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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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들이 무위군의 암여우를 들이려는 장수의 행동에 우려를 표했다.
상대는 교활한 여우다.
더러운 중상모략을 일삼는 계집이 아닌가.
세 치의 혀로 주군을 현혹하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장수를 보좌하던 무관들은 경직된 표정을 지으면서 무도군의 암여우를 기다렸다.
“그간 무고하셨사옵니까.”
잿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인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했다.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미녀가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다가왔다. 고혹적인 미녀의 모습에 여러 무관들이 군침을 꿀꺽 삼켰다.
풍만한 가슴과 달콤한 살냄새.
사내의 육욕을 계속해서 자극했다.
엄격한 군기를 무장한 장수군이 아니었다면 사내들의 더러운 손길이 고혹적인 여체를 능욕했으리라.
“동향의 방문을 환대하오.”
장수와 가후는 둘 다 무위군 출신이었다.
조려현(祖厲縣). 고장현(姑臧縣).
고을은 달랐지만 척박한 환경의 무위군에서 태어나 무수히 많은 난관들을 뚫고 지금에 이르렀다.
만약 허도에서 온 사자가 가후가 아니라 다른 인물이었다면 즉시 목을 베었으리라. 장수는 동향에게 발언의 자비를 베풀어주었다.
“파강장군께서는 언제쯤 출진하시옵니까.”
가후가 물었다.
그에 장수가 입을 열었다.
“늦어도… 나흘 뒤에는 출진하려고 하오.”
유표군이 점거하고 있는 남양군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전하러 온 것이 분명하다.
조조군에서 파견된 전령들이 남양군으로 출진할 것을 계속 강요하지 않았던가. 틀림없이 가후도 출진을 재촉하고자 먼 길을 온 것이리라.
“소녀는 파강장군께서… 언제쯤 허도를 도모하려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옵니다.”
잿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간교한 눈웃음을 흘리면서 물었다.
네놈의 속내는 알고 있다.
분명 변절자들과 연합하여 허도를 도모하려는 것일 테지.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가후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장수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담담한 모습을 일관하려고 하였으나 낯빛이 아연실색으로 물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암여우 년이!”
“모두 간파하고 있었구나!”
가후를 노려보던 무관들이 칼자루에 손을 얹으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교활함에 물든 암여우의 목소리가 무관들의 불안감을 뒤흔들었다. 혈혈단신으로 군영을 출입한 여린 계집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말았다.
그래서 무관들은 가후가 주장의 근거들을 설명하기도 전에 이실직고하는 우행을 저질렀다.
“후후, 참으로 솔직한 무관들을 두셨사옵니다.”
가후가 한손으로 입가를 새침하게 가리면서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빈손으로 적진에 들어온 세객이었음에도 너무도 당당한 면모를 보였다.
“후우…. 그래서 할 말이 무엇이오?”
장수가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면서 물었다.
설마 다 알고 있다니.
대체 어떻게 간파했단 말인가.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결코 살려보낼 순 없다.
두 눈을 부릅뜨면서 암여우를 노려보았다.
“주군에게 전권을 위임받았사옵니다.”
“…전권?”
장수의 물음에 가후가 입을 열었다.
“혈육을 잃은 증오에 눈이 멀어버린 맹인의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을 기회를 말이옵니다.”
“지금 나더러… 맹인이라 했소?”
노여움이 뒤섞인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무관들이 기어코 칼자루를 뽑아들었다.
날카로운 칼끝을 늘어뜨렸다.
당장이라도 가후에게 달려들 것처럼 분위기가 흉흉했다.
우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주군에게 망발을 지껄이다니.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던 호거아도 경직된 표정을 지으면서 창을 치켜들었다.
“허도가 주인이 떠난 빈집으로 보이시옵니까.”
“…….”
“분명 주인이 집을 비웠지만… 주인에 충성하는 맹견들이 철옹성처럼 집을 지키고 있사옵니다. 필시 정적들의 거사는 실패로 끝날 것이옵니다.”
정적들이 획책했던 거사는 말벌들이 득실대는 벌집을 건드리는 것에 불과했다.
성공할 리가 없다.
애초에 이것은 ‘덫’이었으니까.
그림자에 숨어서 암약하던 정적들을 한꺼번에 일소하려는 조조의 계책이었다. 가후는 한때나마 같은 주군을 섬겼던 동향을 살리고자 혈혈단신으로 둔영까지 온 것임을 밝혔다.
“닥쳐라, 계집년아! 어디서 감히 주군을 기만하려고 하느냐!”
무관들 중 한 명이 날카로운 칼끝을 가후의 면전에 겨누면서 소리쳤다.
교활한 요설에 불과하다.
분명 주군의 마음을 흔들리는 수작이다.
다른 무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주군의 명령이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칼끝을 내지를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흩뿌렸다. 살의에 번들대는 시선들을 본 가후는 대수롭지 않게 눈웃음을 흘렸다.
“어찌하여 파강장군께서는 거머쥔 지복(至福)을 내던지고 흉화(凶禍)를 택하시옵니까. 계속 사공에게 충성하는 것만이 지복을 이어나가는 길이옵니다.”
거사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결국 실패로 끝날 것이며,
반기를 계획했던 인물들은 모두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리라.
결단을 앞둔 장수에게 지복과 흉화를 설명함으로서 득실을 따졌다. 이치와 실리를 설명하면서 계속 망설이는 장수를 독촉했다.
“효성이 지극하시기로 유명한 파강장군께서 숙모님의 안위를 외면할 리는 없고… 분명 정적들이 사전에 숙모님을 탈출시키기로 약조한 것일 테지요.”
경직된 낯빛을 바라보던 가후가 키득키득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과연 그들이 약조를 지키겠사옵니까.”
“분명 약조했소…! 사전에 숙모님을 허도에서 탈출시키겠다고!”
“반란을 꾀하는 무리들은 허영과 위선을 두른 소인배에 불과하옵니다. 그들이 과연 위험과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조건을 들어주겠사옵니까?”
“…….”
패국조씨 가문이 장악한 권력을 찬탈하려는 무리들은 허영과 위선을 두른 이상주의자에 불과하다.
과연 오만한 이상주의자들이 동탁을 추종했던 너를 신임해줄까?
천만에.
결국 토사구팽을 당하게 될 테지.
탁상공론을 지껄이면서 허무맹랑한 이상을 계속 주장하는 놈들에게 있어 무장들은 쓰고 버리기 좋은 칼잡이에 불과할 테니까.
“주군!”
장수가 얼굴을 바들바들 떨면서 가후의 촌철살인과도 같은 설득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때,
무관이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군막을 출입했다.
“조조군이 당도했습니다! 그런데 놈들이…! 공융 어르신을 볼모로 잡고 있습니다!”
“뭐라?!”
비명을 내지른 장수가 가후를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암여우 년,
대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게냐.
청천벽력처럼 경악스러운 급보를 들은 장수는 무관들과 군막을 나섰다. 급보가 과연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뒤로 물러서라!”
“다가오면 이 늙은이의 목이 떨어질 것이다!”
장수군의 둔영에 난입해온 조조군 병력은 불과 1백 명에 불과했다.
날카로운 칼끝을 뽑아든 조조군 병사들은 영천군에 안치되었던 공융을 붙잡고 있었다. 결코 좋은 목적으로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칼끝이 공융의 목덜미를 향한 채였다.
“결정하시옵소서, 파강장군.”
경악을 토해내던 장수에게 가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나를 베든가.
아니면 공융을 이 자리에서 죽이든가.
영천군에서 양국까지 죄인을 압송했던 조조군 병사들이 이윽고 공융을 진흙탕에 내던졌다. 머리가 산발이 된 노인은 금세 흙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파강장군의 노고를 덜고자 소녀가 친히 공융을 대령했사옵니다.”
“이런 미친년이…!”
가후의 경악스러운 속셈을 알아차린 장수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서 어르신을 모셔라.”
뒤에서 주시하던 호거아가 무관들에게 엄중한 어조로 명령했다.
무거운 엄명에 정신을 차린 무관들은 흙투성이였던 공융을 업었다. 무관들이 부축해준 덕분에 공융은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쿨럭…! 쿨럭쿨럭!!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악에 받친 상태였던 공융은 노발대발하여 소리치면서 부축해주던 무관들의 손길을 뿌리쳤다.
“파강장군께서는 진심으로 오만불손한 사대부와 호족들의 수족이 되려 하시옵니까. 결코 저들은 파강장군의 노력과 헌신을 알아주지 않을 것이옵니다.”
흙투성이가 된 채 꽥꽥 소리를 내지르는 공융의 모습에 장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처참한 몰골이 되었음에도 체면을 중시하는 면모가 실로 우스꽝스러웠다. 분명 가후는 일부러 공융의 치부를 보여주어 자신을 설득하려는 속셈이리라.
“그럼에도 표기장군에게 복수하는 길을 택하겠다면 소녀를 참하시옵소서. 하지만 파강장군에게 복수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다면 저 늙은이를 참하시옵소서.”
암여우가 속삭였다.
뇌쇄적인 목소리로,
오만불손한 늙은이를 참할 것을 권유했다.
대역무도의 상징과도 같은 공융을 참수한다면 충성심을 입증할 수 있을 터. 그리고 군세를 몰아 허도로 진격하여 반란군을 모두 일소한다면 일등공신의 반열에 오르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무엇을 망설이시옵니까. 파강장군에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오지 않았사옵니까? 어서 이 기회를 잡으시옵소서.”
변절을 주문하는 농밀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내렸다.
그에 장수는 망령에라도 홀려버린 것처럼 바들바들 떨리는 손길로 칼자루를 빼들었다.
스릉.
차가운 금속음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