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
만약 원소군이 조조군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복속시키게 된다면 유표군은 남방의 패자로 군림하게 될 것이었다.
막아야 한다.
어떻게든 그를 저지해야 했다.
유표는 부친 손견과는 철천지원수였다.
전임 형주자사였던 왕예가 원술에게 시살되었던 사건에 부친이 깊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표가 남방의 패자에 등극한다면 강동을 전면적으로 침략해올 것이다. 형주의 늙은이는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오군손씨 가문을 멸족시키려 할 테니.
놈이 발호하게 둘 순 없다.
강동의 투희(鬪姬)가 검을 뽑아들었다.
“강동의 용사들이여! 형주를 공격하라!”
손책이 강하군(江夏郡)를 급습했다.
친우 주유와 1만의 군세를 이끌고서 강하군을 침공한 손책은 계속해서 연승을 이어나갔다.
실로 압도적인 승전보였다.
강하군의 성과 요새들이 하나둘씩 손책에게 떨어졌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형주 호족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어야 했다.
“다 덤벼라!!”
백금발을 늘어뜨린 소녀가 사나운 고함을 내지르면서 적진에 뛰어들었다.
한 마리의 호랑이처럼,
무수히 많은 적들을 상대로 물러섬이 없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유표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강하군을 휩쓸면서 연전연승을 달성한 손책은 형주의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아름다운 맹수가 용맹을 떨칠 때마다 강하태수 황조는 점점 수세에 내몰렸다.
“백부, 너무 성급하다.”
“최대한 속전속결로 끝내야지!”
본대를 지휘하던 주유가 전장을 종횡무진하던 손책에게 다가와 우려를 표시했다.
그럼에도 손책은 아랑곳 않고 파상공세를 이어나갔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유표군의 주력군단들이 남양 전선에 발목이 붙잡힌 지금이야말로 형주를 도모할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손책은 아버지에게 형주의 모든 군현들을 바치겠다는 일념하에 강하군을 정복했다.
지금의 형주는 빈집이나 다름없었기에 불과 보름도 안 되어 강하성(江夏城)을 제외한 대부분의 군현들을 제패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강하성이다!”
“황조! 썩 나와서 목을 내밀어라!”
연속된 승전으로 한껏 분기탱천한 강동의 병사들이 병장기를 치켜들면서 소리쳤다.
강하군의 성들을 점령했으며,
황조를 따르는 장졸들을 연이어 패주시켰다.
손책과 주유는 응전하기를 포기하고 강하성에 숨어버린 황조를 몰아세웠다. 어린 계집에게 완패를 당해버린 황조는 이를 빠득 갈면서 지원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손견의 딸년이라고 하더니! 원술의 무부 노릇이나 하던 제 애비를 닮아 무식하기 짝이 없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는 사실이 황조의 심기를 자극했다.
이 황조가,
관례도 치르지 않은 계집아이에게 지다니…!
양양군에서 지원군이 도착하기만 하면 곧바로 되갚아주겠다.
부장 한희와 진취를 소집한 황조는 적의 공격에 대비할 것을 명령했다. 강하성의 두터운 성벽에 의지하여 장기전으로 몰고 가겠다는 전술이었다.
“곧 형주자사가 돌아올 겁니다.”
“빈집을 노리고 들어온 저 쥐새끼들은 형주의 주력군단이 돌아오자마자 강동으로 내빼지 않겠습니까.”
두 부장들이 황조를 위로하듯 말했다.
놈들은 쥐새끼다.
번견들이 돌아오면 도망칠 수밖에 없을 터.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손견군은 야전에만 능할 뿐이지 공성전에는 현저하게 미숙했다. 그것을 간파한 황조는 철옹성이라 불리는 강하성에 모든 전력을 집중한 채로 수성전에 대비했다.
“아버지!”
황조의 아들, 황역이 다급한 기색을 보이면서 다가왔다
“남군(南郡)이 적들의 총공세를 받고 있습니다.”
“뭐, 뭐라…!”
강하군과 동시에 남군이 손견군의 파상공세를 받고 있다는 급보에 황조가 놀라 소리쳤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
놈들의 아예 작정을 한 듯,
북형주의 두 군현들을 동시에 급습했다.
실로 대담하면서 무모한 침공이었다.
강동의 독종들은 형주를 최대한 털어먹을 목적으로 침공에 모든 전력을 동원했다. 자신을 한없이 비참하게 만드는 손견군의 공세에 황조는 분개를 토해냈다.
“유경승, 참으로 한심스러운 작가 같으니…! 쥐새끼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모든 병력들을 끌고 나갔단 말인가!”
풍전등화의 상황에 직면한 황조가 유표의 어리석은 만용을 지적했다.
남양 공방전에 모든 주력군단들을 투입시키면 손견군은 대체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만용의 결과가 바로 이 참상이다.
어리석은 행동을 내린 탓에,
강하군의 고을들은 무도한 쥐새끼에게 짓밟히고 말았다.
연패를 당한 황조는 책임을 유표에게 떠넘겼다.
강하군의 군벌이었던 황조는 형주자사 유표와 동맹관계일 뿐이었기에 그의 만용을 매몰차게 지적했다.
* * *
사방에서 적들이 달려들었다.
짐승처럼 고함을 내지르며,
무자비하게 전장의 생명들을 유린했다.
유비군과 유표군의 싸움은 죽음과 살육이 난무하는 각축장과 같았다. 전투의 광기에 물든 병사들은 시산혈해 속에서 계속 도륙을 이어나갔다.
“이 벌레 같은 놈들!”
“나라를 훔치려는 더러운 역적아!”
신야성의 병참기지들을 불태운 도둑놈들.
황위를 찬탈하려는 대역죄인의 무리들.
서로를 죽일 이유로 충분했다.
창검을 휘두르면서 시산혈해를 쌓아올렸다.
“아아, 아아….”
각축장의 중심에 선 백발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얼굴을 붉히면서,
황홀경에 젖어버린 신음을 나지막이 흘렸다.
사방을 장악한 죽음.
사방을 뒤엎어버린 피비린내.
뜨거운 눈길로 전장을 응시하면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귀 큰 년이다!”
“당장 저 년을 죽여라!”
야생의 들개처럼 잔인하고 흉포한 적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달려들었다. 그들의 눈에는 오로지 살의만이 넘쳐흘렀다.
붙잡히면 어떻게 될까.
분명 죽임을 당하겠지.
어쩌면 온갖 치욕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무자비한 적들에게 붙잡힌 이후를 상상했던 유비는 군침을 꿀꺽 삼키면서 쌍검을 늘어뜨렸다.
“크하악!”
“이, 이 괴물 같은 년…!”
촤아악-!
쌍검을 휘두르면서 혈선을 각인할 때마다 유표군이 잔인하게 쓸려나갔다.
날카로운 칼끝이 살덩이를 찢어발길 때마다 검붉은 피분수가 솟구쳤다. 토끼 귀의 머리장식을 한 여성이 날뛸 때마다 유표군은 아연실색하는 반응을 보였다.
“더… 더 해봐. 아직 부족하단 말이야.”
백발의 여인이 희열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살의?
아니다,
붉은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살의가 아니었다.
광기라고 불러야 마땅하겠지.
자신을 더욱 거칠고 혹독하게 몰아세워달라고 주문하면서 죽음을 휘두르는 그 행동이 대체 광기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겨우 이따위로 나를 죽이려고 했어? 부족해. 나를 떨어트리려는 잔악함이 부족하다고.”
아름다운 백발을 핏물로 물들였던 여인이 유표군을 노려보면서 중얼거렸다.
부족하다.
이 정도로는 안 된다.
진정한 ‘파멸’이 될 수 없으니까.
복수심에 물든 유표군에게 생포되어 온갖 치욕들을 당하게 될 것을 상상한 유비는 달콤한 숨결을 흘리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부탁했다.
“이런 미친년이…!”
“머리가 돌아버린 게 분명하군!”
당장에 목숨을 구걸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죽여 달라고 간원하고 있다.
미쳤다.
드디어 미친 게 분명했다.
유표군 장졸들은 유비를 미친 계집으로 매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육욕에 물든 시선을 보냈다.
자신에게 파멸을 내려달라며 부탁하는 계집을 유린한다면 어떤 쾌락을 얻을 수 있을지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형장에 내건 다음에 범해주마!”
“네년은 앞으로 한평생 우리들의 성처리나 해야 될 거다!”
유표군 장졸들의 시선이 추잡스럽게 물들었다.
그에,
유비는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흘렸다.
한심한 졸장부들에게 곧 범해지겠지.
잔악한 살의와 추잡한 육욕에 빠져버린 사내들에게 범해지는 것을 상상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자신을 철저하게 망가뜨릴 파멸이 눈앞에 다가왔으므로.
“아하하!”
망가진 눈으로 다가오는 파멸을 환영했다.
두 팔을 크게 뻗으며,
자신의 취향대로 완성된 파멸을 받아들이려 했다.
“전군 퇴각하라!”
“표기장군 이성휘가 오고 있다!”
하지만 고대하던 파멸은 이뤄지지 않았다.
파멸조차 두려워하는 괴물이,
만천하의 모든 군벌들이 두려워하는 최강의 무인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척후들로부터 급보를 들은 채모는 모든 장졸들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낙양에서 십만 대군을 무자비하게 몰살시켰던 천하제일검이 오고 있다. 만약 조조군과 전면전을 치르게 된다면 몰살을 피할 수 없으리라.
괴물이 온다.
당장 예주를 탈출해야 했다.
위기를 느낀 채모는 장윤과 함께 곧바로 전장을 벗어났다.
* * *
이성휘가 도착했을 때는 상황이 끝난 뒤였다.
결국 유표군은 철수했으며,
필사의 도주를 이어나갔던 유비군은 일부나마 생존에 성공했다.
안타까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던 이성휘는 도원결의 세 자매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치열한 각축전이 있었음을 증명하듯 그녀들의 행색은 실로 처참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핏물을 뒤집어쓴 그녀들의 모습이 처절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뭔가 아쉬워하는 눈빛이다만.”
“설마요.”
이성휘가 물었다.
그에 유비는 야속하다는 눈초리를 보내면서 토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