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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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범의 죽음에 분노하여 선전포고를 엄포한 유언군이 양주(凉州) 무도군(武都郡)을 관통했다.
서량 놈들을 죽여라.
분기탱천한 유언군은 앞을 가로막는 군벌들을 모조리 일소하면서 나아갔다.
이윽고 상방곡(上方谷)을 통과하기에 이르렀다.
“비천한 마적들을 죽여라!”
“놈들을 모두 죽여 공자의 넋을 달래주자!”
사분오열하여 흩어졌던 익주의 군현들을 모두 통일한 역전의 용장들이 모두 투입되었다.
고패. 냉포. 양회. 등현.
익주의 장수들이 병장기를 휘두르면서 전진했다.
이리처럼 달려드는 유언군의 맹공에 서량의 군벌들은 연전연패하여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한낱 오합지졸에 불과한 군벌들이 어떻게 익주 전역을 제패한 유언군을 이기겠는가.
“퇴, 퇴각하라!”
“빌어먹을…! 유언, 이 늙은이가!”
파상공세에 격파당한 무장집단은 군벌을 자칭할 뿐인 마적단에 지나지 않았다.
관청을 습격하고 백성들을 착취할 뿐이었던 마적들은 날카로운 병장기와 견고한 갑주로 무장한 드센 정예군단에 대패하여 흩어졌다.
“하, 항복!”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겠소!”
익주의 강대한 전력을 이길 수 없었던 서량 군벌들은 백기를 흔들면서 투항의사를 밝혀왔다.
그러나 비열한 암습으로 후계자를 잃었던 유언군은 관용을 베풀 생각이 전혀 없었다. 투항해온 포로들을 모두 처형하면서 악명을 떨쳤다.
“제장들은 처형을 멈추시오! 형님을 살해한 흉수들이 분명하게 밝혀진 것도 아니잖소!”
부친의 엄명으로 정벌군을 통솔하는 도독에 임명된 유탄이 대경실색하여 소리쳤다.
전장에서 수천 명을 도륙했다.
뒤이어 그 두 배가 넘는 포로들까지 도살했다.
유탄은 조정에서 관직을 역임하다가 유언의 부름을 받고서 성도로 돌아온 백면서생에 불과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익주의 공자는 참혹한 광경을 보고서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저들은 유탄 공자의 원수입니다!”
“분명 암습에 가담했던 흉수가 있을 겁니다!”
비겁한 암습에 살해된 것으로도 모자라 산짐승에게 먹히는 치욕마저 당했다.
진흙탕에 내던져진 익주의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서량 놈들을 진멸해야 마땅했다.
상방곡을 통과하여 천수군에 도달한 유언군은 잔인한 응보를 펼쳤다. 마등과 한수에게 협조했던 호족들을 모두 처형해버렸다.
다음은 네놈들이다.
마등과 한수를 향한 선전포고였다.
유언은 장남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흉수들이 마등과 한수라고 여겼다. 소중한 후계자를 잃은 유언군은 서량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마등과 한수를 위협했다.
* * *
패주(敗走). 전멸(全滅).
한양군에서 발생한 참혹한 소식이 마등군과 한수군에 전해졌다.
충격적인 비보였다.
어떻게 이런 참사가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소스라치게 놀란 마등은 제장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선전포고를 엄포하자마자 파상공세를 개시한 유언군에게 위기감을 느낀 것이리라.
“유범이 죽다니! 대체 유범이 왜 죽었단 말인가?!”
익주목 유언의 장남이 정체불명의 흉수들에게 살해당했다. 소식을 접한 마등은 심복들을 동원하여 진범을 찾도록 명령했다.
유언에게 배후로 지목되었지만 마등은 전혀 무관한 입장이었다. 한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른 군벌의 소행임이 분명했다.
익주로 귀환하는 유언군의 물자들을 탈취하고자 벌인 암습이었으리라.
“놈들에게 한양군이 떨어졌습니다!”
“우리를 돕던 호족들을 모조리 색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휴와 마철이 소리쳤다.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
유언군의 파상공세를 계속 좌시한다면 세력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질 터였다.
최대한 빨리 반격에 나서야 한다.
오해에서 비롯된 참극이더라도 계속 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마휴와 마철은 한수군과 연합하여 유언군을 격퇴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제 의견도 마찬가지예요. 이대로는 다른 군현들까지도 잃게 될 거라고요. 저돌적으로 날뛰는 유언군을 먼저 격퇴해야 돼요.”
동생들의 의견에 가세하듯 마초도 부친에게 결단을 종용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유언군은 한양군을 공격함으로서 아군과 결코 화해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세력의 존립을 위해서라도 유언군과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세력을 함양으로 옮기지 않았느냐. 지금부터 전쟁을 준비하더라도 시일을 맞추기는 어렵다.”
마등이 탁상을 두드리면서 무거운 침음을 삼켰다.
동관에서 철수한 이후,
장안성과 인접한 함양(咸陽)으로 거점을 옮겼다.
서량에서 관중으로 세력권을 옮기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 마등군은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다. 소집령을 선포하더라도 겨우 1만에 불과할 터였다.
“일단 제가 영명과 기병부대를 이끌고 한양군을 지원할게요.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거예요.”
소극적인 행보만을 보인다면 아군을 지지하는 호족들이 모두 부화뇌동에 휩싸일 것이다.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세력이 와해될지도 모른다.
“어서 숙부에게도 연통을 넣으세요.”
“그래, 알겠다.”
참화에 휩싸인 군현은 한양군만이 아니다.
농서군(隴西郡). 금성군(金城郡).
유언군의 공세에 차례대로 무너지리라.
양주와 옹주 일대를 모두 장악하여 서량의 왕이 되고자 했던 마등의 야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오랜 야망이 무너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던 마초는 방덕과 함께 유언군을 저지하려 했다.
* * *
사예주를 침탈했던 역적들이 서로 반복하여 치열한 내전을 벌이고 있다.
마침내 한양군을 급습했다.
유언군과 서량군의 충돌이 더욱 극심해진 것이다.
세작들로부터 급보를 접수한 군사좨주 곽가는 유언군과 서량군이 서로 자멸하게 되리라고 예견했다. 조조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어부지리였다.
“황실과 조정은 중재를 원하더군.”
“…예, 그럴 겁니다.”
조조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이성휘는 쓴웃음을 머금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툼을 중재해야 한다.
반목을 청산하고 화의를 도모해야 한다.
과연 도덕과 인의를 중시하는 청류파들에게 어울리는 의견이었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세력들을 화해시킴으로서 황실과 조정의 위엄을 보여주겠다는 의도인 듯했다.
“일단 한나라의 승상이니 조정의 공론을 따르는 모습은 보여줄 걸세.”
흑발의 여인이 섬섬옥수처럼 예쁜 손가락을 뻗으면서 접시 위의 알록달록한 경단을 집었다.
그리고 이성휘에게 내밀었다.
“현명한 처결이십니다.”
이성휘가 입을 벌리면서 경단을 물었다.
조조가 손가락을 내미는 장난을 친 탓에 예쁜 손가락까지 입술에 물게 되었다.
쪽-.
아내의 손가락을 빨았다.
그러자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화해를 주선하더라도 마등과 한수에게 선전포고를 가한 유언군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으니까요.”
익주목 유언은 체면과 자존심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인물이다.
비천한 마적에 불과한 군벌들에게 소중한 후계자를 잃었으니 그 분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터. 마등과 한수를 끝장내지 않는 한은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
“그게 내 바람일세.”
“예?”
“전쟁의 명분으로 매우 합당하지 않겠나.”
“…….”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황제의 중재에도 전쟁을 멈추지 않는 것은 황명을 거역한 대역죄일세. 마등과 한수, 유언을 모조리 쓸어버릴 좋은 명분이지.”
유언.
마등과 한수.
놈들을 일거에 소탕한다.
조조는 결코 장안성의 치욕을 잊지 않았다.
항전에 가세한 장안성의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던 학살극을 평생의 치욕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조는 유언군과 서량군의 양웅상쟁을 명분으로 내세워 전선에 개입하려 했다.
“본초는 움직이지 않을 걸세. 자중지란을 정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 말이네.”
“지금이 마등과 유언을 칠 절호의 기회군요.”
“마등군과 유언군을 당장에 멸망시키진 못하더라도 절멸적인 피해는 줄 수 있겠지.”
“원소군과의 연계를 봉쇄하기 위함이군요.”
“정답일세.”
자신의 의중을 재빠르게 이해하는 이성휘의 모습에 조조가 빙그레 웃음을 터트렸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했던가.
한마음 한 몸.
과연 자신과 성휘는 천생연분이었다.
“그런데 말일세, 성휘.”
사랑스러운 남편에게 자애로운 모습을 보이던 조조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분위기가 급변했다.
봄바람처럼 훈훈하던 분위기가 마치 날카로운 칼바람처럼 변한 것 같았다.
“목덜미에 그 자국은 뭔가?”
“……!”
붉은 입술연지.
달콤한 홍화꽃 향기가 흘러나왔다.
이성휘의 목덜미에는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입술자국이 선명하게 존재했다.
“이리로 와보게.”
“예?”
근엄한 표정을 지은 흑발의 여인이 손을 쭉 뻗으면서 이성휘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 뒤,
이성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킁….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붉은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내면서 추궁하기 시작한 아내의 심문에 이성휘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이 색분 냄새는… 원양이군.”
“…….”
날카로운 지적에 숨이 멎는 듯했다.
이렇게 긴장한 적이 또 있을까.
불륜행각을 벌였던 내연녀들을 낱낱이 고했다가 얻어터졌을 때에 준하는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성휘.”
“…예.”
“당장 관중으로 꺼지게.”
아내로부터 싸늘한 독설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