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화 〉 319. 천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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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이 보름달로,
잔잔한 바다에 거친 물결이 일듯,
산들바람이 불던 들판이 맹렬한 불바다로 변해버린 것처럼.
사방을 포위한 적들의 공격에 점점 지쳐가던 원소군은 일제히 총공세를 벌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승기의 바람이 분다.
주군에게 천명을 안겨드릴 때다.
그것을 온몸으로 직감한 원소군 장졸들은 경애하는 주군을 위해 마지막 일격을 힘껏 뻗었다.
“공격하라! 공격하라!!”
“놈들의 산채가 불타고 있다!”
거대한 요새와 같은 산채를 집어삼킨 화염이 불기둥처럼 솟구쳤다.
흑산적 세력의 멸망을 알리듯,
화염은 주변 삼림마저 삼키면서 공포를 자극했다.
눈앞에서 거점을 잃게 된 흑산적 두령들은 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몰라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휘하의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 산채가 불타고 있다!”
“안에 있던 두령들은 그럼…! 다 죽었단 말이냐!”
삼림을 불태우는 맹렬한 불길.
불길을 뒤로 한 채 달려드는 원소군의 총공세.
경애하는 주군에게 충성을 바친 원소군은 마치 스스로 배수진을 친 채 목숨을 건 일격을 내뻗었다.
십만 대군이 흔들렸다.
골짜기들을 포위했던 십만 대군이 동요와 공포, 두려움에 질린 채 벌벌 떨기 시작했다.
“네놈들의 대장이 여기 있다!”
회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걸이 핏물이 뚝뚝 흐르는 수급을 번쩍 들어올렸다.
장연의 잘린 머리였다.
혀를 쭉 내민 채 경악과 공포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죽기 직전에 무엇을 본 걸까. 분명 그는 최후를 맞이하기 전에 지금까지 범했던 수많은 죄들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렀을 게 틀림없었다.
“으아아악!”
“두, 두령…! 장연 두령이 죽었다!”
“분명 장연 두령이다! 장연 두령이 적들의 손에 죽었다!”
곧 조운은 잘린 머리를 창대에 꽂아 적들에게 과시하듯 보여주었다.
네놈들의 두령은 죽었다.
우리들의 손에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말았다.
이제 곧 네놈들도 모두 목 없는 귀신으로 전락하게 되리라.
“뭐, 두령이 죽었다고?!”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공포는 바람을 타고,
양곡의 골짜기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두려움은 마치 전염병처럼 확산되면서 흑산적 병사들의 의지를 갉아먹었다.
장연 두령이 놈들에게 죽었다.
공포에 찬 목소리로 내지르는 고함과 비명소리 덕분에 흑산적의 십만 대군은 삽시간에 비보를 접할 수 있었다.
의지가 사라졌다.
의욕이 완전히 꺾여나갔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만들어진 바람에 전의의 불씨가 찰나의 빛과 함께 덧없이 꺼져버렸다.
“다 덤벼라, 이 버러지들아! 내가 바로 병주의 여봉선이다!!”
금발의 여걸이 방천화극을 붕붕 휘두르면서 사나운 늑대처럼 달려들었다.
감히 저항하는 무리는 없었다.
흉신악살처럼 사나운 여포가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흑산적 병사들은 겁에 질린 채 도망칠 뿐이었다.
“여포다!”
“여포가 온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버린 병사들이 어떻게 병주의 비장에게 저항할 수 있겠는가.
유린당한 채 짓밟혔다.
방천화극이 번뜩일 때마다 단말마의 비명과 뜨거운 피분수가 쏟아졌다.
삽시간에 궁지에 몰린 도적들은 병장기를 버리면서 자비와 동정을 구걸했다. 그러나 피칠갑을 한 병주의 비장은 아랑곳 않은 채 모든 목숨들을 끊어냈다.
“과, 과연 여포로군!”
“인중여포 마중적토…! 과연 천하제일검 휘하의 맹장이군!”
적토마가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날카로운 창검을 겨눈 적들에게 망설임 없이 돌격했다.
맹위를 떨치는 용마(馬).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용장(??).
태산마저 무너뜨릴 것처럼 괴력을 실은 방천화극을 휘두르는 여포의 맹위는 원소군 장수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경이로웠다.
“봉선 님!”
활을 든 흑발의 여인이 단기필마로 적의 군세를 무너뜨린 비장에게 다가왔다.
혹시라도 크게 지치지 않았을까,
장료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여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걱정은 괜한 기우에 불과했다.
오히려 여포는 힘이 넘쳤다.
어느 때보다도 힘이 넘쳐흘렀다.
선혈처럼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와 흉신악살처럼 새겨진 사나운 미소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용맹무쌍한 병주의 용사들아!”
여포가 핏물과 살점들이 덕지덕지 묻은 방천화극을 번쩍 들어올리면서 소리쳤다.
병주의 비장을 뒤따르며 수많은 전쟁터를 누빈 장졸들의 시선이 여포에게 집중되었다.
그녀의 용맹한 활약에 감화되었는지,
용맹과 담력을 겸비한 만승천자의 군대는 두려움을 모르는 불굴의 위세를 품고 있었다.
“황제 폐하와 천하제일검을 위해 싸워라! 만승천자를 호위하는 황군의 명예를 걸고 분전하라!!”
우리들은 만승천자의 군대다.
우리들은 천하제일검의 수하들이다.
드높은 자긍심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손에 쥔 병장기를 치켜들었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천하제일검의 이름으로 놈들을 처단하자!!”
황실과 조정을 기만했던,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재물을 갈취했던 악적들을 모조리 절멸하기 위해.
병주의 사나운 맹수들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무수히 많은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등을 보인 채 헐레벌떡 도망치는 적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간적들이 도망치고 있다! 여남원씨 가문의 군세들이여, 나라를 어지럽힌 간적들을 절대로 살려두지 마라!”
분무장군(????) 저수가 소리쳤다.
검을 높게 치켜들며,
피칠갑을 한 여남원씨 가문의 군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마지막 싸움이 될 터.
양곡의 깊은 골짜기들은 나라를 어지럽힌 간적들의 주검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시산혈해로 뒤덮인 골짜기들을 통해 하북 4개 주를 제패한 주군의 위엄과 업적은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리라.
“우리들도 질 수 없다!”
“이 골짜기를 도적놈들의 무덤으로 만들어라!”
여광, 여상 형제가 진격했다.
전장을 계속 휩쓸었던 원소군 기병부대가 말발굽소리를 내면서 전의를 상실한 적들에게 진격을 알렸다.
“놈들을 끝까지 추격하라!”
“주군과 여남원씨 가문에 위대한 영광을!”
네놈들은 오늘 여기서 죽는다.
그 누구도 양곡의 골짜기를 벗어나지 못하리라.
황건적의 난에 편승하여 황하 이북의 산맥지대에서 세력을 형성해온 흑산적은 총공세를 이기지 못한 채, 하북 전역을 제패한 원소군에게 결국 멸망했다.
수만 명의 시체들이 파묻혔다.
비릿한 피비린내로 점철된 시산혈해가 펼쳐졌다.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최악의 시산혈해로 골짜기들이 뒤덮였기 때문일까, 향후 수십 년 동안 병주 지역에서는 도적떼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 * *
양곡 전투의 대패로 흑산적 세력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직 잔존세력들이 여럿 있었으나,
본거지와 함께 우두머리들을 모두 잃게 된 흑산적 세력은 결국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되리라.
수만 명의 적들을 골짜기 밑에 파묻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시산혈해로 인해 계곡물이 모두 붉게 물들었을 정도였다.
“주군, 잔당들을 여럿 놓쳤습니다만…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을 거뒀습니다!”
“큭! 안량과 문추만 있었더라면!”
“예? 주군께서 두 장군들에게 업성의 수비를 명하시지 않았습니까.”
장연의 잔당들을 여럿 놓쳤다는 저수의 보고에 원소가 혀를 차면서 아쉬워했다.
준비물을 두고 온 학생처럼,
결국 준비물을 안 들고 온 주제에 갑자기 아쉬워하는 티를 냈다.
그녀의 덜렁이 같은 모습에 여광과 여성이 서로 눈치를 보면서 헤픈 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군요. 아쉽게 잔당들을 놓쳤지만 그들은 이제 별다른 후환이 되지 못하겠죠.”
팔짱을 낀 채 곰곰이 고심하던 원소는 이내 얼굴을 풀면서 저수와 휘하 장수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승의 영광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의 용전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과연 그대들은 위대한 여남원씨 가문의 장수들이에요.”
“과찬이십니다.”
원소의 찬사에 휘하 장수들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기뻐했다.
아름다운 주군과 함께 대승을 거둬냈다.
주군에게 위대한 영광을 안겨드렸음에,
주근에게 빛나는 명예를 진상하였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독한 역병과도 같은 흑산적 세력의 멸망으로 완전한 하북 제패를 이뤄냈다. 하북 4개 주를 모두 거머쥠으로서 천하를 향해 포효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승전보를 어서 본영에 전달하세요. 마침내 우리들이 빛나는 영광과 명예를 거머쥐었노라고.”
“신속하게 전달하겠습니다.”
“역경루에 이어 양곡에서도 영광을 취했군요.”
역경루에서 공손찬을,
양곡에서 장연의 수급을 취했다.
하북의 두 패자들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다.
그 말은 곧,
하북에서는 더 이상 이 원본초의 적수가 없음을 의미했다.
하북의 진정한 패자.
천하의 절반이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제 남은 목표는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리라.
“주군.”
원소가 제 손아귀를 바라보면서 고양감에 잠시 취했을 때,
여광이 다가왔다.
꺼내기 쉽지 않은 말이었는지,
그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제… 저들을 어찌하시겠습니까.”
여광의 말에 호응하듯 여상 또한 목소리를 냈다.
“이성휘와 여포, 황군의 휘하 장수들이 다시 중원으로 돌아간다면 분명 최악의 화근이 될 겁니다!”
무수히 많은 적들을 분쇄한 끝에 총대장이었던 장연을 죽이고 흑산적의 본거지를 불태웠다.
놈들은 위험하다.
훗날 최악의 적으로 마주하게 될 터.
사나운 기세로 전장을 유린하던 황군의 용맹을 떠올린 원소군의 장수들은 경계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동맹은 이제 끝났다.
쓸모를 다했으니 놈들을 죽여야 한다.
이대로 저들을 중원으로 돌려보낸다면 분명 천하통일을 가로막는 최악의 흉수가 될 터이니.
대승을 거뒀음에도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흑산적보다 더 무서운 적이,
흑산적보다도 더 위험한 적이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원소군 장수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실로 당연했다.
“잠시 심사숙고한 뒤에… 하명을 내리도록 하죠.”
걱정과 우려가 섞인 장수들의 시선을 본 원소는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숙연함에 젖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을 떨쳐내야 할 때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만 할 때였다.
원소는 결국 가혹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음을 느끼고는 도톰한 입술을 꾹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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