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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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강군(九江郡)과 여강군(廬江郡) 일대에서 계속 병력을 증강해온 유비군 세력이 준동했다.
강동에서 손견군이 거병했던 이후부터 양주 전선에 집중해온 유비군은 황실의 명령을 받아들여 유표군을 견제하는 임무에 투입되었다.
총 3만의 군세가 움직였다.
좌장군(左將軍) 유비가 형주 전선으로 출진했다.
“군함에 승선하라!”
“지금부터 형주 전선으로 출정한다!”
구강군에 주둔하던 유비군이 수로를 이용하여 단숨에 예주로 이동했다.
수백 척의 군함들이 패하(沛河)를 가로질렀다.
돛을 펼쳐낸 군함들이 장사진을 형성하면서 일제히 이동하는 모습이 실로 장관이었다.
유표군의 발호에 대비하여 조조군은 수춘성의 유비군에게 군함들을 건조할 것을 명령했다. 예전부터 대비해온 덕분에 유비군은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드디어 대규모 전쟁이네! 암, 역시 이래야지!”
갑판에 오른 여장부가 장팔사모를 세차게 찍으면서 고양된 표정을 지었다.
전운이 감돌았다.
혈류가 빠르게 몰아치는 듯했다.
좀스러운 소규모 국지전이 아니다.
천하의 향방을 좌지우지할 거대한 전쟁의 시발점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방심하지 마라. 상대는 남방의 대군벌이다.”
흑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무거운 목소리로 의동생에게 충고했다.
상대는 유표군이다.
지금까지 싸운 상대들과는 격이 달랐다.
십만 대군을 보유한 유표군과 전면전쟁을 치른다면 미증유의 피해가 뒤따를 터. 관우는 장비와는 정반대로 매우 엄숙한 반응을 보였다.
“또 잔소리야.”
“잔소리로 취급하지 마라! 새겨들어라.”
“네, 네.”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건성으로 대꾸하는 여동생의 반응에 관우가 두 눈을 부릅떴다.
대체 언제쯤 철이 들려는지.
철부지 같은 모습에 한숨을 토해냈다.
동생에게 충고한 뒤에 장졸들을 엄중하게 감독하던 관우는 고개를 돌려 언니를 바라보았다.
갓 내려앉은 눈송이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은 뱃머리에서 바람을 만끽하고 있었다.
“운장.”
“예, 언니.”
맏언니의 부름에 대답했다.
예를 취한 관우는 언니의 분부를 기다렸다.
“길고 길었던 고요의 밤이 끝나고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됐어.”
“그렇습니다.”
폭풍전야의 고요는 끝났다.
이제,
천하를 집어삼킬 폭풍이 시작될 터이니.
거대한 전면전을 예견한 유비는 의미심장한 반응을 보이면서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장사진을 펼치면서 패하를 가로지른 유비군 선단은 여남군을 통과하게 되었다. 곧 유표군의 세력권인 신야(新野)에 도착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거친 폭풍 속에서 길을 잃게 될지도 몰라.”
“저와 익덕이 언니를 끝까지 보필할 겁니다.”
강한 의지가 담긴 여동생의 대답에 유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를 휩쓸고 지나갈 폭풍 속에서 과연 우리 자매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것은 누구도 모를 일이다.
폭풍 속에서는 그 무엇도 장담할 수 없을 테니.
심사숙고를 거듭하면서 상념에 잠겼던 유비는 자신을 바라보는 동생들을 바라보면서 이윽고 일생일대의 선택을 내렸다.
“가자, 풍운으로.”
유비군이 의양(義陽)에 상륙했다.
잠시 군세를 정비한 뒤,
활을 떠난 화살처럼 곧바로 신야성을 들이쳤다.
남양 공방전에 개입해온 조조군을 견제하고자 완성에 집중하던 유표군은 신출귀몰하게 등장한 유비군의 급습에 허를 찔리게 되었다.
“대체 어디서 온 놈들이냐!”
“유비군…! 유비군이라고 합니다!”
신야성은 번성의 물자를 남양군 전선으로 수송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병참거점이었다.
후방에서 병참을 담당하던 진취는 유비군의 급습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유비군이 등장할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병참을 지키는 병력은 고작 5천.
게다가 병력들의 대다수가 물자를 운반하는 공병들이었다.
수많은 전장들을 누빈 숙련병들로 구성된 유비군을 대적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유표의 졸개들을 쳐라!”
흰 갈기를 가진 백마를 탄 유비가 소리쳤다.
날카로운 칼끝을 치켜들며,
우왕좌왕하며 동요하는 유표군을 노려보았다.
맏언니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두 여동생들이 지휘하는 군세가 신야성을 강타했다. 신야성에 비축된 병참들에 불을 지르면서 유표군에게 일격을 먹였다.
“다 태워라!”
“한 톨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태워라!”
횃불을 든 유비군 무관들이 신야성을 누볐다.
검은 연기가 계속 치솟았다.
청명하던 하늘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신야성을 급습한 유비군은 병참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불살라버렸다. 번성에서 최악의 참사를 듣게 된 유표는 비분강개하며 출격을 명령했다.
* * *
유표를 국적(國賊)으로 선포한 조조군은 그의 관직과 봉토를 몰수하는 등의 강경책에 나섰다.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남양군을 점령함으로서 북형주를 완전히 통일한 유표군을 연이어 압박했다.
결코 유표는 유화책이 통할 위인이 아니다.
형주의 교만한 너구리는 황위를 찬탈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수의 귀순을 받아들이고 유비군을 동원하여 신야성을 공격하는 식으로 유표군을 몰아붙였던 조조군은 조정과 의논하여 더욱 강경한 대응에 나서고자 했다.
“아빠! 아빠!”
조정과 군부가 유표군에 대응하고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을 때,
이성휘는 딸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장녀 조비.
제 엄마를 쏙 빼닮은 딸내미였다.
올해로 두 살을 맞이한 패국조씨 가문의 장녀가 뒤뚱뒤뚱 걸으면서 부친에게 매달렸다.
“그래.”
이성휘가 손을 뻗으면서 사랑스러운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게 살갑게 구는 것처럼,
부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래줬으면 좋으련만.
오로지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에게만 온순한 내면을 보여주는 그 성정이 조조와 판박이였다.
홍옥처럼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이성휘가 쓴웃음을 지었다. 동전을 주조해낸 것처럼 딸아이가 너무도 아내를 닮았기 때문이다.
“주군, 전선에서 올라온 급보이옵니다. 좌장군 유비가 신야성을 급습하여 큰 성과를 올렸사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군.”
이성휘가 머물던 안방에 잿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들어왔다.
태중대부(太中大夫) 가후였다.
군부를 지휘하는 이성휘에게 반드시 전해야만 하는 급보였기에 무례를 무릅쓰고 소식을 전했다. 그에 이성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그르르르!!”
다정한 아버지에게 안기면서 사랑스러운 애교를 보여주던 조비가 사나운 울음소리를 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음란한 자태의 색녀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사나운 짐승처럼 행동하는 아가씨의 모습에 가후는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무슨 어린애가….’
과연 조조를 빼닮은 딸아이라는 건가.
적의를 드러내는 조비의 모습은 악몽에서나 등장할 것처럼 사나웠다.
겨우 두 살짜리가,
이렇게 사나워도 되는 걸까.
만약 부친이 없었다면 사나운 성격머리를 고스란히 드러냈으리라.
“유비가 양주 전선을 비웠다는 사실이 강동에 알려지면 손견군이 틀림없이 준동할 거다. 유복을 양주자사로 파견하여 전선을 지휘하도록 해라.”
“알겠사옵니다.”
손견군이 유표군과 동맹을 체결한 원소군을 지원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전임 형주자사였던 왕예가 원술과 손견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형주자사에 임명된 유표는 원술과 손견의 무도한 만행을 규탄한 바가 있었다.
비록 원술은 죽었으나,
유표는 원술과 동맹하여 형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손견을 철천지원수처럼 여겼다.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결코 ‘절대’라는 것은 없다.
이해타산에 따라 가담과 배신을 반복하는 난세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유표와 손견,
과연 그들은 어떻게 나올까.
북쪽의 원소군만큼이나 유표군과 손견군 또한 결코 만만치 않은 난적이었다.
“아빠, 쟤 시러!”
흑발의 유녀가 가후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
옹졸한 마음을 보여주듯,
아랫입술이 대빨 튀어나온 상태였다.
만약 여기서 잘못을 지적한다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대성통곡을 터트릴 터. 벌써부터 남다른 성격머리를 자랑하는 딸아이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빠아! 아빠아아!!”
자신을 방관하듯이 음란한 자태의 치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못마땅함을 느낀 조비가 소리쳤다.
옷소매를 꾹 움켜쥐며,
바닥을 나뒹굴듯이 온몸을 흔들어댔다.
하지만 격렬한 어리광에도 불구하고 이성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견군 뿐만 아니라 서량의 마등과 한수가 혼란에 편승하여 군세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 철저히 경계태세를 갖출 수 있도록 다시 장안성에 파발을 보내라.”
“아, 알겠사옵니다…! 영예로우신 주군.”
왁왁 소리를 내지르며 발광하는 조비. 그럼에도 이성휘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상대는 이성휘다.
천하의 조조도 결국 고집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사내였으니까.
딸아이의 거친 어리광에도 망부석처럼 꿈쩍조차 하지 않는 모습에 아연실색한 낯빛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