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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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완패를 당한 원소군은 급히 위군(魏郡)으로 귀환하여 세력을 수습했다.
완벽(完璧)이 무너졌다.
흠이 없던 패옥(佩玉)에 금이 생기고 말았다.
백마장군 공손찬을 진멸하여 하북의 패자에 등극한 원소는 절대적인 상징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번 완패로 인해 완벽을 추구하던 원소의 고아한 위상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도독(都督) 저수를 엄벌해주십시오!”
“책략을 고안했던 전풍 또한 죄가 큽니다! 분명 극형이 마땅할 것입니다!”
정쟁에서 밀려났던 관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전풍과 저수를 규탄했다.
연주에서 대패를 당하지만 않았어도 전장에서 그토록 허무하게 완패하진 않았으리라.
내정과 병권을 주관했던 전풍과 저수가 무너지기만을 기다렸기에 거침없이 물어뜯었다. 입에 거품을 물며 탄핵을 유도했다. 지방의 사대부와 호족들을 동원하여 상소문을 제출하도록 지시하기까지 했다.
‘기주파(冀州派)를 몰아낼 절호의 기회다!’
‘결국 패전의 책임을 피할 순 없을 터…! 기주 놈들을 이 기회에 모두 청산하겠다!’
절멸적인 완패로 세력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했음에도 승냥이처럼 교활한 관료들은 정쟁에만 몰두할 뿐이었다.
적대파벌을 몰아낼 기회다.
혼신의 힘을 다해 상대를 물어뜯었다.
치졸한 중상모략이 난립하는 수많은 파벌들 중에서 곽도와 신평의 영천파(穎川派)가 두각을 드러냈다. 예주 영천군 출신으로 구성된 영천파는 계속 이 절호의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 준동을 이어나갔다.
“전풍과 저수를 하옥하세요. 추후에 책임을 묻도록 하겠어요.”
중신들에게 패전의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원소는 결국 하옥을 결정했다.
전풍과 저수가 삭탈관직과 함께 하옥되자 집요하게 물어뜯었던 관료들이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드디어 놈들이 쫓겨났다.
주도적인 중임을 도맡았던 기주의 명사들이 실각되기만을 기다렸기에 파벌들은 기주파의 몰락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적의 고육지책이 넘어가다니…! 실로 한심한 작자들입니다!”
“죄목들을 상세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연주자사 장막의 고육지계에 넘어가지만 않았어도 결코 이러한 치욕은 없었을 겁니다!”
동승의 반란.
연주 사대부와 호족들과의 내통.
별가종사 전풍은 세작들을 동원한 장기간의 노력으로 조조군을 사면초가에 몰아넣는 성과를 달성했음에도 결국 패전의 원인으로 내몰렸다.
“우선 정국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가!”
날카로운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뒤이어 중년 남성이 갑주를 걸친 장수들과 함께 회의장에 들어섰다. 남성의 등장에 음해와 모략을 반복하던 관료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치중종사(治中從事) 심배.
그의 등장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주군, 배은망덕한 무리들이 감히 조조군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제장들을 급히 전선에 투입하여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소서.”
원소군의 완패에 혼비백산한 하북의 사대부와 호족들이 일제히 조조군에 투항했다.
결속이 흔들리고 있다.
지배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반란의 불씨가 하북 전역으로 확산될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심배는 제장들을 거느리고서 원소에게 간곡히 진언했다.
“크흠.”
“심배… 이놈.”
갑주를 무장한 장수들의 등장에 정쟁에만 몰두하던 관료들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창검을 동원하여 자신들을 압박하는 심배의 속셈에 이를 빠득 갈았다. 하지만 심배는 원소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참모였기에 섣불리 도모하기 어려웠다.
“반란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요?”
“불과 수천에 불과합니다. 기병부대를 투입하여 진압에 나선다면 속전속결로 끝장낼 수 있을 겁니다.”
조조군에게 투항한 하북 사대부와 호족들의 반란에 원소는 다급함을 느꼈다.
규모는 불과 수천에 불과하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두려움의 확산이었다.
두려움은 역병처럼 수많은 군중들에게 확산된다.
철옹성과도 같았던 지배와 단결에 위태로운 균열들이 생겨났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계속된 균열로 인해 지배와 단결은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질 터.
속전속결을 주문한 심배의 진언은 매우 타당했다.
“안량. 문추.”
금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랜 고민을 끝낸 듯,
날선 목소리로 도독들에게 명령했다.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고 불순분자들을 업성으로 압송하세요.”
“명을 받들겠습니다!”
원소는 조조군에 호응하여 반란을 주도한 사대부와 호족들을 일벌백계로 다스리려 했다.
두려움에는 더 큰 공포로 대응한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완패의 공황을 단기간에 극복한 원소는 절치부심하여 재기에 도전하려 했다.
절멸적인 패배를 당했음에도 야망의 불길은 거침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천하통일의 위업을 기필코 완수하겠다는 불굴의 정신이 계속 그녀를 재촉했다.
“제관들은 이제 그만 물러나세요.”
“하오나 주군…!”
부조종사(簿曹從事) 신평이 원소의 엄명에 입을 열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살벌한 노여움이었다.
“패전의 책임이 있는 전풍과 저수를 모두 삭탈관직한 뒤 하옥하지 않았나요. 제 결정에 감히 이의를 제기할 셈인가요, 중치.”
분기를 억누르면서 관료들의 요청에 따라 중신들을 배제한 원소가 살의를 드러냈다.
벼슬과 품계를 압수했다.
관원의 명단에서 이름을 지우기까지 했다.
충성스러운 중신들을 차가운 감옥에 수감하는 쓰라린 결단마저 내렸다.
여기서 더 무엇을 감내하란 말인가?
주군을 손바닥에 올려둔 것처럼 천지분별을 못하고 준동하는 관료들의 작태에 무거운 압력을 걸었다.
그에 신평은 역린을 건드렸음을 깨닫고는 아연실색하여 물러났다.
‘한 번의 패배로 제가 굴복하리라고 예상했다면 큰 착각이에요, 맹덕. 저는 천하도, 성휘도…! 어느 무엇도 당신에게 양보하지 않을 테니까요.’
넘어졌으면 일어서면 된다.
패배했으면 다시 재기하면 된다.
어느 무엇도 포기하지 않기에 좌절하지 않는다.
천하통일의 위업도,
진심으로 연모하는 사내도.
결코 빼앗긴 채 주저앉지 않으리라.
불굴의 각오로 야망을 재확인한 원소는 하북사정주를 급파하여 세력을 규합했다. 변절한 사대부와 호족들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서 하북의 패자가 건재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렸다.
* * *
숙부 제갈현과 낭야국을 떠난 제갈량은 양안군에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황제가 황태제에게 양위했다.
사공 조조는 승상이 되었고,
표기장군 이성휘는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연쇄적으로 날아든 급보에 제갈현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설마 황제가 돌연 양위를 선언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터였다.
“너,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구나…! 황상께서 결국 옥좌에서 내려오시다니.”
당혹감에 접어든 것은 제갈현과 동행하던 낭야국의 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여남군과 이웃하고 있는 양안군에 접어들자마자 급보를 들었다. 서주 상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는 허도의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정말 의외네요. 조조와 이성휘가 승상과 대장군에 임명되리라는 예상했지만… 설마 곧바로 양위가 결정될 줄이야. 왜 그랬을까요?”
수레에 걸터앉아 심사숙고를 거듭하던 은발의 소녀가 입을 열었다.
부자연스럽다고 할까.
분명 조조의 의중은 아닐 것이다.
전쟁에서 완승을 거두자마자 곧바로 양위를 선포하여 황제를 교체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한 조조라고 하더라도 너무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이었다.
“새로운 만승천자를 추대함과 동시에 일등공신으로서 승상과 대장군에 등극…. 절묘하게 포장된 그림처럼 보이면서도 뭔가가 이상하네요.”
청려한 방울꽃처럼 귀여운 소녀가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본인의 생각을 중얼거렸다.
“조조의 강압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양위를…. 설마 본인이 직접 양위를 결정한 건가? 줄곧 재롱을 떨던 꼭두각시가 무슨 바람이 불었대.”
아름답고 귀여운 얼굴로 독설을 내뱉었다. 마치 가시덤불을 연상하게 하는 말투였다.
“크흠! 꼭두각시라니…. 누가 들을까 무섭구나.”
“네, 말조심할게요.”
숙부의 제지에 제갈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불안했는지,
제갈현은 우려스럽다는 눈길을 보냈다.
악명 높은 독설가로 군림하면서 동문수학하던 학당의 급우들을 모두 울려버린 조카딸이 아닌가. 허도에서도 혹시 물의를 일으킬까 걱정스러웠다.
“재야의 야인처럼 학문에 열중하던 네가 세간에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구나. 드디어 입신양명을 선택한 것이냐?”
“그런 셈이죠.”
“정말…! 정말 감개무량하구나! 형님께서 네 모습을 보셨어야 하는 건데…!”
외진 군현에서 미관말직을 역임해온 제갈씨 가문이 마침내 천하에 명성을 떨칠 때가 왔다.
제갈현은 조카들에 대한 기대가 컸다.
서주의 명사들로부터 장래가 기대되는 인재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조카들이 언젠가 출세하여 제갈씨 가문의 명성을 만천하에 떨치리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조정의 관원이 되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 아니겠느냐. 조정에 임관하는 것이 제갈씨 가문의 오랜 숙원이자 염원이니 말이다….”
감정이 북받쳤는지 제갈현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군승(郡丞)이나 현위(縣尉) 같은 미관말직에만 그쳤기에 낭야제갈씨 가문은 이른바 ‘말뼈다귀’를 못 벗어나는 한미한 집안이었다.
그렇기에 제갈현은 조카들이 한미한 낭야제갈씨 가문의 반석처럼 세워주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