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3화 〉 363. 칼의 마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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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에서 귀환한 이후,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는 노심초사하는 심정으로 이성휘를 계속 살폈다.
죄책감을 애써 참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구에게 하소연하지 못한 채,
심장을 옥죄는 듯한 죄책감을 곱씹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가에 어린아이를 홀로 방치한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성휘를 몰래 지켜보았다.
“물자들을 낙양으로 수송하고 있습니다. 모두 수송하기까지 한 달은 족히 걸릴 것 같네요.”
“음, 그렇습니까.”
“최대한 출격을 서두를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해보겠습니다.”
상서령(書?) 순욱과 의논하고 있는 이성휘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날카로운 눈매.
얼음장처럼 무뚝뚝한 얼굴.
전전긍긍 앓으면서 걱정하던 사람이 오히려 당황할 정도로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대규모 정벌을 끝낸 다음에 곧바로 또 다른 대규모 정벌을 준비하게 되었음에도 이성휘는 일말의 빈틈없이 전쟁에 매진했다.
“휘하 병력은?”
“여포 장군과 장료 장군이 낙양으로 이동하고 있사옵니다.”
가후의 대답에 이성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자의 수송은 물론,
병력 또한 이동을 시작했다.
낙양을 전진거점으로 삼은 이성휘는 준비가 끝나자마자 홍농군과 동관을 통과하여 장안성으로 진공하려고 했다.
“원양 님?”
“어, 어….”
이성휘의 부름에 하후돈은 걱정으로 물든 상념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짝사랑하는 사내와 시선을 마주하게 된 여인은 놀란 듯 어깨를 움찔 떨었다.
숨겨온 마음을 직시하게 된 이후,
패국의 여걸은 이성휘를 마주할 때마다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귀여우면서도 풋풋한….
첫사랑에 빠져버린 여인의 모습이었다.
“낙양에서 본대가 출진하기 전에 원양 님께서는 호표기병대를 이끌고 홍농군으로 가주십시오.”
“알았어.”
이번에도 또한 선봉 역할을 맡게 되었다.
호표기병대(虎??兵?),
기병들 중에서도 최정예로만 편성된 부대였다.
상관과의 염문으로 부관에서 제외된 조인을 대신하여 투입된 하후돈은 수춘 공방전에 이어 이번 전쟁에서도 선봉을 맡을 정도로 이성휘의 신임을 받았다.
‘정말 괜찮나…?’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묵묵히 제 역할에 전념하고 있는 이성휘의 모습에 하후돈은 의문을 품었다.
분명,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을 텐데.
그럼에도 결코 내색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잠시 숙연함을 느꼈다.
‘내가 둔감한 것일 수도 있겠지.’
연애는커녕,
이성을 마음에 품어본 적조차 없다.
그렇기에 어렵고 혼란스럽다.
일말의 경험조차 없는 숫처녀가 무엇을 알겠는가?
저 미련한 사람을.
쓰라린 죄책감을 떠안고 있음에도 묵묵히 견뎌내는 우직한 사람을.
어떻게 위로해야 될지 몰라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맹덕이라면,
자렴이나 자효였다면….
이런 선머슴 같은 여자는 감히 언감생심도 내지 못할 정도로 능숙하게 그를 위로해줬을 텐데.
“공달.”
“네, 주군.”
군사회의가 끝난 뒤,
참석했던 인원들이 이성휘에게 짧게 예를 취하고서 장소를 나섰다.
이성휘는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죽간들을 정리하던 순유를 불렀다.
“원술의 처와 여식이 무탈한지 확인하고 와다오.”
“알겠습니다.”
진류군으로 압송당한 원술의 처와 여식은 홍농양씨 가문에서 지내고 있었다.
관노(??),
혹은 가노(家?)로 삼는 것이 절차일 터.
하지만 이성휘는 어린 아들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진씨와 원엽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물론,
그들의 입장에서 자신은 위선이나 베푸는 철천지원수로만 보이겠지만 말이다.
“…….”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대화를 듣고 있던 하후돈은 숙연함에 찬 표정을 지었다.
* * *
어른들이 일으킨 참화에 희생당한 어린아이의 죽음을 전공으로 자랑할 생각은 없다.
어린아이의 이름을 대역죄인들의 명단에 올릴 생각 또한 없었다.
승첩을 보고했을 때,
이성휘는 원술의 아들을 참살했다는 내용을 의도적으로 제외했다.
대역죄인의 아들을 참살하여 후환을 제거했다는 것은 분명 큰 전공이었으나… 자신의 행동에 큰 부끄러움을 느낀 이성휘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자! 답답할 때는 술이지!”
정열적인 붉은 머리카락을 둔부까지 늘어뜨린 여인이 씩씩한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장소에 들어섰다.
그 뒤,
손을 뻗으면서 술병을 내밀었다.
술이 가득 들었는지 찰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뼛속까지 애주가였던 그녀는 마음속의 울분을 술로 털어내자는 듯 음주를 제안했다. 그녀의 씩씩하고 호탕한 모습에 이성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전우잖아! 오랜 세월 함께 알고 지냈는데 당연하지!”
이성휘의 감사에 하후돈은 쑥스러운 기색을 보이면서 겸연쩍은 듯 뺨을 긁었다.
진심어린 감사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아직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도 독주를 마신 것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직 초저녁인데.”
“술은 원래 때를 안 가리고 마시는 거야. 백주대낮에도 다들 마시잖아.”
얼렁뚱땅 얼버무리는 듯한 하후돈의 말에 이성휘는 마음속 죄책감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다정한 배려에,
그녀의 상냥한 위로에 울분이 가라앉았다.
결국 호의를 받아들인 이성휘는 야생마처럼 호탕한 성격을 자랑하는 미녀와 술잔을 기울였다.
“너는 최선을 다했어. 맹덕을 향한 충성도, 그 아이를 위한 배려도… 충분히 지킨 거야.”
“예.”
하후돈의 말에 이성휘는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그때 원술의 아들을 살려줬다면….
연모하는 여인과 맺었던 맹세를 저버리게 되었으리라. 동정과 연민 때문에 충성의 책무를 외면해버렸다면 지금에 준하는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겠지.
“물론 피해자 입장에서는 우리들의 행동에 한낱 위선으로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우리들은 주군이 대업을 달성하는 날까지 무업(??)을 짊어져야 하는 운명이니까.”
“…….”
그녀의 말이 맞다.
비록 말재주는 서툴렀지만,
그녀의 말에는 진의가 담겨져 있었다.
무장들이 짊어져야 하는 숙명.
악명도. 악행들도….
모두 무장들이 떠안아야 할 업이었다.
술잔을 기울이면서 나눈 하후돈과의 대화에서 이성휘는 고개를 들어 무거운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난세를 살아가는 모든 장수들이 저마다 숙명을 떠안고 있건만… 감히 나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괜찮아. 우리들도 결국 사람이니까.”
전쟁의 무업을 짊어졌으되,
무장들 또한 사람의 마음을 가진 족속이다.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지워버릴 수 있겠는가.
만약 마음을 완전히 지워버린다면….
그것은 무장이 아닌,
단순한 살육과 학살을 즐길 뿐인 말종일 것이다.
‘으으…! 그래서 네가 좋다는 거야!’
자신의 어설픈 위로를 듣고 안도를 느끼고 있는 이성휘를 보며 하후돈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호탕하고 용감무쌍한,
사내처럼 털털한 성격의 여장부가….
수줍은 듯 어깨를 떨었다. 애처로운 눈길로 이성휘를 바라보면서 입술을 달싹이기까지 했다.
‘모든 무인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천하제일검이면서도 항상 겸손하고 다정한 네가, 불패의 전설을 써내면서도 패자들에게 아량을 베풀어주는 모습이 너무 좋다고…!’
빼앗겼다.
이 사내에게,
사촌의 남편인 이 남자에게.
그만 마음을 송두리 째로 빼앗겨버렸다.
용맹한 담력과 강대한 무력을 자랑하는 패국의 여걸조차도 이성을 향한 연심을 이길 순 없었다.
본인조차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여인은 연심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었다.
“원양 님이 곁에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 그래? 그렇지, 당연하지!”
술잔을 연이어 들이켰던 이성휘는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는지 옅은 미소와 함께 속마음을 전달했다.
마치 고백과도 같은 말에,
패국의 여걸은 놀란 듯 황급히 말을 더듬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듣기 싫지 않았는지… 당황에 빠진 표정과 함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자렴이나 자효처럼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술친구는 되어줄 수 있어. 술을 쭉 들이키면서 고민을 털어놓고 싶을 때면 언제든 불러.”
“예, 알겠습니다.”
이성휘의 대답에 하후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근심을 떨쳐낸 듯한 그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면서 술잔을 들어올렸다.
여인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은 연모하는 사내의 행복일 테니까.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기에, 본연의 마음을 담아 이성휘에게 미소 지었다.
“다음 전투에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당연하지! 이 하후원양에게 맡겨달라고!”
호탕한 웃음과 함께,
제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짝사랑하는 사내에게 진심어린 신뢰를 받고 있다.
전쟁에 목숨을 걸 이유로 충분했다.
마음은 물론,
목숨까지 바치겠노라고 맹세했으니까.
* * *
술시(??)가 되었을까.
하후돈과 함께 술을 마신 뒤,
달아오른 취기를 해결하고자 바깥으로 나온 이성휘는 마당을 잠시 거닐었다.
떠안고 있던 고민들을 허심탄회에게 털어놓았던 이성휘는 그제야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동생이 있는 누나라서 그런가. 만약 나한테 누나가 있었다면 그랬겠지.’
씩씩하면서도 상냥한,
연상의 누나처럼 다정했던 하후돈의 모습을 떠올렸다.
만약 조금만 더 취했다면…
잠시 생각하던 이성휘는 곧 고개를 내저으면서 상념을 지워버렸다.
“주군!”
마당을 한참 거닐고 있었을 때,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달려왔다.
순유였다.
대체 무엇을 들었는지 새하얗게 질린 낯빛이었다.
“공달?”
이성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군사회의가 끝난 뒤,
원술의 아내와 어린 딸의 안부를 확인해줄 것을 부탁하지 않았던가.
아연실색하며 달려온 그녀의 모습에 이성휘는 지독한 불안감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원술의 처가… 자진했습니다.”
순유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쥐어짜내듯 말했다.
진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적이 드문 창고에서 목을 매달았다고 한다.
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일까.
아니면 형장에서 아들이 죽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비참함 때문이었을까.
홍농양씨 가문에 맡겨진 진씨는 어린 딸을 둔 채로 돌이킬 수 없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죽었단… 말이냐.”
그 소식을 들은 이성휘는 허망함에 물든 탄식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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