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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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바람이 불어와 검은 머리카락을 간질였음에도 여인은 흔들림 없는 눈길로 전장을 응시했다.
온통 피바다였다.
피가 연못을 이룰 정도였고,
시체들은 언덕을 만들었을 정도로 넘쳐났다.
대업(大業)과 야망(野望)의 실현을 위해 수많은 생명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흑발을 늘어뜨린 여인은 그것을 매우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무뎌진 것이다.
익숙해져버린 것이었다.
적들의 죽음과 아군의 희생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감정이 닳아버리고 말았다.
“맹덕.”
철혈의 군주를 호위하던 여장부가 입을 열었다.
하후돈이었다.
전장에서 날아든 급보를 알렸다.
“적진으로 돌격했던 악진과 이전이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고 해.”
“흠.”
승세에 쇄기를 꽂으려고 했던 파상공세가 실패하고 말았다.
정로장군 국의가 가세했다.
그 소식에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쉽게 당해주지는 않겠다는 것인가.
계교 전투에서 백마장군 공손찬군을 전멸시켰던 영웅이 나섰다면 악진과 이전만으로는 분명 역부족이었으리라.
일단 악진과 이전에게 재정비를 명령했다.
“원양, 네게 맡기겠다.”
“그럼 당연하지!”
조조의 명령에 하후돈이 월도를 치켜들었다.
드디어 출진이다.
이를 드러내면서 기뻐했다.
목이 빠지도록 분부를 기다렸던 하후돈은 장수들을 소집하여 출진을 알렸다. 그에 장수들도 쾌재를 부르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성휘와 함께 출진하도록.”
“하, 하지만 성휘는 부상자잖아?”
“순우경과 국의를 돌파하기 위해서다.”
파상공세를 지휘하던 악진과 이전이 실패했다.
이성휘 밖에 없다.
천하제일검만이 수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조조는 이성휘를 급히 투입하여 백마의종을 전멸시키는 전공을 세운 만승천자의 군세를 이끌도록 했다.
“원양, 성휘를 부탁한다.”
“당연하지.”
간절함이 느껴지는 사촌의 부탁에 하후돈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성휘를 지키는 것.
사촌을 지키는 역할만큼 중요한 임무였다.
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걸 수 있다.
하후돈은 중차대한 역할을 위임해준 사촌의 신뢰에 감사를 표하면서 출진했다. 패국의 여걸이 출진을 명령하자 수천 기의 기병들이 일거에 움직였다.
“본초.”
호위를 담당하던 하후돈을 출진시킨 조조는 원소군이 주둔하고 있는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대장기가 보였다.
수많은 군기들이 산등성이 위에서 펄럭였다.
분명 본초는 저기에 있을 터.
워낙 장거리였기에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분명 오랜 벗이자 평생의 숙적은 날카로운 눈길로 전황을 주시하고 있으리라.
“천하를 쥐는 것은 나다.”
전황이 호각지세처럼 흘러가고 있지만 결국 승리의 영광은 내 손아귀에 들어오리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모습에서 강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이성휘가 하후돈과 출진을 개시했다. 하북사정주와의 결투에서 부상을 입었음에도 그는 아랑곳 않고 전장에 나섰다.
‘미안하네, 성휘…. 매번 무리를 시키는군.’
애처로운 눈길로 사랑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무리한 명령임에도,
망설임 없이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그런 남편에게 매번 미안할 따름이었다.
* * *
전면전에 나섰던 악진과 이전이 패퇴했다.
선봉이 전멸하였으며,
뒤이어 가세했던 후열까지 패주하고 말았다.
무려 수천 명이 화살세례에 파묻혔다.
가시가 촘촘하게 돋아난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화살들이 꽂혔다. 처참하게 쓰러진 시체들의 모습에 조조군은 사기를 상실했다.
“선봉이 전멸하다니!”
“쏟아지는 화살을 어떻게 뚫으라고…!”
연승을 거듭하던 조조군이 아연실색하며 뒤로 물러섰다.
돌격은 자살행위다.
어떻게 저 화살세례를 뚫으란 말인가.
수천 명의 전우들이 화살세례에 목숨을 잃었다.
계교 전투에서 공손찬군을 학살했던 무자비한 화살세례는 조조군마저 압도했다. 잘 숙련된 궁사와 노사들은 장전한 채 적들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흥, 결국 꽁무니를 뺐군. 아둔한 머저리들 같으니라고.”
악진과 이전은 몰아치는 화살세례에도 꿋꿋하게 고군분투를 거듭했지만 결국 패주했다.
용맹하게 싸웠으나,
그 대가는 실로 참혹할 따름이었다.
수많은 사상자들을 떠안고서야 패주를 결정한 조조군의 판단에 국의는 경멸을 담은 비웃음을 던졌다.
“제깟 놈들이 아무리 날고 기더라도 궁노병 앞에서는 오합지졸이지. 북방의 귀신을 다시 몰아냈던 화살세례다! 사예주를 네놈들의 무덤으로 만들어주마!”
한껏 오만해진 모습을 보였다.
조조군을 패퇴시켰다.
어린아이를 다루듯이 쉽게 몰아냈다.
수세에 직면했던 대국을 단번에 뒤엎어버린 국의는 장수들을 파견하여 전선을 강화했다. 감히 놈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견고하게 방어선을 펼쳤다.
“정로장군, 적들이 곧 공세를 퍼부을 걸세.”
순우경이 말했다.
그에 국의가 어깨를 으쓱였다.
“놈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달려든다면 다시 광활한 벌판을 시산혈해로 물들일 뿐이오.”
자신감이 넘쳤다.
짐짓 오만하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확신을 느낄 만했다.
공손찬을 무찔렀던 궁노병이 있지 않은가.
활과 쇠뇌로 무장한 병사들이 철통방어를 이어나가고 있었기에 매우 든든했다.
“정로장군!”
전선을 수색하던 무관이 달려왔다.
그와 동시에,
저 너머에서 적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전선에 투입된 병력들이 제법 많았다. 분명 화살세례에 된통 당했을 텐데도 다시금 대규모 병력을 투입시킨 것이었다.
“멍청한 놈들! 다시 핏물로 수장시켜주마!”
국의가 득의양양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에 국의의 휘하 장수였던 고번이 짐짓 난색을 표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로장군…! 군세를 이끄는 놈이 표기장군 이성휘라고 하오!”
“놈이 나섰단 말인가!”
이성휘,
그 빌어먹을 놈이 나섰다.
내 주군의 마음을 빼앗은 놈.
간교한 꾀와 술책으로 주군을 현혹한 악도.
철천지원수나 진배없는 놈이 나섰다는 소식에 국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당장이라도 칼자루를 뽑아들어 전장으로 돌격할 것처럼 비분강개하는 격앙된 모습을 보였다.
“그래, 와라! 어서 와라!! 이 황량한 벌판을 네놈의 묘지로 삼아주겠다!!”
겁도 없이 머리를 들이밀겠다는 말인가.
저 시산혈해를 보고도,
시체들이 널브러진 죽음의 땅을 보고서도 전면전을 벌이겠단 말인가!
실로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놈이다.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국의는 분개를 토해내면서 공세를 기다렸다. 적들이 달려들면 곧바로 궁노병들의 일제사격으로 응전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정면으로 올 셈이냐. 아니면 전장을 우회하여 측면을 노릴 셈이냐? 궁노병들이 삼면을 철통처럼 수비하고 있다! 네놈이 무슨 수작을 벌이더라도 일제사격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의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에 궁노병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활을 번쩍 치켜들었다.
무거운 쇠뇌를 들어올리면서 적을 조준했다.
사격대형을 갖춘 궁노병들은 적이 사정권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호쾌한 승전을 거둔 직후였기에 궁노병들은 국의처럼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였다.
“놈들이 움직였다!”
“기병대…! 기병대가 출진했다!”
선두에서 조조군의 동태를 살피던 척후들이 다급한 어조로 외쳤다.
놈들이 행동에 나섰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기병부대였다.
기병들이 박차를 가하면서 질주를 시작했다.
이성휘가 지휘하는 본진에서 출진한 기병들은 좌우로 나뉘어 전장을 크게 돌았다. 기병부대가 우회하는 모습을 목격한 국의는 급습에 대비할 것을 명령했다.
“멍청한 놈, 그깟 기병들로 뭘 어쩌겠다고….”
적의 본진에서 출격한 기병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고작해야 수백 기다.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소규모였다.
은연중에 이성휘에게 두려움을 느꼈던 국의는 긴장감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궁노병들도 국의와 반응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개중에는 조조군의 행동을 비웃기도 했다.
그럼에도 궁노병들은 정예임을 증명하듯 전열을 지키면서 반격을 기다렸다. 노련한 궁노병들은 활과 쇠뇌를 치켜든 채 마른침을 삼켰다.
“적들이 다시 움직였소! 또 기병대이외다!”
“대체 무슨 수작이지…?”
고번의 외침에 국의가 입가를 비틀었다.
기병대가 움직였다.
후발로 출진한 기병대도 선두처럼 전장을 우회하기 시작했다.
광대극처럼 보이는 행동은 계속 이어졌다.
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두──!!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 전장을 강타했다.
말의 사나운 울음소리가,
말의 무거운 말발굽소리가 삼면을 가득 메웠다.
기동작전에 동원된 기병들이 수천 기에 달했다.
병주 출신의 기병들은 뛰어난 기마술을 자랑하면서 전장을 질주했다.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모습에 사격을 가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교활한 기병들은 궁노병의 사정거리를 훤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 흙먼지가…!”
“장군! 흙먼지 때문에 주변이 보이질 않소!”
흙먼지가 솟구쳤다.
짙은 토연(土煙)이,
군마들의 발길질에 뿌옇게 일어섰다.
사막지대에서 주로 발생하는 황사처럼 솟구친 흙먼지들이 사방을 포위했다. 이윽고 거센 바람까지 불면서 황사가 더욱 극성을 부려댔다.
“자, 장군…!”
고번이 소스라치게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동요를 간파한 것일까.
흙먼지 너머에서 쩌렁쩌렁한 고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부우우우우!!
두웅! 두웅! 두웅! 두웅! 두웅!
북과 나발은 물론,
뒤이어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황사처럼 솟구친 빌어먹을 흙먼지 때문에 고각소리가 사방에서 울리는 듯했다. 누렇게 변해버린 시야에 당황하던 궁노병들은 적의 함성과 고각소리에 비명을 삼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