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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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먼지가 뒤섞인 돌풍으로 인해 원소군은 추풍낙엽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전열이 와해되었다.
드높은 사기가 바닥에 처박혔다.
백마장군 공손찬에게 대패를 안겨주었던 역전의 용사들이 비명을 토해내면서 붕괴되는 모습은 아비규환을 연상시켰다.
“이놈들!”
“어딜 도망가느냐!”
송헌과 조성이 검을 휘두르면서 헐레벌떡 도망치던 원소군을 추격했다.
승세가 완전히 넘어왔다.
강한 확신을 느낀 팔건장은 추격을 이어나갔다.
“도망치지 마라! 어서 응전하라!”
곽조가 단칼에 죽었다. 비보를 들은 공손독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무관들을 급히 불러모았다.
반격해야 한다. 이대로는 모두 죽을 뿐이다.
그러나 어떻게 장졸들을 수습한단 말인가.
모래바람을 등지고서 달려든 기병부대의 급습에 무너진 전열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과 같았다. 아무리 다시 쌓으려고 해도 흐물흐물 쓰러질 뿐인 모래성 말이다.
“크악!”
“아, 아군이다…! 쏘지 마라!!”
공포에 휩싸인 궁노병들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공황상태에 빠진 궁노병들은 피아를 식별하는 것을 잊어버렸는지 아군에게 활을 날렸다.
전선을 급히 수습하던 무관이 눈 먼 화살을 맞고서 툴썩 쓰러졌다. 날카로운 화살이 목덜미를 반쯤 관통하면서 절명하고 말았다.
“장군,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합니다!”
무관이 달려와 공손독에게 알렸다.
적들의 맹습으로 보병과 궁노병들이 완전히 뒤섞이고 말았다. 사분오열하여 흩어진 장졸들이 서로를 밀치고 밟으면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퇴각해야 한다.
당장 후퇴를 명령해야 한다.
무관들이 입을 모아 공손독에게 퇴각을 종용했다.
“내, 내가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다! 어서 정로장군에게 상황을 알려라! 당장 철퇴해야 한다고 말이다!”
“예!”
공손독의 다급한 외침에 무관이 급히 말을 타고 본진으로 향했다.
피해가 더욱 가중되지 않도록 급히 퇴각을 결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규모 기만전술로 승세를 거머쥔 조조군이 순순히 보내줄 리 없었다. 팔건장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사냥감을 제압하는 맹수처럼 집요하게 원소군을 붙잡았다.
“공격하라!”
“천하의 원소군이 오합지졸이로구나!”
송헌. 조성. 학맹. 위속.
4명의 장수들이 동시에 공손독을 노렸다.
그에 편승하여 날랜 기병들이 적진을 돌파했다. 하후돈의 부대였다.
패국의 여걸은 대담하게도 삼엄한 방비를 자랑하는 공손독의 부대를 들이쳤다. 무거운 월도를 크게 휘두르면서 앞을 가로막는 원소군 장졸들을 도륙했다.
“적장은 당장 이 하후원양의 칼을 받아라!!”
경계를 수차례 돌파했던 하후돈이 월도를 치켜들면서 공손독을 노렸다. 호위하던 무관들을 쓰러트린 뒤에 월도를 번쩍 들어올렸다.
“이, 이 계집이…!”
공손독이 칼자루를 뽑아들었다.
그러나,
하후돈의 월도가 훨씬 빨랐다.
내리친 날카로운 대검에 목이 달아났다.
병력을 지휘하던 공손독은 칼끝을 뽑아들지도 못하고 잘려나간 머리와 함께 말에서 떨어졌다.
“건무장군이 적장을 베었다!”
“여세를 몰아 진격하라! 놈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공손독의 최후를 확인한 팔건장이 병장기를 치켜들면서 병사들을 독려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된다.
이제 승리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사예주의 패전으로 독기가 오른 팔건장이 무자비한 면모를 보였다. 전장에서 쓰러진 전우들의 복수를 부르짖으면서 맹렬하게 나아갔다.
“본대가 움직였습니다!”
“오오! 표기장군이 움직이셨군!”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공손독을 참수함과 동시에 이성휘가 본대를 이끌고서 가세했다.
드디어 본대까지 움직였다. 천하제일검이 가세하자 조조군은 분기탱천하여 전진했다.
연이은 파상공세에 원소군은 재기불능의 위기에 치달았다.
* * *
곽조에 이어 공손독마저 전사했다.
비보를 들은 정로장군 국의는 충격에 휩싸였다.
어째서,
대체 어째서 무너졌단 말인가….
애처롭게 떨리는 시선으로 전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안타까운 눈길에도 진퇴양난에 휩싸인 전황이 뒤바뀌는 격변은 없었다. 국의는 육안으로 보이는 궤멸적인 패배에 비명을 토해냈다.
“젠장! 젠장! 젠자앙!! 기병부대들을 동원한 흙먼지는 그렇다고 쳐도… 대체 왜 바람이 불었단 말이냐!!”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광풍으로 모두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국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분노를 토해내는 것은 당연했다.
“어찌하면 좋겠소, 정로장군!”
고번이 놀라 물었다.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대패에 장졸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무려 수만 명에 달하는 아군 병력이 모두 아수라장에 휩쓸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다, 당장 퇴각을…!”
떨리는 목소리로 퇴각을 명령하려던 국의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문을 닫았다.
전장을 주도하던 병력이 일거에 퇴각해버리면 본대마저 위험해진다. 원소의 안전을 우려한 국의는 주먹을 바르르 쥐면서 잠시 망설였다.
“어서 퇴각하게. 놈들은 내가 막겠네.”
망설이는 국의에게 순우경이 다가와 말했다.
전장에 남아 조조군을 대적하겠다.
순우경의 장담에 국의는 침음을 삼키면서 노여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장군이 적들을 막아내겠단 말이오? 분명 일초지적도 버티지 못할 거요. 차라리 내가 놈들을 막겠소!”
갑작스러운 이변으로 인한 패전이었지만 분명 자신에게 패장(敗將)의 책임이 있었다.
본진을 지켜내고자 후미들과 함께 남는다면 틀림없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터.
희생을 자처하려는 순우경의 결연한 모습에 국의는 속으로 망설였던 본인의 비겁함을 책망했다. 그에 역정을 내면서 본인이 대신하겠노라고 외쳤다.
“겨우 수천에 불과한 병력으로 적들의 공세를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내 휘하에 아직 병력들이 제법 많으니 내가 시간을 벌겠네. 그 틈에 어서 주군과 함께 전선을 빠져나가게!”
오랫동안 원소를 보필해온 필두무장답게 의연한 모습으로 장수들을 이끌었다.
검을 뽑아든 순우경은 박차를 가하면서 아수라장으로 뛰어들었다. 결사의 각오로 패전의 손실을 막아보겠다는 각오인 듯했다.
“큭!”
국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본인의 무력함을 책망하는 모습이었다.
죽기를 각오했거늘.
항상 결사의 각오로 전쟁에 임했거늘.
잔인무도한 조조군이 득실대는 전장에 뛰어든 순우경의 모습에 참을 수 없는 치욕을 느껴야 했다.
“정로장군!”
“어서 피해야 합니다!”
휘하 장수들이 국의를 붙잡았다.
이대로 우유부단하게 망설였다간 모든 장수들이 몰살을 면할 수 없을 터. 장수들은 국의에게 계속 철군을 종용했다.
“빌어먹으으을!!!”
죽느니만 못한 치욕을 떠안게 된 국의는 크게 오열하면서 뒤로 물러서야 했다.
* * *
형양 공방전의 결과는 가라앉기 시작한 모래바람처럼 조조군의 압승으로 마무리가 되는 듯했다.
승세가 결정되었다.
사방으로 널린 원소군의 주검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공손찬을 역경루에 몰아넣었던 하북의 용사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어디를 보더라도 원소군의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광경뿐이었다.
“비켜라, 이 무도한 것들!!”
뿔뿔이 흩어진 잔병들을 처리하면서 전선을 정리하던 조조군을 향해 순우경이 달려들었다.
왕년의 걸출한 실력을 증명하듯,
검을 수차례 휘두르면서 적장들을 쓰러트렸다.
계속 빗발치는 화살세례와 병장기들의 공격에도 돌격을 이어나갔다. 죽음을 각오한 마지막 불꽃이 활활 타오르면서 조조군을 위협했다.
“순우경이다!”
“어서 잡아라! 반드시 잡아야 한다!”
도독 순우경이 쳐들어왔다.
큰 공을 세울 기회다.
병사들이 크게 광분하며 순우경을 노렸다.
벼락출세를 위한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일개 무명소졸들은 물론, 팔건장도 순우경의 목을 거두고자 칼자루를 뽑아들었을 정도였다.
“가소롭구나! 겨우 이따위로 이 순우중간의 수급을 거두려는 것이냐!!”
무리한 돌격으로 급습에 투입되었던 병력들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순우경은 돌격을 계속 거듭하면서 조조군의 본대에 도달했다.
푸욱!
촤아악-!!
피칠갑이 될 때까지 검을 휘둘렀다.
크게 숨을 헐떡였다.
온몸이 무거웠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음에도 오히려 활력이 넘치다니! 마치 소싯적으로 돌아간 것 같다!’
진격을 저지하던 무관들을 베어낸 순우경은 격통에 바들바들 떨리는 양손을 힘겹게 들어올리면서 칼끝을 겨눴다.
사방이 온통 적들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고립무원의 위험에 스스로 뛰어들었던 순우경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면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를 지키는 병력은 불과 수십 명에 불과했다.
“순우경 장군.”
적장을 겹겹이 포위하던 병력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갑주를 걸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성휘였다.
그의 등장에 순우경이 실소했다.
헤어졌던 벗과 재회한 기분이라고 할까.
분명 목숨이 위태로운 최악의 순간이었음에도 어째서인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한가롭게 근황을 나눌 정도로 친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반갑네, 천하제일검. 자네와 본초가 낙양에서 결별했던 이후로 처음인가…!”
“그럴 겁니다.”
순우경의 말에 이성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옛 기억이 떠오른 것일까.
쓴웃음을 머금은 채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나 지나간 추억에 망설이는 일은 없었다.
순우경을 마주한 이성휘는 청명한 금속음을 내면서 검을 뽑아들었다. 아찔한 빛무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칼끝은 당장이라도 순우경의 가슴을 꿰뚫을 것 같았다.
“각자의 주군을 모시는 장수로서 언젠가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은 했었네만…. 참으로 기구하군.”
“…동감입니다.”
이윽고 순우경이 자세를 잡았다.
그에 호응하듯 이성휘도 칼끝을 겨눴다.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피칠갑을 한 원소군의 필두무장이 달려들었다.
차앙-!
혼신의 힘을 다하여 휘둘렀다.
그러나 순우경의 일격은 곧바로 튕겨나고 말았다.
“커헉!”
일격이 실패함과 동시에 전광석화처럼 날아든 칼끝이 순우경의 가슴을 꿰뚫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았던 일격에 놀란 순우경은 두 눈을 부릅뜨면서 핏물을 울컥울컥 쏟아냈다.
“역, 역시…! 대단… 하군…!!”
치명상을 입은 순우경이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이대로 보내줄 순 없다는 듯….
순우경은 칼자루를 놓쳐버린 양손으로 이성휘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표기장군, 저희들이 치우겠습니다.”
휘하 무관들이 움직였다.
결투는 끝났다.
놈은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겨우 유지하고 있는 의식과 함께 숨이 끊어질 터.
피투성이의 산송장이 가로막고 있는 광경을 황망하게 여긴 무관들은 크게 놀라면서 순우경의 시체를 치우려고 했다.
“아니, 이대로 둬라.”
그에 이성휘는 손을 들어올리면서 무관들을 제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