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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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변이 태상황으로 물러나자 왕윤은 곧바로 조정에 사직(辭職)을 요청했다.
노쇠하여 기력이 없다.
이제 그만 재야로 떠나고자 한다.
황실과 조정을 오랫동안 보필해온 충신이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격한 파동이 몰아쳤다.
“사도!”
“어찌 우리들에게 아무 말도 없이…!”
조정대신들이 급히 저택으로 찾아와 왕윤에게 의중을 물었다.
혹시 패국조씨 가문의 압력이 가해진 게 아닌가.
왕윤의 오랜 벗이었던 조정대신들은 패국조씨 가문과 정쟁이라도 치를 것처럼 격앙된 모습을 보였다.
지금까지는 패국조씨 가문의 결정에 고분고분 따랐으나 만약 청류파의 영수를 재야로 몰아내려 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결사반대를 외치는 한이 있더라도 패국조씨 가문에 맞설 것이었다.
“그런 일은 없네. 이제 노쇠하여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질 못하니… 그만 물러나려는 것일세. 젊은 황상께서도 태상황으로 물러나지 않으셨는가?”
“…사도.”
쓰라림이 느껴지는 왕윤의 말에 상서복야 사손서가 침음을 삼켰다.
병마들을 이끌고 반란군을 진압했던 괄괄한 노장이 어찌하여 이리도 약한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숙연함이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어찌 다들 슬퍼하시는가? 반란군을 정벌하여 일등공신에 책봉되는 영예를 누리고 사직하는 것일세. 한나라의 신하로서 이보다 더한 영예가 어디 있겠나.”
반란을 진압하여 한나라를 구원했다.
충분하다.
더 이상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수많은 전장들을 누비면서 한나라를 위협해온 반란군을 진압했다. 또한 하진의 부름을 받고서 조정대신이 되었을 때는 황실과 사직을 위해 견마지로를 아끼지 않았다.
지금까지 앞을 향해서만 달려왔다.
그러니 이제…,
노쇠한 몸을 눕히고 싶었다.
“사도, 그러면 저희들도…!”
“자네들이 모두 떠나버리면 조정은 누가 지킨단 말인가? 새로 즉위한 황제 폐하께서 계시지 않나!”
함께 사직서를 제출하겠다는 조정대신들의 말에 왕윤은 짐짓 노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윤의 날카로운 호통에 조정대신들은 침음을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수, 숙부님!”
조정대신들이 물러나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들과 조카들이 들어왔다.
아들 왕개, 왕경정.
조카인 왕신과 왕릉이었다.
오랫동안 청류파의 영수를 역임해온 아버지가 물러난다는 소식에 황망함을 금치 못했다. 아들과 조카들은 숙연함을 품은 표정을 지으면서 어깨를 떨었다.
“아버지께서 물러나시면 이제부터 태원왕씨 가문은 어찌합니까…!”
장남 왕개가 물었다.
그에 왕윤이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너희들이 모두 조정의 관료로서 국은을 받고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더냐? 이제 너희들이 태원왕씨 가문을 이끌어야 한다.”
낙양에서 탈출하여 조조군에 합류했던 태원왕씨 가문은 벼슬과 봉토를 하사받았다.
아들과 조카들이 모두 조정을 보필하는 관료였기에 왕윤은 망설임 없이 고관대작에서 사직할 수 있었다.
“슬퍼하지 말거라. 어느덧 예순을 바라보는 고령이 되었으니 물러나는 것이다.”
새로운 인재들에게 후일을 맡기고서 물러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이치였다.
미련과 아쉬움이 잔존했다.
그러나 심사숙고를 다한 끝에 사직하고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크흑!”
“수, 숙부님…!”
아들과 조카들이 오열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황실과 조정을 부흥시키고자 사력을 다해 노력했던 충의지사의 사직에 눈물을 쏟아냈다.
“아버지.”
아들과 조카들이 나간 뒤,
효심이 지극한 수양딸이 들어왔다.
어린 아들을 꼭 안은 채였다.
두 눈을 또랑또랑하게 반짝이면서 할아버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손자의 순진무구한 모습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사도 어르신.”
뒤이어 태원왕씨 가문의 저택에 도착했던 이성휘가 안채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소식을 접했는지 이성휘 또한 다른 이들처럼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네까지 왔는가? 허허, 많이 바쁠 터인데.”
대장군으로 등극한 사위가 장인어른을 걱정하여 한걸음에 달려왔음에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예순을 바라보는 늙은이가 노환으로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 무슨 큰일이라고 이렇게 모인단 말인가.
하지만 싫진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인생을 아주 헛되게 살지는 않은 듯했다.
“아무리 봐도 너를 꼭 닮았구나.”
왕윤이 웃으면서 손자의 뺨을 쿡 건드렸다.
이성휘와 초선의 아들,
이현이 두 눈을 끔뻑이면서 입술을 움츠렸다.
먹이를 달라며 사람을 졸래졸래 뒤따르는 다람쥐를 보는 듯했다. 다소 무거운 분위기였음에도 울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우리 현이가 크면 반드시… 외할아버지가 엄청 대단한 분이셨다고, 그렇게 말할 거예요.”
“허허, 과찬이구나.”
“아버지는 한평생 황실과 조정을 위해 외롭고 고단한 싸움을 해오셨잖아요. 제가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듯… 현이도 언젠가 장성하면 할아버지를 영예로운 충신으로 기억할 테니까요.”
“…고맙다, 선아야.”
정성스러운 효심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기특한 딸이다.
자신에게 과분할 정도의 효녀였다.
금지옥엽처럼 키운 수양딸과 귀여운 손자를 응시한 왕윤은 충만한 안도와 만족감을 느꼈다. 과분할 정도의 행복한 결말을 이루었노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 * *
수양딸과의 담소를 끝낸 왕윤이 몸을 일으켰다.
당부의 말이 아직 남았는지,
왕윤은 사위와 함께 정원을 나란히 거닐었다.
쌓아두었던 미련과 아쉬움을 홀가분하게 툴툴 털어낸 왕윤은 뒷짐을 진 채로 허허 웃으면서 이성휘에게 입을 열었다.
“그간 자네와는 많은 일들이 있었지.”
“예, 그렇습니다.”
“나와 내 아들을… 조카들을 불바다가 된 낙양에서 구출해주어 고맙네. 자네는 사위이기 이전에 우리 가문의 은인일세.”
“응당 해야 될 일이었습니다.”
겸손함을 일관하는 이성휘의 모습에 왕윤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머지않아… 역천(逆天)을 행할 생각이겠지.”
“예?”
“한나라의 4백 년 사직을 내리고 새로운 나라를 열 것이냐는 말일세.”
“…….”
왕윤은 조조의 야망이 결국에는 한나라를 흔적조차 남김없이 불태우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조의 반려이자 오랜 조력자였던 이성휘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려고 했다.
“오래 전에 태상황께서 내게 말씀하셨네. 도탄지고에 빠진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사직을 포기할 것이라고 말일세.”
“정말 그런 말씀을 하셨단 말입니까?”
“나도 얼토당토않은 말이라고 생각했네. 하지만 태상황께서는 진심이셨지. 중원을 평정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 승상을 보고서 그리 판단하신 것 같더군.”
암군들의 전횡과 향락으로 반백년이 넘도록 백성들은 도탄지고에 시름해야 했다.
선황들이 저지른 폐단이 불러일으킨 재앙들을 목격한 유변은 황실에 회의감을 품었다. 백성들을 보살펴야 할 황실이 도리어 숨통을 조르고 있음에 비통함을 금치 못했다.
“태상황을 오래 보필해온 영향인지… 언제부터인가 나도 그 생각에 감화되었다네. 백성들이 흥겹게 대풍가를 부르면서 태평성대를 즐길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되도 상관없다고 말일세.”
백성들을 위해 스스로 꼭두각시 역할을 받아들였던 젊은 황제를 보고서 깨달았다.
완고하고 고지식한 성정의 자신이었다면 결코 납득하지 않았겠지. 어쩌면 동승과 공융에게 가세하여 패국조씨 가문을 쓰러트리기 위한 반란을 도모했을지도 모른다.
쓴웃음을 흘렸다.
애석함에 물든 쓸쓸함이 깊게 묻어나왔다.
“나도 많이 늙은 모양일세. 충성과 정의를 계속 고집해온 내가 삿된 회한을 품게 될 줄이야. 이제 정말로 내려올 때가 된 게지.”
“그럼 이번에 사직하신 것은….”
“역심에 가까운 마음을 품어버린 내가 어찌 떳떳하게 조정에 설 수 있겠나.”
그렇기에 반평생 봉직해온 조정을 떠났다.
후회는 없었다.
이미 몇 번이고 각오한 일이니.
파란만장했던 지난날을 잠시 회상한 왕윤은 쓸쓸함을 머금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성휘에게 말했다.
“부디 어린 폐하를 지켜주게. 폐하 말일세.”
“…예, 물론입니다.”
왕윤의 부탁에 이성휘는 유변이 간곡하게 부탁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분명,
황제 또한 똑같은 말을 했었다.
부디 여동생을 지켜달라는 오라비의 부탁이었다.
조정에서 사직한 노신과의 대화들을 통해 이성휘는 그제야 유변의 진의를 깨달았다.
‘그저… 지켜달라는 말이었나.’
황실이 없어져도 상관없다.
사직이 무너지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무능한 오라비를 둔 탓에 무거운 중압감을 두 어깨에 짊어지게 된 아이를 지켜만 달라.
황위를 여동생에게 물려주던 당일까지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했던 유변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그에 이성휘는 주먹을 움켜쥐면서 입가를 바르르 떨었다.
“목숨을 바쳐 태상황의 마지막 황명을 이행할 것입니다.”
“고맙네. 정말… 정말 고맙네.”
왕윤이 하염없이 이성휘에게 감사를 전했다.
결코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모든 황명들을 훌륭하게 완수했다.
충의지심과 겸인지용을 겸비한 무장을 사위로 맞이하여 영광이었다. 재야로 떠나기로 선택한 왕윤은 믿음직한 사위의 모습을 한참 동안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