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
적기에 당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성휘는 척후들을 동원하여 유표군을 동요시켰다.
표기장군 이성휘가 온다.
본인의 움직임을 의도적으로 적에게 흘린 것이다.
이성휘의 기만책에 휘말린 채모와 장윤은 사실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퇴각했다. 덕분에 사면초가에 직면했던 유비군은 가까스로 생환할 수 있었다.
“형주 전선에 가세하기로 했던 증원군은 어찌 되었습니까.”
흑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싸늘함을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수많은 부하들을 잃었다.
함께 해온 장졸들이 비명횡사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봐야만 했다.
도원결의를 나누었던 언니와 동생마저 잃을 뻔했던 위기를 겪었기에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당장이라도 병장기를 휘두를 것처럼 두 눈을 부릅떴다.
“형주 전선에 가세하기로 했던 증원군은 다시 사예주로 돌아갔다.”
“예?”
“안량과 문추가 삼군을 움직였다.”
원소의 필두무장들이 대군을 이끌고 사예주를 침략했다. 남양군을 점령한 유표군을 돕고자 군세를 일으킨 것이리라.
관우는 물론,
유비와 장비도 크게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왔던 북방의 패자가 태산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켰음에 전율이 일었다. 크게 긴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성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등과 한수가 장안성을 공격하고 있다.”
“서량마저 움직였단 말입니까….”
북쪽. 남쪽. 서쪽.
삼면에서 동시에 전쟁이 발발했다.
적대세력들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은 조조군은 크게 수세에 몰린 형국이었다.
이렇게까지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했던 상황이 과연 있었을까. 최악의 국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 원소군이 본격적으로 병력을 투입하지도 않았음에도 전선이 심상치 않았다.
전략의 실패를 힐문하려고 했던 관우는 풍전등화에 직면한 조조군의 상황에 입을 꾹 다물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관우가 한 걸음 물러섰다.
“되긴 뭐가 돼! 형주에서 다 죽을 뻔했다고! 우리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붉은 머리카락을 짧게 기른 소녀가 크게 일갈했다.
깊은 울분을 토해내듯,
두 팔을 붕붕 휘두르면서 소리를 내질렀다.
그 외침에 이성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과 불평을 충분히 공감한다는 의사였다.
“이해한다. 전선에서 많은 전우들을 잃었을 테니.”
유비군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전략의 실패로 벌어진 일이다.
군부를 대표하여 유비군에게 사죄해야 마땅하다.
처참한 몰골의 부상자들을 바라보면서 무거운 책임감을 통감했다.
“그럼 이제 표기장군은 어떻게 할 건가요?”
유비가 물었다.
그 물음에 이성휘가 입을 열었다.
“우선은 여남군에서 혼란을 수습할 생각이다. 내가 예주에서 버티고 있으면 유표군도 가벼이 움직이지는 못할 테니까. 게다가 원소군의 발호에 호응하여 준동할지도 모르는 여남군의 사대부와 호족들도 경계해야 한다.”
바깥으로는 유표군을,
내부로는 여남군의 토착세력들을 경계해야 한다.
모두 성가신 임무들이었다.
그럼에도 묵묵하게 임무를 수행하려는 이성휘의 모습에 유비는 감탄을 드러냈다.
“저희들이 도와드릴게요.”
기꺼이 조력하겠다.
유비의 협력의사에 이성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동생들과도 상의가 되지 않은 결정이었는지 관우와 장비도 황급히 맏언니를 바라보았다. 크게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도와준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격이다만….”
설마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협력의사를 내비칠 줄이야.
유비와 조조는 서로 껄끄러운 관계였을 터.
그럼에도 기꺼이 조력하겠다는 유비의 말에 이성휘는 의구심을 느꼈다.
‘유비군은 황실과 조정에 충성할 뿐일 텐데…. 애초에 조조에게 종속된 입장도 아니고. 물론 지금까지는 많은 도움들을 주었지만.’
의심이 들었음에도 유비의 제안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유비. 관우. 장비.
도원결의 세 자매들은 장차 큰 도움이 될 터.
치열한 격전으로 수많은 병력을 잃었음에도 유비군은 여전히 건재했다. 숙련병들을 추려낸다면 다시 전장에 투입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표기장군, 표기장군!”
“그래.”
두 눈을 반짝이면서 접근하는 장비. 그녀를 바라보면서 이성휘가 입을 열었다.
혹시 바라는 게 있는 걸까?
물론 있겠지.
항상 물욕에 앞서는 모습들을 보여줬으니까.
“이번에 진짜 개고생을 했는데… 혹시 벼슬이나 봉토를 하사해줄 생각은 없어요?”
“폐하에게 진언해보겠다.”
“하핫! 딱히 원해서 그러는 건 아니고…. 의욕을 얻기 위해서라고 할까? 웅대한 목표가 있어야 전투에서 열심히 싸우는 법이잖아.”
장비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실로 뻔뻔스러운 막내의 너스레에 관우는 천근만근처럼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낯짝이 얼마나 두꺼운 거냐.
노골적으로 벼슬과 봉토를 요구하는 동생의 모습에 도리어 본인이 수치심을 느낄 정도였다.
“괜찮지 않을까. 빠져나오느라 고생 많았잖아.”
“…언니.”
유비가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언니의 말에 관우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언니,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동생의 물음에 유비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여유가 넘쳐흘렀다.
부드러운 안정감을 주는 미소였다.
조조군에게 종속된 것처럼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언니의 모습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결국 언니의 설득에 결정을 용인하게 되었다.
* * *
장안성을 포위한 서량의 군벌들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총력을 쏟아냈다.
성벽을 넘으라.
놈들은 불과 수천에 불과하다.
광활한 벌판을 새카맣게 뒤덮었던 군세가 진격함과 동시에 공성병기들이 투입되었다.
운제(雲梯)와 충차(衝車)를 포함하여 여러 공성병기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장안성을 위협했다.
“이, 이놈들이! 어떻게 저 많은 공성병기들을…!”
기도위(騎都尉) 종진이 크게 소리쳤다.
대체 어떻게,
서량 놈들이 공성병기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공성병기를 제작하기 위해선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산짐승처럼 미개한 서량 놈들이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공성병기를 제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어찌 된 일이냐!”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놈들에게 저렇게나 많은 공성병기가 있는 것인지…!”
구르르르.
육중한 바퀴소리와 함께 공성병기들이 다가왔다.
흙먼지를 가득 나부끼며,
두터운 충차가 일직선으로 성문을 향했다.
충격적인 상황을 목격한 종진은 궁수들에게 집중사격을 명령했다. 충차를 미는 공병들을 사살할 생각인 듯했다.
“쏴라!”
“충차를 노려라!”
느린 속도로 접근하는 충차를 조준했다.
이윽고,
날카로운 화살비가 쏟아졌다.
매섭게 날아들었던 화살들은 충차를 끌던 공병들에게 적중했다. 단숨에 벌집이 되어버린 공병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뒤로 나가떨어졌다.
“당장 충차를 움직여라! 보병들은 어떻게든 충차를 엄호하라!”
마휴가 검을 휘두르면서 장졸들에게 명령했다.
성문을 뚫어라.
일격에 성문을 파괴해라.
새로 투입된 공병들이 충차를 움직이면서 성문으로 나아갔다. 곧이어 지척에 도달하게 된 충차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쿠우웅──!!
육중한 일격이 성문을 강타했다.
그러나,
성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방화에 소실된 이후에 새로 지어졌는지 장안성의 성문은 충차의 일격에도 완강하게 버텨냈다.
도리어 돌진했던 충차가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본 마휴는 이를 빠득 갈면서 재차 성문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다, 다행히 버텨내는 모양입니다….”
“계속 버텨주길 바랄 수밖에.”
장안성은 대방화를 겪었던 이후에 재건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허물어진 성문을 새로 지었으며,
반쯤 무너졌던 성벽들을 다시 쌓아올렸다.
지금까지 쌓아올렸던 노력들이 결코 헛되지는 않았는지 적들의 파상공세를 묵묵히 버텨냈다. 종요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치열한 공방전을 응시했다.
“사, 상서복야!”
종요를 호위하던 무관이 돌연 소리쳤다.
푸화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관이 쓰러졌다.
돌풍처럼 날아든 화살에 머리가 뚫렸다.
상서복야 종요를 엄호하고자 몸을 내던졌던 무관은 머리가 터진 채 핏물을 울컥울컥 쏟아냈다.
“어서 방패를 들어라!”
“무관들은 상서복야를 철통같이 엄호하라!”
두터운 갑주를 걸친 근위병들이 방패를 치켜들면서 종요를 호위했다.
타앙-! 타앙-!!
그 뒤로 몇 번이나 화살이 날아들었지만 방패를 뚫진 못했다.
안전해진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장수들은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기에 경황이 없었던 듯했다.
“누, 누가 상서복야를 노렸단 말이냐!”
종요를 호위하던 장수가 소리쳤다.
감히 한나라의 상서복야를 위협하다니.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장수는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는 이면을 보였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성루에 있는 상서복야를 노렸단 말인가.
호위하던 무관이 본능적으로 몸을 내던지지 않았다면 상서복야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종요를 보필하던 장수들은 겁에 질린 모습을 보였다.
* * *
장안성의 성루에 활을 조준했던 여장부가 머금었던 숨을 내뱉으면서 입을 열었다.
“후우…. 죄송합니다, 아가씨.”
탐스럽게 기른 보랏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성이 숙연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아가씨라고 불린 여걸이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위협만으로도 충분해.”
“하지만….”
“설마 저 성루까지 화살이 도달할 줄이야. 과연 신궁이라 불릴 만한 실력이네, 영명.”
“과찬이십니다.”
마초의 칭찬에 교위(校尉) 방덕이 고개를 숙였다.
아쉽게 빗나갔다.
만약 무관이 막지 않았다면 목숨을 거둘 수 있었을 터.
쉽게 이길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서량의 신궁이라 불리는 방덕은 일말의 안타까움을 머금은 시선으로 장안성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