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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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후(華陰侯) 동승과 귀비 동씨의 일으켰던 반역으로 황실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황제의 장인과 후궁이 관여된 사건이었기에 당연히 그 여파가 황실에 미치는 것은 당연했다.
황제에게도 책임이 있다.
지금껏 역적들을 비호했던 것이 아닌가.
패국조씨 가문을 추종하는 관료들은 황제에게 책임을 묻는 상소문을 집단으로 올렸다. 상소문들은 상서령 순욱에 의해 제지되었다. 그러나 불온한 풍문들이 황제의 귀에 전해지는 것까진 막아내지 못했다.
“이제… 양위를 해야 할 것 같소.”
창백함을 얼굴에 머금은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체념에 잠긴 한숨을 내뱉었다.
동승과 동귀비가 반역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간파하지 못했다. 허수아비 역할에만 안주했던 나머지, 장인과 후궁이 반역을 모의하고 있음도 모르는 얼빠진 인간이 되고 만 것이었다.
“폐하! 어찌 그리 황망한 말씀을 다시 하시옵니까!”
사도(司徒) 왕윤이 통곡하듯 소리쳤다.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분명 황제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반역에 간접적으로 연루되었다고 하여 만승천자에게 양위를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황실의 총애를 등에 업은 간신과 독부가 대역무도하게 폐하의 혜안을 가렸을 뿐이옵니다! 어찌 폐하께서 그들의 대역죄를 짊어지려 하시옵니까!”
“그들의 역심을 간파하지 못하여 허도에 끔찍한 분란을 몰고 왔소.”
수많은 장졸과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궁궐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성문에서는 공방전이 치러졌으며,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렸던 시가지에서는 살육이 낭자하는 끔찍한 시가전마저 벌어졌다.
조조가 이룩한 태평성대를 지지하여 지금까지 굴종적인 모습을 보였던 유변은 도리어 자신의 무능이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폐하….”
공허함이 감도는 유변의 눈빛을 본 왕윤은 결국 마지막 의지마저 꺾였음을 깨달았다.
모친과 숙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만승청자에 즉위한 청년은 본인의 의지로 양위를 결정했다.
“부디 사도께서 모든 관료들을 설득해주시오. 이미 황제는 결심을 굳혔다고 말이오.”
“…예, 알겠사옵니다.”
그 어떤 무슨 위로와 설득으로도 실의에 빠진 황제의 결정을 돌이키지 못하리라. 왕윤은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신은 그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조정대신들을 설득하고자 왕윤이 물러났다.
그 뒤,
유변은 홀로 남게 되었다.
심중의 착잡함을 달래고자 아름다운 연못과 화사한 꽃밭들이 펼쳐진 내원(內院)으로 향했다. 쓸쓸한 눈길로 아름다운 풍경을 응시하던 유변은 이윽고 두 번째 내객을 맞이했다.
“부르셨습니까.”
천하에서 가장 총애하는 무관이 도착했다.
표기장군 이성휘였다.
황제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서 전각에 발걸음 했다.
낙양에서 보았을 때와 일말도 달라진 적 없는 이성휘의 모습에 유변이 쓴웃음을 흘렸다. 무거운 자괴감이 섞인 고독한 쓴웃음이었다.
“표기장군.”
“예, 하명하십시오.”
이성휘가 고개를 숙이면서 유변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유변은 이성휘에게 하명을 내리고자 부름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
“정말 미안하네! 그대에게 정말 면목이 없네…!”
“폐하?”
만승천자가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듯,
창백한 낯빛으로 무거운 죄책감을 토로했다.
돌발적인 유변의 행동에 이성휘는 대경실색하듯 어깨를 떨었다. 황제가 일반 범인들처럼 고개를 숙이면서 사죄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참담한 소식을 들었네. 귀비가 살수들을 동원하여 자네와 사공의 어린 아들과 딸을 죽이려 했다고….”
“…….”
“만약 장졸들이 사력을 다해 참사를 막아내지 않았다면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졌을 걸세. 귀비의 역심을 간파하지 못했던 짐의 책임이 크네.”
“…….”
이성휘은 차마 유변의 말에 “괜찮습니다.” 라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린 아들과 딸이 죽을 뻔했다.
천하에 어떤 부모가 그것을 태연하게 넘길 수 있겠는가.
은연중에 유변을 원망하고 있었기에 이성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입을 다물고서 불편한 침묵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책임을 사무치게 통감하여… 양위를 결정했네.”
“폐하.”
“부디 책임을 짊어지게 해주게.”
“…….”
오만불손한 사대부와 호족이었다면 본인은 결코 몰랐다며 철면피처럼 책임을 회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변은 정반대였다.
고개를 숙이면서 자신의 책임을 통감했다.
작고 어린 생명들이 하마터면 잔인무도한 살육극에 휩쓸릴 뻔했음에 자괴감을 토해냈다.
“폐하!”
유변이 평생의 은인이자 총애하는 무관에게 진심어린 사죄를 하고 있었을 때,
금발을 늘어뜨린 소녀가 달려왔다.
작고 가냘픈 황실의 꽃,
황태제(皇太弟) 유협이었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달려온 유협은 격앙된 표정으로 오라비를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양위를 하시겠다니요…!”
울먹이는 목소리를 부르짖은 유협이 오라비의 옷깃을 애절하게 붙잡았다.
황위를 내려놓고서 물러나겠다는 유변의 결정에 황망함을 내비쳤다. 작은 황태제는 어머니를 잃은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면서 오라비의 품에 매달렸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오라버니…!”
이복오빠의 눈동자에 담긴 공허함을 목격한 유협이 슬픔을 쏟아냈다.
나 때문이다.
내가 계속 양위를 막았기에….
고집불통 같은 억지가 결국에는 오라버니를 정쟁의 희생양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때 순조롭게 양위가 이뤄졌더라면 동승과 동귀비가 발호하는 참사는 없었겠지. 마음을 도려내는 듯한 배신감에 무너지는 일 또한 없었으리라.
“흐윽, 흐으윽…! 흐아아앙…!!”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너무도 착한 오라비에게 미안한 마음을 쏟아냈다.
오라비는 황제에 어울리지 않는 재목이다.
그것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음에도 계속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에는 오만함으로 인해 허도가 피비린내로 뒤덮이고 말았다.
“오라비야말로 미안하다. 너에게 결국, 결국 무거운 짐을 떠맡길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의 무능함이 너무도 원망스럽다…!”
수많은 생명들이 죽었다.
장졸들이 난전 중에 전사했고,
백성들은 도피하던 중에 창검을 맞고 쓰러졌다.
나약하고 무능한 황제가 계속 옥좌를 이어나간다면 더 큰 혼란이 허도에 찾아올 터였다.
무지와 무능함이 불러온 참극을 결코 묵과할 수 없었던 유변은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양위하기로 결심했다.
“자네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게 후안무치한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부디 협이를 잘 부탁하네. 매번 자네에게는 몰염치한 부탁만을 하는군.”
“성심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여동생을 끌어안은 유변이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을 남겼다.
그에 이성휘는 가슴에 손을 얹으면서 대답했다.
반드시 지키겠다.
설령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까지 그러하였듯 앞으로도 성심성의를 다해 보필하겠노라고 오랜 벗에게 약속했다.
* * *
황제 유변이 결국 양위를 결정했다.
황태제 유협을 즉위시킨 뒤,
본인은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조정대신들이 격렬하게 반대했으나 사도 왕윤과 상서복야 사손서의 간원으로 조정의 승인을 받아냈다.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만세삼창과 함께 금발을 늘어뜨린 소녀가 화려하게 치장된 황포(黃袍)를 걸친 채 대궐에 들어섰다.
좌우에 도열한 고관대작들은 목패를 높게 치켜들면서 황제의 즉위를 하늘에 천명했다. 구름처럼 수많은 관료들이 몰렸음에도 새로운 황제는 용감하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승상(丞相) 조조, 충의지심으로 폐하를 보필하겠습니다.”
새로운 만승천자를 옹립한 조조는 지금까지 이룩했던 활약들을 명분으로 승상에 등극했다.
삼면전쟁에서 완승을 거둬낸 조조는 거침없이 야욕을 드러냈다. 어린 황제를 내세우면서 천하의 제후들을 모두 길들이겠다는 의도였다.
“대장군(大將軍) 이성휘, 태상황께서 분부하신 황명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패국조씨 가문의 강행돌파로 대장군에 등극한 이성휘는 무관들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수많은 전투들을 승리를 이끌어온 천하제일검이 대장군으로 등극하자 모든 장졸들이 쩌렁쩌렁한 고함을 내지르면서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황제 폐하 만세!”
상서령(尙書令) 순욱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그에 문관들이 만세삼창을 이어나갔다.
“황제 폐하 만세!”
이성휘의 후임으로 표기장군에 임명된 조인이 근엄한 목소리로 만세를 외쳤다.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그에 무관들이 새로운 황제에게 예를 취했다.
“무려 수년 동안 난세가 지속되었음에도 여전히 천하는 혼란스럽고 백성들은 도탄에 시름하고 있소. 태상황 폐하의 황명을 받들어 짐은 천하를 평정하고 백성들을 구제하는 위국충절에 총력을 다할 것이오.”
유협은 어린 나이였음에도 의젓한 모습을 보였다.
옥좌의 주인이 되었다.
중압감이 거침없이 여린 어깨를 짓눌렀다.
그럼에도 유협은 황제로서의 면모를 보이면서 즉위식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계속해서 준비를 해온 것처럼 한 치의 실수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