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
원술군을 멸망시키고 동탁의 잔당들이 점령했던 삼보 지역을 평정한 조조군은 오랜 휴식기에 돌입했다.
둔전(屯田)에 박차를 가했으며,
또한 허도를 중심으로 농업과 상업을 발전시켰다.
여러 제도들을 반포하여 지방 군현들과의 결속력을 강화했다. 특히 두 군벌들이 다스렸던 예주와 서주의 선정에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다.
“만형자(蔓荊子)를 1주일 동안 달여서 마시면 두통이 떨어질 게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조조의 선정으로 중원이 태평성대를 이어가고 있을 때, 유변은 태의(太醫)들에게 의술을 배우고 있었다.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
약재들을 달달 외울 정도로 의술에 매진했다.
황제는 궁궐의 약재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내의부(內醫部)에 거의 살다시피 했다. 궁인들이 약을 구하러 올 때마다 손수 나서서 탕약을 지어줄 정도였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의술에 목을 매는 걸까.
환관과 궁녀들은 물론,
황제를 순종적인 꼭두각시로 만들었던 조조도 영문을 몰라 하고 있었다.
“폐하, 어찌 태의들의 일에 전념하십니까.”
광록대부(光祿大夫) 양표가 다가와 물었다.
한나라의 만승천자가,
어찌하여 약재들이나 손질하고 있단 말인가.
촘촘한 가시들이 박힌 땅두릅을 손질하는 만승천자의 모습에 양표는 안절부절못하는 반응을 보였다.
“석류피(石榴皮)일세. 여성에게 좋다더군. 석류피를 달인 다음에 꿀을 넣어 마시게.”
“예, 예….”
얼떨결에 황제로부터 여성에게 좋은 약재를 건네받은 양표는 머뭇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와 딸에게 건네주면 좋아하겠지.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조정대신들을 대표하여 내의부에 온 양표에게는 황제를 대전으로 복귀시켜야 하는 사명이 존재했다.
황제가 한 달이 넘도록 대전을 비워버린 탓에 황태제(皇太弟) 유협이 어전회의를 주도하고 있었다. 차마 황제를 이대로 방치할 수만은 없었기에 조정대신들이 양표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곧 양위를 할 것일세.”
유변이 가위로 고련피(苦楝皮)를 싹둑 자르면서 말했다.
머지않아 양위할 것이다.
이복동생에게 황위를 넘기겠노라고 입장을 밝혔다.
그에 양표는 예를 취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양위의 뜻을 밝힐 줄 몰랐는지 양표의 얼굴이 황망함으로 물들었다.
“폐, 폐하…! 어찌 그러시옵니까!”
이립(而立)도 넘기지 않은 젊은 나이다.
앞날이 구만리건만,
어찌 벌써부터 양위를 운운한단 말이던가.
당장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의 중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황위를 내려놓겠다니.
더 이상 속세에 미련이 없다는 듯이 해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변의 모습에 양표가 어깨를 떨었다.
“이제 그만 내려놓고 싶네.”
한 번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옥좌에 욕심을 냈던 적이 없었다.
어머니와 숙부의 욕심에 떠밀리듯 만승천자에 즉위했던 유변은 환난과 역경을 수차례 거치면서 깊은 회의를 품게 되었다.
“짐을 만승천자에 즉위시키고자 어머니와 숙부께서 부단히 노력하신 것을 알지만… 앞으로의 태평성대를 위해 기꺼이 옥좌에서 물러날 것일세.”
어머니와 숙부가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정적들을 모두 제거한 끝에 얻어낸 옥좌였다.
아들을 황제로 만들고자,
조카를 만승천자에 즉위시키고자.
무수히도 많은 위험과 어려움을 극복하고서 옥좌를 쟁취해냈음을 유변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변은 결국 양위를 선택했다.
‘모후의 기대를 무너뜨린 이 불효를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분명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태평성대를 이끄는 위대한 제왕이 되기를 원하셨을 터.
하지만,
그것은 실로 이기적인 야망에 불과했다.
무자비한 축생도에 허덕이던 백성들이 이제야 겨우 태평성대를 되찾았다. 만약 자신이 헛된 야망을 추구한다면 백성들은 다시 참화에 휩싸이게 될 터였다.
백성들의 안위와 평화가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유변은 마지막까지 꼭두각시로서의 역할을 지키겠노라고 결심했다.
* * *
패국조씨 가문의 권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아니,
더욱 철옹성처럼 굳건해졌다.
2년의 세월 동안 내정을 다스리면서 권력을 독점해온 패국조씨 가문은 친족 중심으로 조정과 군부를 운영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안녕하세여, 할부지.”
의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아이가 고개를 숙이면서 꾸벅 숙이면서 인사했다.
눈에 넣어도 전혀 아프지 않을 귀여운 손자에게 인사를 받은 중년 남성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앙이도 잘 있었느냐?”
“네엡.”
“하하핫! 기특하기도 하지!”
조숭은 천하를 거머쥔 사람처럼 환열을 머금으면서 대소했다.
어찌 기쁘지 않을까.
귀여운 손자가 어떤 잔병치레도 없이 세 번째 생일을 무사히 맞이한 날인데.
1년을 못 넘기고 요절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에 지금까지 전전긍긍하며 손자의 건강을 염려했다.
노심초사하며 걱정했던 덕분에 조앙은 하루가 멀다 하고 쑥쑥 자라났다.
“네 아비를 꼭 빼닮았구나.”
“히히.”
한과를 우물우물 먹기 시작한 손자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첫 아들은 원래 아버지를 닮는다고 했던가.
그 말을 증명하듯,
패국조씨 가문의 손자는 한 살씩 먹을 때마다 이성휘를 점점 닮아갔다.
마치 동전을 푹 찍어낸 것처럼 닮았을 정도였다.
“으음, 맹덕을 닮았어도 좋았겠지만….”
조숭이 침음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으면서 말을 삼켰다.
혹시라도 말이 씨가 될지도 모른다.
선계에서 내려온 동자처럼 귀여운 손자가 혹시라도 딸아이처럼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변할까 우려를 금치 못했다.
“드세요, 할부지.”
엿기름을 졸여낸 과자를 먹던 조앙이 할아버지에게 과자를 하나 내밀었다.
그에 조숭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우리 앙이는 누굴 닮아서 이리 기특할꼬.”
“할아부지!”
손자의 기특한 대답에 할아버지의 부드러운 미소는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누구를 닮아 이리 귀여운 걸까.
분명 부모를 안 닮은 것은 확실했다.
만약 성격까지 부모를 닮았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때 살아남아 정말 다행이구나….”
“예엡?”
“아니다, 아무것도.”
만약 그때 서주의 도적들에게 살해당했다면 귀여운 손자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겠지.
다행이다.
그 살육극에서 살아남아 다행이었다.
두 눈을 또랑또랑하게 빛내면서 유밀과를 우물대는 손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매일 손자의 얼굴을 볼 때마다 조숭은 안도의 한숨을 흘리고는 했다.
“어머니는 지금 어디 있느냐.”
“바빠요.”
“그럼 아버지는?”
“바빠요.”
“동생은?”
“으응…. 우느라 바빠요.”
이 무슨 삭막한 집안이란 말인가.
조앙의 대답에 조숭은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앙아!”
“이모!”
할아버지와 손자가 이야기를 나누던 훈훈한 공간에 흑발의 여인이 다가왔다.
이모이며,
동시에 엄마이기도 한 조홍이었다.
주인을 발랄하게 맞이해주는 강아지처럼 조앙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쪼르르 달려가 조홍에게 폭 안겼다.
“우리 조카님, 이모가 용돈 줄까요?”
“네에!”
귀여운 조카의 답변에 조홍은 금괴를 꺼내들었다.
조카이며,
동시에 아들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조홍은 조앙을 금지옥엽처럼 귀여워했다.
물론 그 애정이 과할 때가 많았지만 말이다.
* * *
조앙은 매우 영특하고 순한 성격이었다.
인사성이 밝은 것은 물론,
누구에게나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친절하게 인사할 정도로 사교성 또한 좋았다.
대체 누구를 닮은 걸까.
일단 양친을 모두 안 닮은 것은 틀림없었다.
생기발랄하게 웃으면서 인사하는 아이를 볼 때마다 시녀들은 하늘의 신묘한 이치에 감탄을 토해냈다.
“빼애애애애액!!”
반면,
애석하게도 장녀는 모친을 쏙 빼닮고 말았다.
여장부가 될 기질을 타고 났는지,
올해로 두 살이 된 패국조씨 가문의 손녀는 당장이라도 자지러질 것처럼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무슨 호랑이를 데려왔나…?
팔다리를 동동 구르면서 울음을 쩌렁쩌렁 터트리는 여자아이의 모습에 시녀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짜잔, 아가씨가 좋아하는 약과예요!”
“씨러어어어어어어어어!!!!”
“그럼 우리 아가씨가 좋아하는 숨바꼭질은 어떨까요?”
“히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지금의 광경을 신혼부부들이 보았다면 결코 아이를 낳지 않겠노라고 단심했으리라.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
바닥을 나뒹굴며 울음을 터트리는 여자아이의 모습은 출산율을 떨어트리기에 충분했다.
조조와 이성휘의 장녀.
조비.
벌써부터 장래가 궁금해질 정도로 싹수가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상상 이상이네요.”
“…분명 주공을 쏙 빼닮았을 거야.”
아가씨의 광분을 지켜보던 시녀들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데굴데굴-!
포효하던 조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혹시라도 아가씨가 다칠까 시녀들이 바쁜 발걸음으로 뒤따랐다.
만약 곱상한 얼굴에 조그마한 생치기라도 생긴다면 조조의 노여움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할 것이기에.
“아, 아가씨! 도련님께서 곧 오신대요!”
급히 달려온 시녀가 소리쳤다.
“오빠!”
그에 조비가 울음을 뚝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