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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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대신들을 설득하여 반란 진압에 크게 기여했던 주부(主簿) 양수는 삼등(三等)의 반열에 책봉되었다.
삼등공신.
실로 과분한 결실이었다.
뛰어난 재치와 현란한 임기응변으로 출세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리고 동승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은 적 있던 홍농양씨 가문을 수렁에서 구해냈다.
한나라 제일의 신동으로 칭송받았던 인재다운 일거양득의 활약이었다.
“수고 많았다! 역시 내 딸이다!”
광록대부 양표가 파안대소하며 두 팔을 뻗었다.
마침내 성공했다.
이제 더 이상 의심받는 일은 없을 터.
동승과 공융의 무리들과 잠시 어울렸다는 이유만으로 불순분자라는 낙인을 찍히지 않았던가. 아직도 그것을 생각하면 손바닥에 땀이 맺힐 정도였다.
“이제 누구도 우리 가문을 역적들과 동류로 취급하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
“무사히 위기를 넘겼구나.”
“네, 정말 다행이죠….”
아버지의 말에 양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동승과 공융의 무리들과 계속 어울렸다면….
분명 대규모 숙청의 풍파를 피할 수 없었으리라.
“오늘도 죄인들이 끌려갔다는군!”
“모두 삼족을 멸한다네요…! 으으, 흉흉해라!”
비릿한 피비린내가 허도를 휩쓸었다.
동승과 공융의 삼족을 멸했다.
부계(父系). 모계(母系). 처계(妻系).
혈연과 인척으로 연관된 대역죄인의 친척들이 모두 처형대로 보내졌다.
반역에 참여했던 다른 죄인들도 마찬가지로 삼족이 멸해졌다.
그 숫자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무려 1천 명을 훌쩍 넘어섰을 정도였다.
노복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을 들었던 양표와 양수는 홍농양씨 가문이 숙청의 굴레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겨두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심사숙고해야 돼요. 사공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니까요.”
“그래, 그렇겠지….”
조조는 의심이 많은 성정이다.
이번 반역사건으로 의심이 더욱 깊어질 터.
궁궐을 수비하는 금군을 재편성하여 근위부대를 창설했다고 들었다. 두 번 다시 동승과 공융 같은 무리들이 활개를 치지 못하도록 철저히 황실과 궁궐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사공부에서는 따로 연락이 없었느냐?”
“네, 아직요.”
삼등공신에 책봉되었다면 분명 새로운 관직을 받게 될 것이었다.
어떤 관직에 임명될까.
초조한 마음으로 사공부의 통보를 기다렸다.
지혜롭고 박식한 홍농양씨 가문의 여식은 어림짐작을 하고 있음에도 내색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심려를 끼칠까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어르신!”
부녀가 함께 마음을 졸이고 있었을 때,
대문을 호위하던 가병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사공부에서 서한이 도착했습니다.”
이윽고 두 팔을 뻗으면서 서한을 내밀었다.
사공부.
분명 조조에게서 온 서한이었다.
양표가 긴장된 표정을 지으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그, 그런가…!”
대체 어느 부서로 발령이 되었을까.
딸의 장래가 걸린 일이다.
온몸을 바들바들 떠는 것은 당연했다.
혹시라도 조조가 전례를 들먹이면서 딸아이를 변방의 미관말직으로 좌천시키진 않을까, 흙빛이 된 안색으로 조심스럽게 서한을 펼쳤다.
“대장군부…?”
양표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대장군부(大將軍府).
매우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이다.
혹시 잘못 보내진 게 아닐까.
딸을 대장군부에 배속한다는 내용에 의아함을 숨길 수 없었다.
“분명 대장군은 수년 동안 공석이었을 터인데….”
“새로 임명하려는 모양이죠. 물론 대장군에 임명될 사람은 표기장군이겠죠.”
아버지의 말에 양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조정회의에서 대장군의 임명건을 유예하겠다고 결정하지 않았느냐. 조정의 재가도 내려지지 않았거늘….”
“사공에게 재가가 필요하겠어요?”
조조는 유일한 적수였던 원소를 형양에서 완파함으로서 절대 권력을 거머쥐었다.
절대 권력.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으리라.
반란을 일으켰던 동승과 공융의 일족을 처단함으로서 공포를 각인시켰다. 절대 권력에 도전하는 무리들에게는 오로지 처참한 죽음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정말 사공의 시대로구나.”
양표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하지만 우리 홍농양씨 가문은 어떻게든 이 격변에 편승해야 돼요.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다면… 결국 낙오되고 몰락할 뿐이니까요.”
한나라의 대명문가인 홍농양씨 가문의 명맥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라도 조조군과 계속 이어나가야 했다.
그렇기에 양수는 새로 창설하는 대장군부의 속관으로 임명한다는 조조의 통보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 * *
전쟁포로의 신분으로 허도로 압송된 조운은 가혹함과는 크게 상반된 편안한 대접을 받았다.
맛있는 식사.
편안한 잠자리.
도무지 포로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귀순을 제안한 것은 첫날뿐이다.
물리적인 방법으로 강제할 생각은 없었는지 이성휘는 조운에게 다시 묻지 않았다.
대체 무슨 속셈인 것일까….
대청마루에 앉아서 마른 육포를 우물거리던 미녀가 중얼거렸다.
‘그 귀축이 설마…. 내 몸이 목적인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창녀들이나 입을 법한 음란한 복장을 강요한 것을 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내 몸이 목적이다.
분명 육욕을 채울 목적이리라.
진수성찬을 꼬박꼬박 먹여서 군살을 찌우게 만들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사내들은 군살이 적당하게 오른 미녀를 좋아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결국 치욕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자결을…!’
회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가 비장함으로 물든 표정을 지었다.
무도를 선택한 무인으로서,
결코 가냘픈 여인처럼 희롱당할 순 없었다.
차라리 자결을 택하는 것이 충의가 아닐까.
음란한 시녀복을 강요당하는 일생일대의 굴욕을 당한 조운은 도톰한 입술을 깨물면서 번민에 빠졌다.
“조운 장군.”
“네, 넵…!”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급히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을 크게 떴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미녀가 살포시 웃으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고아하고 청려한 미녀였다.
정말 선녀가 아닐까?
진심으로 숙고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 분명….”
“초선이라 불러주시옵소서.”
포로에게 가당치 않는 공손한 어조였다.
부드럽고 고상한,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가 귓가에 흘렀다.
작약꽃처럼 수려한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는 조운에게 차를 권유했다. 그에 조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건네받았다.
“그럼 소저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네.”
어색하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방금까지 자결을 고민했던 탓일까.
불편하고 어색한 좌불안석이 따로 없었다.
“소저는 혹시… 낙양제일미이십니까!”
“그러하옵니다.”
낙양제일미의 명성은 촌구석에도 널리 알려졌을 정도로 유명했다.
태원왕씨 가문의 수양딸과 동석하고 있음에 머리가 멍해졌다. 달콤한 체취에 얼굴이 붉어졌다. 같은 여성조차 얼굴을 붉힐 정도로 낙양제일미가 아름다운 탓이었다.
“장군에게 무례를 범하여 송구하옵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조운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당혹감이 밀려들었다.
자결을 고민했던 번민이 쑥 사라졌다.
낙양제일미를 마주한 조운은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면서 대처를 고민했다. 고귀한 신분의 아가씨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라 당혹감을 느끼는 듯했다.
“장군.”
“자룡이라 부르셔도 됩니다!”
초선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재차 입을 열었다.
“자룡, 가사에 소질이 있으신가요?”
“네…?”
너무 뜬금없는 물음이다.
가사?
왜 나한테 그것을 묻지?
머리를 빠르게 굴리면서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바쁘셔서… 주로 제가 가사를 맡곤 했습니다만.”
“그런가요?!”
겸연쩍은 듯 뺨을 긁으면서 말했다.
청소와 요리를 할 줄 안다.
물론 전문적인 수준은 결코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초선은 크게 반색하면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갑작스러운 미소에 조운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후우, 정말 다행이에요.”
대체 뭐가.
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건데.
낙양제일미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포로 신분으로 이성휘의 저택에서 기거하게 되었을 때부터 편안하게 잠을 이뤘던 적이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거나,
아주 잠깐 눈을 붙였을 뿐이었다.
대체 왜 나에게 이런 대접을 해주는 걸까.
고민을 계속 거듭하였음에도 조운은 해답을 내리지 못했다. 포로 신분으로 격하된 원소군의 무장은 오늘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본초 님….”
주군은 과연 무사하실까.
업성까지 무탈하게 퇴각하셨을까.
걱정과 우려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오늘도 편안하게 눈을 붙이지 못할 듯했다.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조운은 자괴감이 느껴지는 표정을 지으면서 객실을 나섰다. 전투에서 패배한 주제에 편안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에 수치심을 느낀 듯했다.
“분명 저 건물이 안채였지. 이성휘가 돌아왔겠군.”
쓸쓸한 발걸음으로 노복들이 화사하게 꾸민 정원을 거닐고 있었을 때,
조운은 불현듯이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경직된 표정을 지으면서 안채를 노려보았다.
바깥에 횃불들만 켰을 뿐이다.
보초를 서는 사병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천하를 제패했던 본인의 무력을 절대적으로 맹신하기 때문일까. 기이하게도 안채 주변에만 서성이는 인원들이 없었다.
‘만약 잠을 자고 있는 천하제일검을 죽인다면….’
천하제일검을 죽일 절호의 기회다.
분명 자고 있을 터.
안채를 급습한다면 암살에 성공할지도 모른다.
조운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발걸음을 성큼성큼 내딛었다. 누군가를 몰래 죽여본 적이 없음을 증명하듯 조운의 행동은 매우 서툴렀다.
“설마 성공할 리가 없겠지.”
안채 주변까지 도달했을 때,
조운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를 죽일 수 있을 리 없다.
천하제일검이 설마 호락호락하게 죽어주겠는가.
도리어 역으로 제압당하여 살해당하겠지. 천하제일검을 암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은 멍청이나 할 법한 안일한 생각이었다.
“흐읏…! 흐아앙…!”
안채에 도달하자 발정기의 암고양이가 내는 울음소리처럼 달콤한 교성이 들려왔다.
천박하고 음란한,
육욕에 빠진 암컷의 간드러지는 목소리였다.
“하윽! 하으윽-!! 주인님! 주인님!!”
여인의 신음소리가 분명했다.
한 명이 아니었다.
두 명,
아니… 세 명은 되는 듯했다.
초선. 여포. 장료.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시녀들이 주인님에게 밤봉사를 하고 있었다. 여인들의 헐떡이는 소리에 조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대, 대체 무슨 짓을…! 아무리 자정이 넘은 야심한 시각이어도 그렇지…!”
음란함을 모르는 숫처녀였던 조운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수습하면서 황급히 움직였다.
알 것 같았다.
안채 주변에만 사람이 없던 이유를.
안채에서 아름다운 시녀들과 음란한 잠자리를 가지기에 주변을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제야 이유를 알아차린 조운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현장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