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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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의 조력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업성에서 탈출한 허유는 험준한 태행산맥의 산세를 의지하여 잠적해버렸다.
설마 허유가 태행산맥을 통과하여 병주로 도망쳤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원소군은 굴욕적인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 대가는 실로 처참했다.
원소는 곧바로 봉기에게 남양허씨 가문을 처형장에 세우도록 명을 내렸다.
“자원은 아직도 찾지 못했나요?”
탐스러운 금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날카로운 눈길로 급히 소집된 제장들을 힐문했다.
놈의 종적을 놓쳤다.
여전히 행방이 오리무중인 상태였다.
옥졸들을 살해하고서 도주한 허유의 작태에 원소가 비분강개를 휘둘렀다. 즉시 전령들을 모든 관문에 파견하여 허유를 잡아들일 것을 명령했다.
“송구합니다, 주군. 주변 군현들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사오나… 여전히 행방이 묘연할 따름입니다.”
맹대가 고개를 숙이면서 참담한 보고를 전했다.
치욕적인 일이다.
빈약한 문관 나부랭이를 잡아들이지 못하다니.
“주군, 벌써 두 달이 지났습니다. 계속 종적이 묘연한 것을 보면 잡아들이긴 어려울 듯합니다.”
어두운 표정을 한 심배가 말했다.
부정부패를 범한 간신이 달아났다는 소식이 만천하에 알려진다면 필시 웃음거리가 될 터였다.
아니,
지금쯤이면 조조군의 귀에 들어갔을 테지.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라면 소식을 듣고서 크게 비웃음을 터트리고 있으리라. 심배는 이를 빠득 갈면서 도망친 허유를 저주했다.
“그러면 일단 여기서 잠시 덮어두도록 하죠. 그 빌어먹을 간신에게 들이는 시간조차 아까우니까요.”
허유를 대신하여 남양허씨 가문을 멸족시킨 원소는 분개가 느껴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단념하기로 했음에도 여전히 앙금이 남은 듯했다.
“주군!”
치중종사(治中從事) 심배가 다가왔다.
그는 상심에 빠진 주군에게 희소식을 전했다.
“진압에 투입되었던 안량 장군과 문추 장군이 반란을 일으킨 군현들을 모두 탈환했다고 합니다!”
“다행이군요.”
조조군이 개입하기 전에 반란을 일으켰던 불온세력들을 속전속결로 진압했다.
조기에 불씨를 잡아냈다.
하마터면 조조군이 북상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더욱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허유의 탈주에 참담함을 드러냈던 원소는 하북사정주의 승전보로나마 잠시 안도할 수 있었다.
“정로장군의 동태는 어떤가요?”
원소가 물었다.
그에 맹대가 입을 열었다.
“위병들을 배치하여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주군.”
허유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원소는 국의를 의심하여 무관들을 급히 투입시켰다.
국의가 배후에 있을지도 모른다.
삭탈관직 이후부터 칩거를 이어나가고 있던 국의를 더욱 의심하여 경계를 강화했다.
전장에서 오랜 벗을 잃었기 때문일까.
순우경을 전장에 두고서 패주했던 국의를 노골적으로 미워했다. 증좌가 없음에도 국의를 의심했던 원소의 행동에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세력을 수습해서 맹덕과의 일전을 다시 준비해야 하는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날선 손톱으로 손등을 긁었다.
심연처럼 막막할 따름이었다.
정상까지 쉬지 않고 뜀박질을 하고 싶은데 계속 발목이 붙잡히고 있었다.
연이은 내환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원소는 극심한 편두통을 앓을 정도로 조급함을 느끼는 상태였다.
“주, 주군!”
심배가 놀라 소리쳤다.
주군이 돌연 미간을 찌푸리면서 관자놀이에 손바닥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극심한 편두통이 몰려왔다.
평소보다 고통이 극심했는지 식은땀을 흘렸다.
심호흡을 내쉬면서 편두통을 억누른 원소는 심배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깐 두통이 밀려왔을 뿐이에요.”
나는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다.
천하통일의 대업이 여전히 요원한데 편두통 따위에 굴복할 순 없었으니까.
연이어 칠난팔고를 돌파해야 했던 원소는 정신적인 공황에 직면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원소는 강대한 정신력을 발휘하여 꿋꿋하게 이겨냈다.
* * *
두 달 동안의 강행군으로 무사히 관서에 도달한 조정의 사절단은 곧바로 관중제장과 접선했다.
주부(主簿) 왕칙이 나섰다.
조심스럽게 죽간을 펼쳐들면서 황제의 칙명을 읽었다.
군막에 집결한 관중제장은 진서장군 한수의 의견대로 예를 취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형식적으로나마 황실과 조정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서량과 익주의 군사들은 즉시 전투를 중단하고 임지로 귀환하라. 양군은 대립을 종식시키고 서로 화해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조정은 유언군과 서량군에게 무조건적인 휴전을 명령했다.
수많은 장졸들이 죽었다.
아름답던 강산이 피와 시체로 뒤덮였다.
관서는 동탁이 집권하기 이전부터 다툼이 이어졌던 지역이었기에 하루라도 빨리 참화를 종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조정의 결단은 과연 어질고 훌륭한 의도였다.
현실성이 완전히 결여되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탁상공론으로 국정을 다스려온 조정대신들에게 어울리는 이상적인 결단이 아닐 수 없었다.
“결코 그럴 순 없소!”
“먼저 기습해온 쪽은 유언이란 말이오!”
관중제장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진서장군 한수가 경고를 보냈음에도 관중제장은 포악한 모습을 보이면서 사절단을 위협했다.
그들은 짐승이다.
오랫동안 굶주린 들개와 마찬가지였다.
황실의 위엄과 조정의 법도로 복속시키기엔 변방의 장수들은 너무도 과격하고 난폭했다.
힘과 욕망을 숭상하여 힘겨루기를 반복해온 서량의 장수들이 사절단의 종용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몇 배로 갚아줘야 마땅하오!”
“감히 조정은 익주의 늙은이를 옹호하는가!”
싸움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적이다.
어찌하여 저지하는가.
드디어 우리들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는데.
반강제적으로 화해를 종용하는 조정의 결단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사면초가에 봉착한 유언군을 은밀하게 도우려는 흉계일지도 모른다는 억측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무엄하다…! 감히 조정의 사절단을 핍박하는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분기탱천한 장수들의 모습에 왕칙이 놀라 소리쳤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이 아닌가!
화의는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놈들은 살육과 약탈 밖에 모르는 짐승이었다.
칼자루를 뽑으려는 관중제장의 모습에 사절단의 관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만! 이게 무슨 경거망동인가!!”
한수가 사나운 불호령을 내질렀다.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울렸다.
노발대발하여 소리치던 군벌들은 한수의 위세에 겁을 먹었는지 뒤로 물러났다.
“미안하오. 두 달 동안 이어진 장기전 때문에 다들 심기가 날카로운 상태라오.”
경거망동을 범한 관중제장을 대신하여 한수가 왕칙과 관료들에게 유감의 뜻을 밝혔다.
한수의 도움으로 짐승들의 위협에서 벗어난 사절단은 아연실색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실로 불쾌하군!”
한수의 위협에 물러섰던 관중제장은 불쾌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나 한수는 수많은 병마들을 거느린 군벌이었기에 어느 누구도 섣불리 나서진 못했다.
“장내가 소란스러우니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소.”
“그, 그리하시지요.”
사나운 짐승들이 득실대는 공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왕칙은 한수의 제안을 단번에 받아들였다.
* * *
대담하게 서량군의 둔영을 출입했던 조정의 사절단은 관중제장의 거센 반발로 인해 한수와 단독으로 담판을 지어야 했다.
하지만 성과는 있었다.
한수는 왕칙에게 보름 안으로 전장에서 철수하겠다는 약조를 보내왔다.
수많은 오해와 불만으로 악화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싶다는 친필서한까지 건넸다.
하마터면 관중제장의 반발로 빈손으로 돌아갈 뻔했던 왕칙은 한수의 친필서한으로 최소한의 체면만큼은 세울 수 있었다.
“대, 대장군!”
씁쓸한 심정으로 사예주로 귀환한 조정의 사절단은 중무장한 병력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관중의 토벌군이었다.
총 7만에 달하는 병력이 사절단을 맞이했다.
군기를 펄럭이면서 위풍당당한 용력을 발산하는 군단들의 모습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관서에서 돌아온 왕칙은 군단들을 지휘하던 이성휘를 마주했다.
“화의는 어찌 되었는가.”
대장군이 물었다.
그에 사절단의 대표가 대답했다.
“서량 장수들의 거센 반발로 화의가 무산될 위기에 봉착했습니다만… 연합의 수장과 교섭하여 화의의 뜻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유언군은 기별을 보냈음에도 계속 불응했던 탓에 접선하지 못했습니다.”
이성휘에게 설명한 왕칙은 애지중지하듯 품에 보관하던 한수의 친필서한을 내밀었다.
보름 안에 철군하겠다.
분명 서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왕칙으로부터 서한을 건네받은 이성휘는 그를 펼쳐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과연 왕칙의 말한 대로였다.
“언제부터 한수가 서량의 우두머리였지? 감히 주제도 모르고 교섭을 꺼내드는군.”
불쾌감이 감도는 목소리를 내뱉은 이성휘는 한수가 보낸 친필서한을 화로에 던져버렸다.
화르륵-!
시뻘건 불꽃이 종이를 불태웠다.
이성휘의 돌발적인 행동에 왕칙은 대경실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 대장군!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적의 우두머리가 보낸 친필서한을 불태우다니!
유일한 공적이었다.
화의를 성사시켰다는 유일한 증좌였다.
중차대한 증거를 다짜고짜 화로에 내던져버린 이성휘의 행동에 사절단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황실과 조정에 만행을 고하겠다며 목청을 높이기까지 했다.
“영예로운 주군께서 친히 은혜를 베푸셨거늘, 참으로 배은망덕하옵니다.”
잿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다가와 왕칙에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우리 대장군이 계속 진군을 늦추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은 끓는 기름에 내던져졌을 텐데요. 한신에게 속은 역이기의 일화를 아시죠?”
탐스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여인도 가세하여 섬뜩한 속삭임을 보내왔다.
한신. 역이기.
한나라의 관료가 어찌 모르겠는가.
특히 적대세력의 사절단으로 파견된 관료라면 누구나가 역이기의 일화를 알고 있으리라.
“화의는 실패했다. 그러니 철저히 함구해라.”
이성휘가 몸을 일으켰다.
왕칙에게 위협을 보낸 뒤,
한나라의 대장군은 군막을 나섰다.
바깥에는 여포와 장료가 지휘하는 병력들이 대장군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병장기로 무장한 장졸들은 중원을 제패한 숙련병이었다.
“지금부터 관중을 친다.”
대장군이 선포했다.
장안성을 탈환하라.
적들에게 빼앗긴 전(前) 수도를 수복하라.
엄중한 선포가 떨어지자마자 중원의 장졸들은 군기와 병장기를 치켜들면서 함성을 내질렀다. 수많은 병사들의 드센 고함소리는 산천초목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당연히 놈들에게 복수해줘야지!”
여포가 팔짱을 낀 채 웃음을 터트렸다.
서량의 빌어먹을 놈들.
기필코 놈들을 죽여 장안성의 원한을 갚을 것이다.
‘저게 바로… 천하제일검인가.’
여포와 동행했던 조운은 무심코 이성휘를 동경심에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압도적인 위엄.
두터운 신망과 절대적인 권위.
이성휘는 대장군의 소질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무인들의 정점에 올라선 효웅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조운은 경외를 가슴에 떠안았다. 분명 사내는 주군의 숙원을 방해하는 원수였음에도 어째서인지 동경과 경외의 감정을 품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