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화 〉 320. 아쉬움을 담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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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 장연을 죽이고 수만 명의 잔적들을 양곡(?曲)의 골짜기에 매장한 원소군은 길이 남을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비록 과감한 초강수를 두었으나,
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예상 외로 크지 않았다.
낙평(?曲) 방면으로 회전하여 속전속결로 적의 심장부를 급습한 끝에 본거지를 불태우고 총대장을 살해했다. 그 덕분에 원소군은 큰 손실 없이 대승을 거둬낼 수 있었다.
“천하로부터 지탄을 받게 될 비열한 행위임은 알고 있으나… 주군을 위해서라도 놈들을 죽여야 합니다.”
여광이 굳은 얼굴을 한 채 말했다.
천하제일검을 죽여야 한다.
또한 휘하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성휘는 수만 명에 달하는 적들을 뚫고 장연을 살해하는 전공을 세웠으며, 또한 여포는 인중여포 마중적토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과감한 용맹을 떨쳤다.
휘하 장수들도 걸출한 맹장이었으며,
속전속결의 기동전을 제안한 순유와 그를 보좌했던 가후도 결코 살려둬선 안 될 후환이었다.
놈들이 만약 중원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향후 최악의 적으로 등극하게 될 터. 원소군 장수들은 당장 후환을 제거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흑산적을 함께 토벌한 전우를 죽인다면 만천하가 우리들을 비웃을 걸세.”
“저들을 모두 죽여 천하통일의 대업을 위협하는 후환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못하겠습니까!”
저수가 깊은 우려를 드러냈다.
결코 주군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터.
수심에 젖은 모습을 한 채 밖으로 나선 주군의 모습을 떠올린 저수는 착잡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반면 여광은 이번 기회에 흑산적과 함께 최악의 후환들까지 깔끔하게 제거할 것을 촉구했다. 만약 작금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결국 천하통일의 대업이 일장춘몽(一??夢)에 불과하게 될 것임을 덧붙였다.
“업성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급습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게다가 본영에는 정로장군과 군사까지 있지 않습니까?”
여러 방면에서 공세를 퍼붓는다면 결국 천하제일검도 어쩔 수 없을 터.
하북은 우리들의 영역이다.
중원에서 온 군대는 사방에 포위당한 채 격멸을 피하지 못할 터.
게다가 저들은 지속된 전투로 크게 지친 상태가 아닌가.
승산이 있다.
분명 승산이 충분했다.
천하제일검과 휘하 장수들을 모두 죽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분무장군 어르신!”
“천하제일검은 조맹덕의 반려이자 충실한 심복입니다! 크나큰 후환이 될 게 분명합니다.”
“만약 저들을 그냥 보낸다면… 분명 아군은 수많은 전우들을 차디찬 땅에 묻어야 할 겁니다!”
천하제일검은 천하의 모든 무인들이 존경하는 최고의 무인이다.
도탄에 빠진 황실과 조정을 구했으며,
낙양에서 만고의 역적을 참살하여 한나라의 무너진 위엄을 세우기까지 했다.
불가능의 위업에 가까운 수많은 활약들을 세운 이성휘를 원소군 장수들 또한 크게 존경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이다.
천하제일검의 절대적인 무력과 용맹을 직접 지켜보았기에….
원소군 장수들은 주군의 대업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성휘를 죽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우리들이 감히 결정할 일이 아닐세. 주군께서 분명 별도의 하명이 있을 때까지 자중하면서 기다리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당장이라도 행동에 돌입할 것 같은 장수들의 극단적인 모습에 저수는 당혹감을 보였다.
그러나 크게 반발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휘하 장수들의 의견에 내심 동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천하제일검은 결국 최악의 적이 될 것이다.
그것은 분명했다.
천하의 패권을 건 대전에서 적으로 조우하게 될 테니.
부하들의 생명과 안위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저수였기에 마음이 정처 없이 흔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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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었다.
그가 후환이 되리라는 것을,
이미 오래 전부터 그를 짐작해오고 있었다.
마음속에 곱게 간직해둔 연심이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리라는 것을 예상했다.
그럼에도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천하의 패권과 이성휘,
둘을 모두 거머쥐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임을 내심 알고 있었음에도 지금까지 외면한 채 연심을 이어나갔다.
무엇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서로 양립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속인 채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다.
거듭하여 결정을 뒤로 미루면서 연심과 야망을 버리지 못한 원소는 결국 부하들로부터 가혹한 양자택일을 주문받는 처지에 놓였다.
간직해온 연심을 포기해라.
천하통일의 대업에 연심은 걸림돌일 뿐이다.
이것은 저주였다.
어느 쪽을 택하든,
파국과 파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저주.
계속 망설이면서 우유부단함을 떨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에게 내리는 저주였다.
“…성휘.”
어리석은 처녀가 고뇌와 번민을 거듭한 끝에 발걸음을 향한 곳은 사랑하는 남성의 곁이었다.
진심으로 연모하는 사내이며,
언젠가 전쟁터에서 적으로 마주하게 될 사내.
참으로 지독하지 않은가.
우유부단한 마음이 몰고 온 저주의 무게에 온몸이 꺾여나갈 것만 같았다.
“본초 님,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인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자정을 훌쩍 넘겼을 때였다.
곧 새벽을 맞이하게 될 시간에 가련한 처녀가 수심에 젖은 얼굴을 한 채 군막을 방문했다.
칠흑의 장막이 세상을 가리고 있었다.
원소는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를 뒤로 한 채 연모하는 남성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들였다.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군막 내부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던 등불이 처녀의 새하얀 얼굴을 물들였다.
따스함을 머금은 듯,
아름다운 얼굴에 온화한 색채가 더해졌다.
야심한 시각에 대담하게 사내의 공간에 발을 들인 처녀는 촉촉하게 젖은 눈길로 남성을 응시했다.
“하지만 오늘 밤이 다하기 전에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밤이 다하기 전에.
새카만 장막이 걷히기 전에.
그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강렬한 격정에 휩싸이게 된 원소는 도톰한 입술을 꾹 깨물면서 고민과 갈등을 거듭했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끝에,
그녀는 울음기에 젖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성휘, 정말 제 것이 되어줄 순 없나요?”
늦었다.
이미 너무 늦었다.
이제 와서 내 제안을 받아줄 리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결코 이성휘를 향한 연심을 포기할 수 없었던 원소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만 같은 표정을 한 채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본초 님….”
“잠깐, 잠깐만요.”
어깨까지 금발을 늘어뜨린 여성이 목소리를 더듬으면서 대답을 막아섰다.
물음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물음을 꺼내기 전부터 이미 답을 알고 있었기에.
고백을 전하듯 새된 목소리로 입을 연 원소는 가녀린 어깨를 바르르 떨면서 실연의 아픔을 느꼈다.
“잠시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요.”
입술을 꾹 깨문 가련한 처녀가 머리를 숙이면서 사내의 가슴팍을 의지했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 마음을 몇 번이고 거절한 사내에게 야속함을 표현하듯 새하얀 이마로 가슴을 툭툭 쳤다.
이윽고 원소는 양손을 뻗으면서 이성휘의 옷소매를 꾹 붙잡았다.
그가 멀어질까,
뒷걸음질 치며 물러설까 두려움에 찬 행동이었다.
“저 많이… 귀찮은 여자예요. 속마음을 드러내기를 무서워하는 겁쟁이에, 성휘에게 미움을 받게 될까 무서워서 매번 망설이는 멍청이에요.”
귀찮은 여자.
겁쟁이에 멍청이.
원소는 스스로를 한없이 폄하하면서 그에게 대답을 받는 것조차도 주저하는 자신을 힐난했다.
결국 적이 될 테니까.
그에게 몹쓸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해온 연심의 따스함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마음을 찢어발겼다. 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눈물을 애써 참아내면서 안타까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우리들은… 적으로 마주하게 되겠죠.’
이제 더 이상 나를 지켜줄 일은 없겠지.
우리들의 인연은,
곧 끝나게 될 테니까.
사방에서 화살들이 빗발치는 양곡의 골짜기에서 자신을 지켜주던 사내의 뒷모습을 떠올린 원소는 아쉬움으로 물든 미소를 지었다.
“성휘.”
내부를 밝히던 등불 때문일까.
그녀의 새하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윽고 아름다운 처녀는 천천히 뒤꿈치를 들어올렸다.
부드러운 손길을 뻗었다.
따스한 살결이 이성휘의 뺨을 감싸 안았다.
“저… 당신을 진심으로 좋아해요.”
반드시 전하고 싶었던 말.
오랫동안 연모해온 상대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이 밤이 끝나기 전에 지금까지 간직해온 마음을 모두 고백하고 싶었으니까.
“본초 님, 하지만…!”
이성휘가 입을 열었다.
결코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사내의 얼굴에는 찰나의 흔들림이 담긴 완고한 표정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그는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애달픈 마음을 품은 처녀의 뜨거운 입술이 거절의 대답을 하려던 사내의 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흐읏…!”
처녀의 입술에서 신음소리가 흘렀다.
연모해온 상대에게 고백했다.
그와 동시에 첫 입맞춤을 그에게 바쳤다.
어미에게 먹이를 조르는 아기새처럼 고개를 쭉 내민 채 입술을 부딪쳤다. 입맞춤을 해본 적 없는 순진무구한 처녀임을 보여주듯… 그녀의 입맞춤은 무심코 실소가 나올 정도로 엉성하고 어설펐다.
어떻게 고백해야 될지를 몰라 지금까지 계속 망설이고 고민했던 그녀의 그 순진한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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