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4화 〉 막간. 패국조씨 가문의 나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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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를 밥에 말아먹은 듯한 흑발의 여인이 두 근위병들에게 붙잡힌 채 집무실에서 추방되었다.
본인은 억울하다는 듯,
흑발의 여인이 결백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 언니! 저는 언니를 위해서…!”
마지막까지 사촌언니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결국 조홍은 근위병들에게 궁궐 바깥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사촌동생의 추태를 보며,
집무실에 정좌한 채 사무를 살피던 조조는 크게 불편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저 년이 첫 번째 원흉이었지.”
불륜녀 1호.
남편의 첫 경험 대상.
사랑하는 남성을 유혹한 첫 번째 도둑고양이.
불륜의 불씨가 저 발칙한 사촌동생에게서 촉발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조조는 이를 빠득 갈면서 조홍이 건넨 죽간을 내던져버렸다.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을…
아니,
기름을 콸콸 끼얹는 것도 아니고.
무려 2년의 세월 동안 이성휘를 일편단심으로 짝사랑해온 조조의 입장에서는 열불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속…, 고집불통처럼 고집을 피울 수만은 없겠지.”
조홍과 조인,
태원왕씨 가문의 수양딸을 보며 생각했다.
더 이상 이성휘를 독점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고.
천하의 난봉꾼인 남편은 두 사촌동생과 낙양제일미를 안았다. 그리고 휘하 장수들과도 관계를 맺었다.
결코 이성휘는 그녀들을 포기하지 않으려 할 터.
자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듯이,
또한 관계를 맺은 여인들을 끝까지 책임지려 할 것이 분명했다.
“낙양제일미가 성휘의 아이를 임신했듯… 결국에는 자렴과 자효도 성휘의 아이를 가질 테니.”
아량. 자비. 양보. 감수.
독점욕의 화신이었던 조조에게 있어 그것들은 철저히 등한시해온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남편에게 많은 폐를 끼치고 말았다.
물론 자신을 속이고 여러 여성들과 몰래 관계를 맺은 난봉꾼 남편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겠지만.
여러 사건들을 통해 더 이상 남편을 독점할 수만은 없게 되었음을 인지한 조조는 조홍의 의견이 점차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괘씸하군.”
의견에 일리가 있다고 내심 생각했음에도 사촌동생을 내쫓은 이유는 단 하나,
그냥 ‘꼴 보기 싫어서’였다.
사랑하는 남편의 처음을 약삭빠르게 가로챘던 탕녀 주제에 다짜고짜 ‘분할’을 지껄이니 화가 날 수밖에.
“후우….”
활활 타오르는 마음속의 열불을 꺼트리려는 것처럼 조조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뒤,
바닥에 내던졌던 죽간을 다시 집어들었다.
“더 이상 성휘에게 폐를 끼칠 순 없으니.”
목숨을 다해 아버지와 일가친척들을 구해주었다.
또한,
잘못된 길에 빠지려 했던 자신에게 몇 번이고 손을 뻗어주었다.
그는 천하에 다시없을 난봉꾼임에도 여전히 자신에게는 사랑스러운 남편이었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결국 질 수밖에 없다고 하더니… 결국 그 짝이군.”
흑발의 여인이 실소했다.
자포자기를 한 듯,
한탄과 회한에 담긴 한숨을 흘렸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결국 양보할 수밖에 없다.
분명 지금의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천하의 절반을 차지하였음에도 결국 사랑하는 남성의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뿐인 자신의 모습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지. 그야 나는… 성휘가 나를 알기 전부터 연모해왔으니. 2년 동안 쭉.’
항상 그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그를 지켜보며,
고백할 수 없는 마음을 항상 애태웠다.
낙양의 성문교위를 역임하던 시절부터 이성휘를 응원하며 상사병을 앓았다.
‘그러니까 당연히 질 수밖에 없지.’
제아무리 쇠고집이라도 결국 사랑 앞에서는 무용지물처럼 꺾일 뿐이다.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고집을 꺾고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를 연모하는 마음은 만물을 불태우는 불길과도 같았기에 조조는 한없이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 * *
사촌이 언니의 진노를 받고 궁궐에서 축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부러 그러는 걸까.
어쩌면,
스스로를 가혹하게 억압하는 것을 좋아하는 구제불능의 성벽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매번 언니의 역린을 쿡쿡 찌르는 조홍의 멍청한 행동에 조인은 진심으로 그녀의 성벽을 걱정했다.
“또 무슨 짓을….”
“…….”
난감하다는 듯 침음을 삼키는 이성휘.
그의 모습에 조인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이런 멍청한 사촌 같으니,
어째서 내가 도리어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걸까.
애석한 듯 탄식을 흘리는 이성휘의 모습에 당장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듯 어깨를 떨었다.
“제가 타이르도록 하겠습니다.”
조인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두 번 다시 멍청한 짓을 못하도록,
멍청한 사촌을 따끔하게 타이르려 했다.
하지만 조인의 말에 이성휘가 고개를 내저었다.
“주변을 보지 못하는 성정 때문에 엉뚱한 행동들을 매번 저지르지만… 그래도 그게 매력 아니겠습니까.”
이성휘가 피식 웃었다.
조홍의 모습을 떠올린 듯,
다정한 감정이 담긴 미소를 흘렸다.
한없이 맑은 미소를 본 조인은 사촌에게 질투를 느껴야 했다. 매번 멍청한 짓을 저질러도 표기장군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었으니까.
조인의 표정은 평상시처럼 무뚝뚝한 가면을 덮어쓰고 있었지만, 사촌을 향한 질투심과 함께 이성휘에게 야속함을 느끼고 있었다.
‘얼음동상처럼 차가운 석녀보다는 화려하게 치장한 자렴이 취향이겠지요.’
조인이 남몰래 입술을 삐죽였다.
자신 같은 석녀보다는,
헤프게나마 다정다감한 모습을 보이는 사촌에게 끌릴 수밖에 없을 터.
굴욕적인 패배감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스스로를 치장하고 꾸미면서 용모를 관리하는 조홍은 자신이 보기에도 화려한 미녀였으니까. 물론 행동들은 하나같이 경박하기 이를 때 없었지만 말이다.
“저는… 자효와 있는 시간도 좋아합니다.”
내심을 간파한 듯,
이성휘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조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차디찬 얼음장이 녹아내리면서 개울물이 된 것처럼 따스한 홍조가 얼굴에 맺혔다. 쿵쿵 뛰던 심장소리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 그으… 그렇… 습니까…?”
당혹감 때문에 입술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어떤 모습을 보여야 될지 몰라,
허둥지둥하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분명 자렴처럼 얼빠진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겠지.
항상 냉철하고 싸늘한 이지적인 면모만을 보여주었던 ‘하늘이 내린 장수’는 어디로 갔는지,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귀여운 숙녀만이 있었다.
“자효.”
“…예.”
“저를 위해 나서주셔서 감사합니다.”
“…….”
언니에게 전했던 고백을 말하는 것이리라.
더 이상 언니를 속일 수 없었기에,
은밀하게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었음을 자백했다.
하늘과도 같은 언니를 계속 기만할 순 없다.
그렇기에 조인은 죽음을 각오하고서 언니에게 진심을 전했다.
허락을 받든,
아니면 심판을 받게 되든.
자신은 그저 언니의 결정에 순종할 뿐이므로.
“많이 무모하셨습니다. 어째서 미리 귀띔해주지 않은 겁니까.”
혹시 내가 미덥지 않은 걸까.
조인도,
그리고 초선도.
그녀들은 자신에게 귀띔해주지 않은 채 강행돌파를 선택했다.
“그때… 제가 나섰어야 했습니다.”
어떻게든 내가 먼저 나섰어야 했다.
조인과 초선이 나서기 전에,
먼저 내가 나서서 아내를 설득했어야 했다.
정신적인 궁지에 봉착했던 조인과 초선이 극단적인 결단을 내린 그 순간에조차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자신에게 깊은 회한과 함께 무력감을 느꼈다.
“부디 스스로를 탓하지 말아주세요.”
조인이 속삭이듯 말했다.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며,
미약하게 떨리고 있던 그의 손을 맞잡았다.
자괴감을 토로하는 이성휘의 모습에 조인은 가슴이 옥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사랑하는 사내를 향한 걱정뿐이었다.
“그저 표기장군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표기장군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초선과 똑같은 말이다.
그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 대답이 이성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제 어리석은 결단이 도리어 표기장군에게 폐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것은 처음이다.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기꺼이 죽음마저 결단할 정도로.
사내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주게 된 것은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미숙하고 어수룩할 수밖에 없었다.
조인은 당장이라도 흙바닥에 엎드려 사죄라도 올릴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두 팔을 뻗으면서 몸을 떠는 그녀를 껴안았다.
울음을 터트리는 아기를 달래듯,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가냘픈 등을 쓰다듬었다.
숙연함에 젖은 조인의 얼굴을 본 이성휘는 슬쩍 고개를 숙이면서 부드러운 뺨에 입맞춤을 해주었다.
“저, 표기장군….”
“예.”
잘 익은 사과처럼 얼굴을 붉힌 조인이 촉촉하게 젖은 눈길로 이성휘를 응시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도톰한 입술을 꾹 깨물더니 이윽고 물음을 꺼냈다.
“표기장군을… 서방님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나는 한없이 무뚝뚝할 뿐인 여자에 불과하다.
어떻게 아양을 떠는지,
어떻게 애교를 부리는지도 모른다.
분명 이 못난 성품 때문에 앞으로 표기장군에게 많은 폐를 끼치게 되겠지.
하지만 연모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조인은 고심과 번민을 반복하면서도 어떻게든 이성휘의 마음에 닿으려고 했다.
요령이 부족하고 처세술이 없는… 한없이 무뚝뚝할 뿐인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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