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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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군과 서량군의 충돌은 비릿한 피비린내와 시산혈해만을 남겼다.
두 달 동안의 공방.
무수히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전면전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계속 전황을 이어오던 서량군은 결국 한양군을 탈환했다. 막대한 손실을 감수한 끝에 관서의 지배권을 다시 빼앗아왔다.
“수고 많았다, 맹기야.”
“아버지!”
마등이 함양(咸陽)의 군사들을 이끌고 합류했다.
날랜 기병들을 거느린 마등군은 진창(陳創)에 주둔하던 유언군을 크게 물리치고서 돌아왔다.
호쾌한 승전을 거둬냈다.
아버지 마등을 호위하던 마휴와 마철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군문에 들어섰다.
“고생 많았네, 문약.”
“유언군을 크게 격파하다니…! 과연 마수성이로군!”
서량을 호령하는 두 군벌들이 만났다.
반갑게 환대하며 포옹했다.
그들의 모습에서 각별한 전우애가 느껴졌다.
배후에서 유언군을 격파했던 마등군까지 군문에 합류함으로서 서량 연합군이 완전해졌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전황이 마침내 서량군으로 기울게 되었다.
“핫핫핫! 유언, 그 늙은이! 지금쯤이면 크게 노발대발하며 소리치고 있을 걸세!”
마등이 호탕하게 웃었다.
능구렁이처럼 교활한 늙은이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광분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했다.
교활한 뱀을 꺾었다.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늙은이의 탐욕을 꺾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어서 들어가세! 연회를 준비했네. 어디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마셔보세. 아직 백주대낮이지만 말이네.”
“하하핫! 위대한 군웅들과 술잔을 기울이는데 밤낮이 따로 있겠나.”
한수로부터 환대를 받은 마등은 관중제장과 정겹게 인사를 나누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웅대한 승전을 거둔 영웅들과 술잔을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마초. 마휴. 마철. 마대.
함께 움직이는 수족처럼 마등을 곁에서 호위했다.
겸인지용을 자랑하는 혈육들에게 호위를 받는 마등은 대호(大虎)에 올라탄 것처럼 위세를 떨쳤다.
“혈기지용(血氣之勇)을 떨친 맹장에게 축하주가 빠져서야 되겠나? 이 숙부가 술 한 잔 주겠네!”
한수가 가득 따른 술잔을 건넸다.
그에 마초가 난색을 표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아버지를 호위하는 중입니다. 말씀은 감사하나 음주를 할 순 없습니다.”
철두철미한 성정의 여장부답게 마초는 책무를 주장하면서 축하주를 겸허히 사양했다.
함부로 술을 마실 순 없다.
설령 동생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마초가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한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초의 완고한 성정을 잘 알기에 연이어 제안하진 않았다.
“강직한 딸을 두어 듬직하겠군.”
“가문의 자랑일세. 과연 누가 데려갈지 고민이지만 말일세.”
한수와 마등이 술잔을 기울이면서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또 그 말씀이신가.
짓궂은 농담에 마초가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무장으로 살고자 맹세했다. 그렇기에 결코 지아비에게 순종하는 아내로 살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외동딸이 이대로 노처녀가 될까 두려웠는지, 만나는 사람들마다 딸의 혼례를 거론하고는 했다.
‘음…?’
술잔을 기울이던 후선과 정은이 일어섰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한 사내가 다가와 후선과 정은을 이끌었다.
관중제장에게 귓속말을 건넨 사람은 한수의 부하였던 성공영이었다. 성공영의 부름에 후선과 정은은 양해를 구한 뒤에 군막을 잠시 벗어났다.
“누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마대가 물었다.
성공영과 관중제장을 계속 응시하는 사촌누이의 모습이 의아한 듯했다.
“아냐, 아무것도.”
물음에 마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일 아닐 테지.
연회 도중에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니까.
예리한 직감이 의문을 보내고 있었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술을 퍼마셨으니 함께 소변이라도 누러 간 것이라며 의문을 억눌렀다.
* * *
성공영이 연회를 즐기던 후선과 정은을 불러냈다.
긴히 전할 말이 있다.
그 부름에 후선과 정은은 성공영을 뒤따랐다.
으슥한 장소에 도착한 성공영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관중제장에게 주군 한수의 전언을 고했다.
“두 장군들께선 익주목 유언의 장남을 살해한 흉수에 대해 아십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서늘한 한기마저 느껴지는 성공영의 물음에 취기가 달아났다.
유범을 살해한 흉수.
그가 누구인지 진서장군은 알고 있단 말인가?
성공영의 부름에 뒤따랐던 후선과 정은은 아연실색하며 두 눈을 부릅떴다.
황량한 벌판이 시산혈해가 되도록 치열하게 싸웠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악전고투에서 수많은 병력들을 잃어야 했던 관중제장은 분기탱천한 모습으로 성공영의 대답을 기다렸다.
“바로 정서장군 마등입니다.”
“뭐, 뭣…!”
유언의 장남을 습격한 흉수는 바로 마등이다.
허억…!
후선과 정은이 경악을 토해냈다.
마등이 익주목 유언의 장남을 살해했다니.
두터운 충간의담을 자랑하는 진서장군 한수의 전언이라도 덥석 믿기는 어려웠다. 성공영의 말에 후선과 정은은 의구심을 드러냈다.
“물론 증좌는 있습니다. 유범과 손조가 살해되면서 사라졌던 유언군의 물자들이 모두 마등군의 본거지인 우부풍(右扶風)에 있습니다.”
척후들이 확인한 사실이다.
분명 유언군이 탈취당한 막대한 물자들이 우부풍에서 발견되었다.
우부풍은 마등의 고향이다.
무위에서 함양으로 거점을 옮긴 마등군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성공영이 증좌까지 내세우자 계속 반신반의하던 후선과 정은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의심을 거두진 않았다.
“정서장군은 분기탱천한 유언군을 끌어들여 관중제장 세력을 약화시킨 뒤에 관서와 관중을 먹어치울 속셈인 겁니다.”
“설마 정서장군이 그러겠나!”
“어째서 마등군이 유범과 손조를 급습했겠습니까.”
“…….”
마등은 지독한 야심가다.
서쪽 지역들을 통일하여 서량의 제후왕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서량(西涼). 관서(關西). 관중(關中).
세 지역들을 모두 복속한다면 야망을 달성할 수 있을 터.
그래서 비겁한 중상모략을 동원하여 유언군을 끌어들인 것이리라. 서량의 형제들이 정복했던 드넓은 지역들을 모조리 먹어치우기 위해.
“두 장군들께서 진서장군의 대의에 동참해주셨으면 합니다.”
성공영이 말했다.
갑작스럽게 불려나온 후선과 정은은 가담을 종용하는 권유에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 * *
사절단의 귀환을 확인한 이성휘는 곧바로 제장들에게 총공세를 명령했다.
마등이 자리를 비웠을 터.
빈집이나 다름없는 장안성을 속전속결로 탈환하라.
대장군으로부터 명령을 받든 장수들은 동관을 통과하여 장안성으로 진군했다. 세 갈래로 나뉜 토벌군은 삼면에서 동시에 총공세를 펼쳤다.
“공격하라!”
“서량의 역적들을 일소하라!”
7만의 군세가 새카맣게 밀려들었다.
삽시간에 장안성을 포위한 강철의 파도는 해일처럼 서량군을 삼켜버렸다.
장안성은 지난 공방전에서 요새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급히 쌓아올린 성벽을 와르르 무너트린 조조군은 한 줌도 안 되는 병력을 단번에 일소했다.
“조조군! 네놈들이 어떻게…!”
“잃어버린 장안성을 되찾으러 왔다!”
장안성을 지배하던 서량 세력이 조조군의 총공세에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현재 서량 연합군은 유언군을 몰아내고자 한양군에 병력을 집중시켰기에 공세에 매우 취약했다.
이틀 만에 장안성을 떨어트렸다.
무혈입성에 가까운 수준으로 장안성을 단번에 점령한 조조군은 성루들마다 군기를 꽂았다.
“장안성 백성들의 상태는 어떤가.”
이성휘가 물었다.
그에 순유가 착잡한 목소리로 답했다.
“굶어죽은 아사자들이 부지기수에…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백성들도 대부분 아사 직전이에요. 분명 오랫동안 방치해둔 것일 테죠.”
고질병처럼 물자부족에 허덕였던 서량 연합군이 백성들에게 구휼미를 베풀었을 리 없었다.
오히려 그들을 착취했겠지.
고혈을 쥐어짜내듯 마지막 남은 식량마저 강탈했을 게 분명했다.
아사한 백성들이 무려 수만 명에 이른다.
서량의 악몽이 만들어낸 굶주림의 참극에 조조군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군벌들이 식량들을, 농사에 쓸 종자까지도 모두 강탈했다고 해요.”
“흠.”
나지막이 침음을 내뱉었던 이성휘는 양수와 사마의를 호출했다.
곧이어 파릇파릇한 신참들이 서로 티격태격 다투면서 이성휘에게 다가왔다.
이제 친해질 법도 하건만,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말다툼을 벌여대고 있었다.
“중달, 이제 서량군이 어떻게 나올 것 같나.”
사마의에게 물었다.
그에 흑발을 늘어뜨린 소녀는 기고만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머지않아 한수가 마등을 담그려고 할 것 같음! 지금쯤 기회만 엿보고 있을 거임!”
한수가 마등을 칠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 말은 곧,
서량 연합군의 내분을 의미했다.
이성휘가 물음을 던지자마자 사마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확고한 목소리로 내분을 짐작하자 양수가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내분이라뇨? 한양군을 점령한 익주의 대군을 격퇴하기 위해 결집된 상태잖아요. 하나로 결집된 상태에서 내분이 벌어진다고요?”
갑자기 적들이 내분을 일으킨다니.
이치에 어긋나는 참언이다.
낭설에 가까운 형편 좋은 말에 불과했다.
사마의의 참언을 차신차의하던 양수는 놀라운 결집력을 보여주었던 관중제장이 한순간에 붕괴할 것이라는 말에 의문을 제기했다.
“쯧쯧쯧! 양덕조, 매우 무식함.”
“뭐라고요…?”
혀를 차면서 핀잔을 준 사마의가 양수의 크고 풍만한 젖가슴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히약-!
양수가 귀여운 비명을 내질렀다.
“학식주머니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공갈주머니였던 거임? 이미 한수가 단서를 줬잖음.”
“네?”
“사절단에 보낸 친필서한을 말하는 거임.”
“그게 뭐 어쨌다고….”
이성휘가 곧바로 태워버렸기에 사마의는 한수가 보낸 친필서한의 내용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마의는 한수의 의중을 파악했다.
어째서 한수는 관중제장이 반발하리라는 것을 알면서 사절단을 들였을까. 게다가 그는 마등과 관중제장과도 상의하지 않은 채 결정을 감행하는 강수마저 두었다.
“조정의 사절단에게 본인이 연합군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각인시킨 거임.”
“왜요?”
“그래야 교섭이 쉬워지지 않겠음.”
“교섭…? 감히 조정과 교섭을 치를 셈인가요? 장안성에서 수만 명을 죽였는데?”
연이어 물음을 던졌다.
의문의 연속이었다.
해답을 듣고 있음에도 계속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지금까지 한수는 스스로 맹주가 되었던 적이 없었음. 바지사장을 세워 막후에서 조종했을 뿐임. 당연히 학살의 악명은 마등에게 가해질 거임.”
한수는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다.
군재와 역량을 겸비하고 있으되,
결코 스스로 맹주임을 선언했던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한수의 행적에서 알 수 있다.
한수에 의해 우두머리로 추대된 북궁백옥과 왕국은 철저히 이용만 당하다가 희생되었다. 그 덕분에 한수는 마등과 대등한 세력을 가진 군벌로 성장했다.
“원래 마등은 한수의 휘하 장수였다.”
“네?”
“그런데 한수의 추대를 받고 맹주가 된 거지.”
이성휘의 말에 양수가 두 눈을 끔뻑 떴다.
마등이 한수의 부하였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서량에서 맹주 역할을 해온 마등이었기에 의아함을 느꼈다.
“학살의 오명을 마등과 관중제장에게 덮어씌우고서 귀순의 의지를 밝힐 셈이겠지. 서량의 지배자로 인정받는 것을 조건으로 말이다.”
황실과 조정으로선 황량한 이역만리를 정벌하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서량은 짐승들의 땅이다.
결코 중원의 통치와 복속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게다가 조조군에게도 대규모 정벌은 감행하기 어려운 위태로운 모험일 것이었다.
한수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서량 연합군의 맹주이자 장안성에서 학살을 명령한 주범으로 알려진 마등과 학살을 주도했던 관중제장을 희생하여 황실과 조정에 귀순하려는 비정한 중상모략을 꾸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