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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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들의 이름이 적힌 살생부(殺生簿)를 정리한 조조는 업무를 제쳐둔 채 육아에만 전념했다.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
비정하게 두고 떠나야만 했다.
불온한 무리들이 도사리는 궁궐에 방치하고서 떠나야 했던 죄책감이 심중을 괴롭혔다.
“삼등공신으로 책봉된 양수라면… 광록대부(光祿大夫)의 여식이었죠. 우월한 학식주머니를 자랑하는 처녀로 유명하던데. 올해에 관례를 치른 주제에 커다란 거유라니 괘씸하네요. 마음에 들어요!”
탐스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명단을 정리했다.
짓궂은 악동처럼,
조악한 장난을 꾸미듯이 생글생글 웃었다.
급히 업무를 정리하던 조조로부터 이성휘를 보필할 속관들의 선발을 위임받았다. 그에 비서랑(秘書郞) 순유는 본인의 취향을 한껏 첨가하여 명단을 꾸리기 시작했다.
“분명 나중에 불호령이 떨어질 터인데….”
옆에서 함께 명단을 작성하던 여인이 물었다.
잿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는 불안감이 감도는 표정을 지으면서 어깨를 떨었다.
주부(主簿) 양수를 배치하다니.
사공부로부터 날벼락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괜찮아요, 자질이 충분한 걸요.”
양수는 조조에게 직접 등용되어 군부에서 단기간에 여러 실적들을 쌓은 인재였다.
반란 진압에도 크게 기여하지 않았던가.
조정대신들을 설득하여 반란 진압을 지휘했다.
실로 대범한 책략이었다.
조정대신들 중에 불순한 변절자가 있었다면 역으로 노려졌을 테니.
절대로 조정대신들이 동승에게 가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진압을 결행했을 터. 여장부처럼 용감한 대범함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군부에서 실무능력을 입증했으니 좋고, 그리고 실전에서도 자질을 입증했잖아요? 이런 인재는 얻기 힘들다고요, 질투심 많은 종사중랑.”
“소녀의 말은 그게 아니라… 에휴.”
무슨 말로도 설득이 불가능할 터.
후일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 걸까.
조조로부터 대장군부의 신설을 위임받은 순유는 본인의 입맛대로 속관들을 선발했다.
“아, 이제 광록훈이라고 불러야겠네요.”
가후는 파강장군 장수를 설득했던 공적을 인정받아 광록훈(光祿勳)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또한,
전선을 지휘했던 순유는 위위(衛尉)에 봉해졌다.
표기장군 이성휘를 보필해온 군사들이 모두 고관대작인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랐다. 대장군부의 신설을 위해 순유와 가후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었다.
“위위께서는 영예로우신 주군을 진심으로 사모하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여인을 계속 끌어들이시는 것이옵니까.”
그녀가 영예로운 주군을 애틋하게 사모하고 있음은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애틋함이 묻어난 표정.
사내의 뒷모습을 주시하는 애처로운 눈길.
앞에서는 짓궂은 장난을 일삼지만 사실은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고 아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촉촉하게 물든 눈동자로 사내에게 일편단심의 사랑을 보내는 그 모습은 틀림없이 사랑에 빠져버린 여인의 자태였다.
“진심으로 연모한다면… 다른 불여우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가후가 물었다.
그에 순유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많이 부끄러웠는지,
겸연쩍은 듯 새하얀 뺨을 긁었다.
이윽고 복숭아처럼 얼굴을 붉힌 여인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는 감히 주군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마음은 품어본 적 없어요. 주군의 측실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품어본 적도 없고요. 그저 곁에서… 옆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
정말 그 음란한 치녀가 맞나?
숫처녀처럼 수줍어하는 순유의 모습에 당혹감을 느꼈다.
음탕한 장난과 농담을 반복하면서 자신과 영예로운 주군을 매번 곤혹에 빠트리지 않았던가.
구제불능처럼 보이던 치녀를 순식간에 교화시킬 줄이야. 사랑의 힘이란 참으로 무서웠다.
“게다가 저는 호색한이 취향이니까요. 폭군처럼 여자에게 막돼먹게 구는 남자가 이상형이에요. 바로 옆에 정실이 있는데도 다른 여자들이 꼬리를 치면 곧바로 넘어가버리는 지금의 주군을 좋아해요. 후우, 주군은 대체 얼마나 제 취향의 사내가 되려는 걸까요.”
“…….”
개과천선은 개뿔.
얼굴을 붉히면서 히죽히죽 웃어대는 순유의 모습에 가후는 교화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사랑의 힘으로도 어렵다.
아니,
주군을 연모하면서부터 증상이 심해졌다.
음란한 치녀에게 휘둘리는 영예로운 주군이 너무도 불쌍했다.
* * *
아비규환의 전선을 지휘했던 조홍과 조인이 마침내 허도로 귀환했다.
백절불굴(百折不屈)의 명장들이 돌아왔다.
원소군과 서량군을 상대로 용맹무쌍한 기개를 떨쳤던 패국조씨 가문의 종친들은 곧바로 황실과 조정으로부터 일등공신에 책봉되는 영예를 누렸다.
“흥, 가만히 성이나 지킨 주제에….”
황금 갑주를 걸친 흑발의 여인이 한껏 오만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촌을 바라보았다.
기고만장(氣高萬丈). 오만불손(傲慢不遜).
무슨 단어들로 그녀를 표현할 수 있을까.
성공적으로 동관에서 서량 연합군을 저지하여 양면전쟁을 막아낸 조홍의 활약은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조인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촌을 축하해주고자 군세들을 이끌고 돌아올 때까지 관도에서 기다려준 것이 아닌가.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조인은 활약을 거둔 조홍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서량의 금마초가 창을 내지르면서 내 목숨을 위협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어. 천하제일검의 첫 번째 첩실로서 명예를 지켜야 했으니까! 관도에서 계속 적들과 기싸움이나 했던 불충한 첩실과는 다르지.”
“…….”
이렇게 얄미울 수가.
한 대 쥐어박았으면 속이 시원할 텐데.
얄미운 미소를 지으면서 본인의 전공들을 치켜세우는 조홍의 모습에 인내심이 비명을 질렀다.
벌써 21번째다.
귀에서 피가 쏟아질 정도로 들었다.
기고만장과 오만불손으로 빚어진 조홍의 기가 막힌 일장연설은 바위처럼 견고한 조인의 정신력을 무너트리기에 이르렀다.
“화살세례가 장대비처럼 쏟아졌지만 나는 장졸들과 함께 꿋꿋하게 버텨냈어. 동관이 돌파당하면 결국 사예주가 위험해질 테니까. 관도에서 계속 적들과 공놀이를 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냈던 가짜 첩실은 내 노고와 헌신을 알 리가 없겠지.”
“닥쳐! 닥치라고!!”
결국 인내심이 무너졌다.
울분을 꾹꾹 억누르던 조인이 결국 폭발했다.
울화통이 느껴지는 조인의 사자후에 모든 장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엄청 야단법석이네. 패국조씨 가문의 종친들은 다들 저런가?”
군세를 지휘하던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장팔사모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옆으로 고개를 힐끗 돌렸다.
“후후. 다시 귀여운 아이들과 만날 수 있겠군.”
청룡언월도를 치켜든 여인이 위험천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깊은 망념에 빠졌는지,
연신 중얼거리다가 실소를 터트리기를 반복했다.
쓰읍….
그러더니 갑자기 옷소매로 침을 닦았다.
둘째 언니의 위태로운 모습에 장비는 아연실색하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만약 어린아이들에게 이상한 짓을 한다면 아무리 의자매라도 위병에게 신고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아, 이번에는 정말 끝장날 줄 알았는데….”
백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강한 미련을 담은 아쉬움을 흘렸다.
자신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기를 원하는 뒤틀린 욕망에서 비롯된 한숨이었다. 피학(被虐)을 넘어 자신이 파멸(破滅)하기를 바라는 성애(性愛)가 느껴졌다.
“인생 씨발.”
도원결의는 신중히.
인생을 송두리째로 말아먹기 싫다면 말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장비는 ‘콩가루 같은 집안!’이라고 소리치면서 조조군으로의 전향을 고민했다.
“이제 곧 허도입니다!”
조조군 무관이 소리쳤다.
서로 으르렁대면서 대치하던 조홍과 조인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허도가 보인다.
마침내 오랜 전쟁을 끝내고서 돌아온 것이다.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이던 조홍이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사랑하는 서방님과 재회하게 된 것이 기쁜 듯했다.
“…서방님.”
조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제 만날 수 있다.
다소 쑥스러워하는 미소를 지었다.
“전쟁에서 일생일대의 전공을 세운 이 조자렴의 귀환을 얼마나 기뻐하실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격한 애정표현은 해주지 않으실까 조금 걱정되네. 누구는 성에만 있었는데 말이야.”
“…큭! 닥치고 행군이나 계속해!”
죽을 때까지 우려먹을 기세였다.
아니,
저승에 가서도 이번 일을 우려먹겠지.
조인은 앵무새처럼 이번 활약들을 계속해서 들먹이는 사촌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전선에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조홍과 조인을 맞이하고자 허도에서 장수가 도착했다.
하후연이었다.
패국조씨 가문의 여식들은 노골적으로 실망한 반응을 보였다.
속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반응에 머쓱함을 표현한 하후연이 뒤이어 말했다.
“큼큼…! 그렇잖아도 맹덕 누님과 표기장군께서 제장들과 함께 성문까지 마중을 나오셨습니다.”
자신들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언니와 이성휘가 성문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조홍과 조인이 크게 반색하면서 파안대소했다.
크흠….
하후연이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빨리 갈까?”
“어.”
조홍의 물음에 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와 형부가 기다린다.
패국조씨 가문의 여식들이 박차를 가하면서 강행군을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