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화>
=========================
상서령(尙書令) 순욱은 허도의 혼란을 수습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주군께서 출진한 이후,
조정대신들과 협의하여 정국을 안정시켰다.
동승의 반란으로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하면서 혹시 모를 후환들을 경계했다. 왕필과 조엄을 동원하여 비상령을 내렸던 순욱은 곧바로 조정대신들을 소집했다.
“황실의 위엄을 위해서라도…, 귀비의 진상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순욱은 사도(司徒) 왕윤과 상의하여 귀비가 일으켰던 역모를 조용히 은폐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후궁이 자객들을 숨기고 병장기를 몰래 들이는 등의 악랄한 역모를 일삼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황실의 권위는 크게 실추할 터였다. 그것을 우려한 순욱은 조정대신들과 합심하여 귀비 동씨를 금기(禁忌)로 규정했다.
“의견에 동의하네, 상서령.”
왕윤이 대답했다.
또한 조정대신들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황제의 장인이 역도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모의했다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만약 귀비가 부친과 협력하여 반란을 주도했다는 사실마저 알려지게 된다면 만천하로부터 지탄이 이어질 터였다.
“입에 담기에도 무서운 참변이 궁중에서 연이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사관(史觀)들에게 명하여 일을 덮는 것이 좋겠습니다.”
상서복야(尙書僕射) 사손서도 의견에 가세했다.
알려져선 안 된다.
이대로 진상을 꽁꽁 은폐해야 마땅했다.
황상의 총애를 받던 후궁의 두 눈을 그대로 뽑아버리지 않았던가. 게다가 모진 고문을 가하고서 얼굴을 흉측하게 횃불로 태워버렸다.
학자 출신의 조정대신들이 합심하여 은폐를 논했을 정도로 이번 사안은 매우 끔찍했다.
“황실을 위해서라도… 사공을 위해서라도 궁중에서 벌어졌던 참사를 덮도록 하겠습니다.”
조조가 벌였던 극단적인 행동이 알려진다면 어마어마한 파장이 일게 될 터였다.
게다가 작금은 건곤일척의 결전을 치르는 전시상황이었다. 살얼음판에 올라선 절체절명의 상황이었기에 결코 부화뇌동은 막아야 했다.
“후우….”
조정회의를 끝마친 순욱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대전을 나섰다.
마음이 무거웠다.
무거운 돌덩이가 심연처럼 어두운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반역사건을 전환점으로 조조군은 더욱 강경하게 황실과 조정을 압박할 터.
황실과 조정은 패국조씨 가문의 영향력에 쇠진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리라. 황실과 조정의 명운을 진심으로 염려하고 걱정해온 순욱이었기에 심사숙고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여!”
쓸쓸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을 때,
상아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은 또랑또랑한 두 눈을 반짝이는 유년을 만났다.
조조와 이성휘의 아들,
패국조씨 가문의 후계자인 조앙이었다.
대전 주변에는 어쩐 일로 행차한 것일까.
급하게 달려오는 시녀들을 보건데 돌발적으로 뛰어나온 듯했다. 순진무구한 귀여운 도련님의 모습에 순욱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반겨주었다.
“귀여운 공자님,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순욱이 허리를 숙이면서 물었다.
그에 조앙이 두 팔을 뻗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무니하고 아부지… 언제 돌아와여?”
“며칠 동안만 꾹 참으면 돌아오실 거예요.”
순유의 대답에 조앙이 고개를 꾸벅꾸벅 끄덕였다.
작은 다람쥐 같았다.
꽉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영특하고 귀여운 도련님의 반응에 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 거울처럼 맑은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문득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바깥에서 계속 소리가 들렸을 텐데… 혹여 무섭지는 않으셨나요?”
날카로운 암기로 무장했던 자객들이 바로 코앞까지 들이닥치지 않았던가.
병사들의 날카로운 비명과 고함소리에 도련님이 놀라지는 않았을까, 순욱은 숙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진심으로 우려했다.
“괜짠습니다! 벼락소리는 이제 참을 수 있습니다!”
조앙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대답했다.
아마도,
시녀들이 바깥에서 들렸던 비명과 고함소리를 벼락이 치는 소리라고 둘러댔던 듯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병사들이 죽어가는 비명소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평생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을 테니.
“정말 장하십니다.”
두 팔을 뻗으면서 도련님을 와락 안았다.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아무것도 모른 채 헤실헤실 웃는 공자님을 계속 안아주었다.
“공자께서 장성하실 때까지… 이 순문약은 계속 충정을 다할 것입니다.”
“네에.”
어린아이가 말뜻을 이해할 리 없었다.
그러나,
어린 공자님에게 진심을 꼭 전달하고 싶었다.
어른들의 권력쟁탈에 하마터면 희생양이 될 뻔했던 공자님에게 어른을 대표하여 사과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 * *
마침내 천하를 양분했던 세력들이 격돌했다.
이강(二强)의 충돌,
꿈과 야망이 맞부딪치면서 유혈이 벌어졌다.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성할 패자를 정하고자 전장에서 자웅을 겨뤘다. 난세를 종횡무진하며 무명을 떨쳤던 군단들이 서로에게 병장기를 내질렀다.
“천하통일을 위하여!”
“놈들을 모두 사예주에 파묻어라!”
유혈성천(流血成川).
핏물이 강처럼 흘러내렸다.
메마른 대지가 흠뻑 젖었다.
전장에서 쓰러진 시체들은 산을 이룰 것 같았다.
“돌격하라! 물러서지 마라!!”
도독(都督) 순우경이 등채를 치켜들면서 계속 공세를 명령했다.
힘과 힘의 싸움이다.
밀리는 쪽이 패퇴할 수밖에 없다.
공방전의 승전으로 분기탱천한 원소군은 연이어 돌격을 반복했다. 맹렬한 용맹과 굳센 충성심을 겸비한 하북의 제장들은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면서 조조군을 상대로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나갔다.
“함진영, 끝까지 버텨내라!”
거구의 남성이 중엄한 목소리를 내지르면서 순우경의 파상공세를 막아섰다.
쿵! 쿠웅-!
보병들이 방패를 치켜들었다.
방어진형을 갖추면서 원소군을 저지했다.
노도처럼 진격하던 원소군은 함진영의 견고한 방어태세를 무너뜨리고자 삼면을 포위하여 공격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커헉!”
“젠장, 빌어먹을!”
함진영이 방패를 힘껏 휘두르면서 몰려들었던 원소군을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장창들이 쏘아졌다.
푸욱-! 푸부북-!!
찢어발기는 파육음이 울렸다.
승세에 도취되어 돌격하던 원소군 장졸들은 함진영이 내지른 반격에 핏물을 쏟아내면서 쓰러졌다.
“이럇!”
하얀 삵의 가죽을 목에 두른 여인이 창을 휘두르면서 조조군을 급습했다.
사예주 공방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달성했던 백마의종(白馬義從)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갑을 백색으로 통일한 기병부대가 전장을 돌파했다. 화살세례가 장대비처럼 쏟아졌음에도 백마의종은 용맹하게 조조군의 측면을 찔렀다.
“네 이년!”
“감히 만승천자의 군세를 공격하는가!”
후성과 성렴이 검을 치켜들면서 달려들었다.
저 계집이 대장이다.
창을 휘두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포식자로 군림하는 삵처럼 날렵하게 창을 휘두르면서 아군을 유린하고 있었다. 후성과 성렴은 백마의종의 공격을 막아내고자 대담하게 적장을 노렸다.
“크윽!”
차앙-!
창을 내지르면서 후성과 성렴을 동시에 밀어냈다.
그 뒤,
가세하던 조조군 무관들을 도륙했다.
“아악!”
“쿠웁…! 쿨럭!!”
수많은 장졸들을 유린했던 백마의종의 창끝이 번쩍이자 피분수가 울컥 쏟아졌다.
귀신이다.
날렵한 창술이 귀신과도 같았다.
무관들을 도륙했던 조운은 창격을 내지르면서 뒤로 밀려난 후성과 성렴을 노렸다. 매서운 실력자의 등장에 팔건장은 긴장된 반응을 보였다.
“조조!”
팔건장을 대적하려던 조운이 눈빛을 번뜩이면서 고개를 돌렸다.
근위병단의 호위를 받으면서 전장을 주시하는 흑발의 여인을 목격했다. 적의 총대장은 대담하게도 직접 진두지휘하면서 전세를 이끌고 있었다.
‘천하제일검이 보이지 않는다…! 하북사정주와의 결투에서 입은 부상 때문인가? 그렇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만인지적의 괴물이 없다.
본진에 머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결투에서 입은 부상 때문일까. 천하제일검을 볼 수 없었다. 아군으로선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잡졸들은 비켜라.”
“컥!”
조운이 내지른 창끝이 후성의 옆구리를 찔렀다.
푸욱-!
끔찍한 소리와 함께 핏물이 쏟아졌다.
후성의 옆구리를 찢어발긴 조운은 창끝을 뽑아내면서 성렴을 상대했다. 순식간에 치명상을 입어버린 후성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말에서 떨어졌다.
“잘했소, 조운 장군!”
“백마의종이 적진을 돌파했다!”
원소 휘하의 장수였던 한거자와 휴원진이 백마의종의 공격을 지원하고자 달려왔다.
팔건장을 상대로 용맹무쌍을 떨치는 조운의 모습에 자신감을 얻은 것일까. 한거자와 휴원진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서 단숨에 조조군을 격멸하려 했다.
‘전공을 빼앗길 순 없지!’
‘천하제일검의 심복들을 죽일 기회다!’
전공에 눈이 멀어버린 무장들은 애석하게도 전광석화처럼 달려오는 비장을 보지 못했다.
피를 쏟으면서 쓰러진 부하들의 모습에 비분강개한 비장은 금발을 나부끼면서 방천화극을 휘둘렀다.
“여포!”
“으, 으아아!!”
횡으로 내지른 방천화극을 목격한 한거자와 휴원진이 동시에 비명을 토해냈다.
땔나무를 반으로 쪼개듯,
상반신과 하반신이 양단된 채 무참히 날아갔다.
조운과 백마의종의 전공을 강탈하고자 대뜸 끼어들었던 장수들은 도리어 제 목숨을 재촉한 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야, 이 씨발년아! 내 부하들을 피투성이로 만든 게 너냐!!”
맹수의 포효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태산을 내려온 대호처럼,
금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흉흉한 기세를 발산했다.
인중여포 마중적토라고 불리는 괴물을 대적하는 상황에 직면한 조운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창을 들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