단히 압박했다.
그에 마초는 저항하지 않았다.
무관들을 일거에 쓰러트리고도 남을 초인적인 용력을 자랑했음에도 말이다.
생사의 여탈을 스스로 이성휘에게 넘겨버린 마초는 명령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불응한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부하들까지 모두 처참한 죽임을 당할 테니까.
* * *
마등군의 잔당들이 투항을 요청해왔다.
그 소식으로 관서의 조조군 본영이 크게 들썩였다.
서량의 금마초.
일기당천의 맹장이 결국 붙잡혔다는 소식에 조조군 장졸들은 크게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 계집이 마초인가!”
“설마 그 무시무시하던 서량의 금마초가 이토록 허무하게 붙잡힐 줄이야!”
갈색 머리카락을 탐스럽게 늘어뜨린 여인이 포승줄에 묶인 채 조조군 본영에 들어섰다.
비단처럼 아름다운 용모를 자랑하는 여걸답게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썼음에도 빛을 발했다.
백옥처럼 새하얀 얼굴.
또렷하게 빛나는 밤갈색 눈동자.
아름답게 조각한 듯 반듯한 이목구비까지.
과연 그 아름다운 용모가 여포와 장료에 비견될 정도였다.
“어째서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지? 적어도 돌팔매질은 할 줄 알았는데.”
포승줄에 묶인 채 군중을 지나던 마초가 호송을 맡았던 위속에게 물었다.
그에 위속이 대답했다.
“모두 항장 출신이니까.”
대장군 이성휘의 측근들이 항장 출신이다.
정원을 배신하고서 동탁에게 잠시 귀순했다가 최종적으로 조조군에 투항했던 여포군이 대장군부의 중추 역할을 했으므로 항장을 모멸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위속이 말끝을 흐렸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바뀌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마초! 죽여 버리겠다!”
“네 이년! 감히 뻔뻔하게 투항을 해오다니!”
대부분의 장졸들이 요지부동을 일관했지만 거센 반발 또한 존재했다.
마등군과의 전투에서 전우와 부하들을 잃은 슬픔과 고통에서 비롯된 반발이었다.
저 계집을 당장 죽여야 한다.
목을 베어 군문에 내걸어야 마땅하다.
악에 받친 목소리로 호송되던 마초에게 소리쳤다.
“전열을 이탈하지 마라!”
“계속 소란을 피운다면 군법대로 처리하겠다!”
분노가 군중으로 확산되는 것을 저지하고자 무관들이 날카로운 고함소리로 꾸짖었다.
본영으로 압송된 마등군의 잔당들에게 살의를 토해내던 목소리는 곧 잠잠해졌다.
“항장은 군막으로 들어가시오.”
군중들을 통과하여 본영에 도착한 마초에게 대장군의 호위를 지휘하던 고순이 다가왔다.
함진영에 소속된 병사들이 주변에 배치되어 본영에 출입한 마초를 경계했다. 불온한 모습을 보이면 당장이라도 창을 휘두를 것처럼 기세가 매우 엄숙했다.
“누님!”
“아가씨!”
뒤이어 압송된 마대와 방덕이 소리쳤다.
출입 가능한 인원은 한 명뿐이다.
나머지 인원들은 본영 바깥에서 기다려야 했다.
홀로 본영으로 들어서는 마초의 뒷모습에서 불안감을 느꼈는지 마대와 방덕은 우려 섞인 표정을 지으면서 지켜보았다.
“괜찮아, 괜찮을 테니까….”
사촌과 부하에게 그렇게 중얼거린 마초는 함진영의 안내를 받으면서 발걸음을 내딛었다.
* * *
군막으로 들어서자 맹금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사내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늦었군.”
“으읏….”
마초는 긴장된 듯 침음을 삼켰다.
발걸음을 내딛기 직전에 각오를 다졌음에도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되고 말았다.
낙양대전에서 조우했던 흉악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마초는 이성휘의 시선을 받기만 해도 온몸이 경직될 정도로 고질적인 공포를 느꼈다.
“이리도 쉽게 백기를 들 줄은 몰랐다. 한수와 관중제장을 향한 복수심 때문인가?”
이성휘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에 마초는 두려움을 억누르면서 입을 열었다.
“예… 그, 그렇습니다…. 그리고… 부하들을 위해서입니다….”
높임말이 어색했던 마초는 연신 버벅대면서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버지와 동생들이 모두 죽었다.
무위군에 거주하던 종친들도 한수에게 살해당했다.
대다수의 장졸들이 흩어졌다.
부친께서 이룩한 세력까지 패망했다.
심지어 한수에게 무위군을 위시한 영역들을 송두리 째로 빼앗기면서 천하에 두 발을 디딜 곳조차도 없어졌다.
메마른 황야에서 객사하거나 한수와 관중제장이 보낸 척후들에게 추살될 위기에 빠진 마초는 결국 이성휘에게 투항하기로 결심했다.
“투항이 진심이라는 말이군. 하지만 무리를 감행하면서까지 너를 거둘 이유가 없다. 너희들을 거둔다면 한수와 관중제장 세력은 더욱 거세게 저항할 테니.”
“……!”
이성휘의 차가운 답변에 마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이든…! 무슨 일이든 마다않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복종하겠습니다!”
둔부까지 늘어뜨린 밤색 머리카락이 흩날릴 정도로 허리를 숙인 마초가 울분이 뒤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시키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받아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서량을 대표하는 일기당천의 맹장은 완고하던 자존심을 모두 내던진 채 굴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입으로는 무슨 말이든 하지 않겠사옵니까? 아직까지도 마초 장군께선 체면이 남아계신 모양이옵니다.”
군막으로 들어선 여인이 간곡하게 호소하는 마초를 힐끗 쳐다보면서 말했다.
말로는 부족하다.
진심임을 행동으로 보여라.
그럼에도 최소한의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는 마초의 행동을 꼬집었다.
“…큭!”
가후의 표독스러운 진의를 깨달은 마초는 마지막으로 남은 체면마저 포기했다.
“받아만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렸다.
마지막 체면마저 버린 마초는 짐승처럼 네 발로 엎드린 채 이성휘에게 굴종의 뜻을 밝혔다.
투욱-.
흙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탐스러운 밤색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흙바닥에 내려앉았다.
“절대… 절대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가족과 가문의 복수를 위해.
살아남은 부하들의 안위를 위해.
치욕을 갚겠노라고 다짐했던 호적수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면서 복종을 맹세했다.
“멍…! 머엉…!”
뒤이어 개처럼 울음소리를 냈다.
마지막 남은 체면을 버렸다는,
사람으로서의 자존심마저 버렸다는 의미였다.
“멍! 멍! 머엉!!”
툭. 투욱-.
눈물이 흘러내렸다.
모멸감 때문일까.
아니면 한수를 향한 원망 때문일까.
강물이 범람하듯 통한의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