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화 〉 297. 고모와 조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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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책에 이어 심복마저 붙잡혔다.
순유가 벌벌 떨고 있었을 때,
마찬가지로 소식을 듣게 된 이성휘 또한 탄식했다.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고 있다.
어떻게 이 시대에 이리 정밀한 수사가 가능하단 말인가.
이성휘는 족집게 무당처럼 신묘한 혜안을 가진 것만 같은 순욱의 통찰력에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저, 저는 그저… 돈을 받고 찬합에 든 것을 옮겼을 뿐입니다!”
“찬합이요?”
“예…! 찬합에 든 내용물을 옮겨주면 항상 돈을 줬습니다!”
“흐음.”
위병들에게 붙잡혀 대리시로 압송된 남성을 심문하던 순욱이 침음을 흘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공이와 달이는 철저히 신분을 숨긴 채,
돈으로 고용한 하수인들을 동원하여 지금까지 파렴치한 일들을 계속 저질러왔다.
치밀하다.
치밀하면서 교활했다.
만약 그가 파렴치한 도색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전술과 군략을 주도하는 우수한 참모가 되었을 것 같았다.
‘예주 사대부였다면 얼마든지 조정에 임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텐데! 그 우수한 재능과 자질로 이런 하찮은 짓거리에 동원하다니…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상대는 신산귀모를 자랑하는 모략가다.
점조직.
꼬리 자르기.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마련해둔 안배들이 실로 치밀하다.
순욱은 예주 사대부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천재가 범행을 저질렀으리라 확신했다. 수사력을 총동원하였음에도 좀처럼 꼬리가 잡히지 않는 그 치밀함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으아악!”
순욱이 턱짓을 보내자 우악스럽게 굵은 육각몽둥이를 든 위병들이 다가왔다.
뼈가 으스러질 때까지 후려칠 것만 같은 위병들의 모습에 붙잡혀온 남성이 비명을 질러댔다.
“아, 알고 있는 것들은 모두 말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살려주십쇼!”
아직 고문은 시작도 하지 않았건만,
남성은 험상궂게 생겨먹은 위병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비명횡사하듯 벌벌 떨면서 이실직고를 맹세했다.
“말하세요, 아는 것 전부.”
상아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가 싸늘하게 물든 눈길을 보내면서 물었다.
냉기가 풀풀 몰아치는 듯했다.
그깟 푼돈을 위해 악적들과 내통한 하수인에게 경멸어린 감정을 보냈다.
백발마녀처럼 흉흉한 기세를 발산하고 있는 순욱의 모습에 남성은 질겁하는 반응을 보였다.
“찬합에 든 물건을 옮겨주는 단순한 일에, 왜 이렇게 많은 돈을 주는지 궁금해서… 약속한 시간보다 먼저 장소에 찾아와서 몰래 정체를 염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요!”
정체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듯한 남성의 말에 순욱이 다그치듯 물었다.
실마리를 계속 쫓은 끝에,
마침내 실마리와 연결된 몸통이 보이기 시작했다.
곧 변태의 실체가 드러날 것만 같았기에 조바심을 감추지 못했다.
“갈대로 만든 방립을 쓰고 있어 얼굴까지는 모릅니다만… 분명 여자였습니다!”
“여자요…?”
“예! 방립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장소에 물건이 든 찬합을 두고 사라지는 모습을 봤습니다!”
밧줄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던 남성은 제발 자신만큼은 선처해달라는 듯 고변에 주저함이 없었다.
오로지 돈으로 고용된 관계였기에,
의리나 충성심은 눈을 씻고도 볼 수 없었다.
제 신변에 위험이 들이닥치자마자 미주알고주알 죄다 일러바치기 바빴다.
“한 명뿐인가요? 다른 사람은 없었나요?”
“몇 번 정도 숨어서 지켜봤었는데… 분명 그 여자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문답을 통해 순욱은 직감했다.
공이와 달이는,
분명 ‘동일인물’이다.
예주 출신의 사대부 여성.
또한 참모들에 필적할 정도의 천재적인 신산귀모를 자랑하는 지략가이기까지 하다.
조금씩 흩어진 조각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상서령, 분명 그 범인도 결국 돈으로 고용된 끄나풀이 아니겠습니까?”
영천군의 도위가 물었다.
그에 순욱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아뇨, 진범일 확률이 높습니다.”
작가들의 특징은 제가 쓴 작품을 그 무엇보다도 끔찍이 여긴다는 것이다.
게다가 공이와 달이는 점조직과 꼬리 자르기를 계획하면서까지 집필에 전력하는 인물이었다. 분명 자신의 작품들에 상당한 애착이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 작자가 과연 자신의 원고본이 여러 사람들의 손을 타는 것을 용납할까?
아니,
그럴 일은 없다.
제 작품들에 진심으로 애착하고 있다면 분명 자신의 손으로 원고본이 든 찬합을 장소에 놓았겠지.
명망 높은 학자로서 표문들을 여럿 작성해본 적 있는 순욱이었기에 그 애착심을 넌지시 알고 있었다.
“일단 지금까지 추포한 범인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은 뒤에 대질을 시작하세요. 분명 서로 공통되는 단서들이 있을 겁니다.”
“예!”
관원들에게 지시를 내린 순욱은 팔짱을 낀 채 등을 돌렸다.
강렬한 심증이 뇌리를 자극했다.
순욱은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내려앉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싸늘하게 물든 눈동자를 번뜩이던 조조군의 상서령은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였다.
* * *
순욱은 곧장 중서대(中書?)로 향했다.
그러나 현재 중서대의 요직을 담당하고 있는 비서랑(?書) 순유는 부재중인 상태였다.
중서대 관료에게 행방을 물었다.
그에 관료는 “비서랑 어르신께서는 곧장 표기장군부로 향하셨습니다.”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런가요.”
7촌 조카님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표기장군 이성휘로부터 추천을 받아 단번에 요직에 오른 경우였다.
게다가 또한,
조카님은 표기장군의 군사였다.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모시는 주군이 있는 둔영을 빈번하게 드나드는 것은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순욱은 자신을 올 줄 알고 피신한 것만 같은 조카님의 행적에 근거 모를 의심을 품었다.
“알겠습니다.”
중서대 관료에게 감사를 건넨 순욱은 곧바로 표기장군부로 향했다.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영천순씨 가문의 일에 표기장군을 끼어들게 만드는 것 같아 송구스러웠지만, 눈치 빠른 조카님은 표기장군부에서 결코 나오려 하지 않을 것이기에 무례를 무릅쓰고 발걸음을 움직였다.
“상서령.”
“…표기장군.”
이윽고 표기장군부에 도착했다.
미리 예상이라도 한듯,
표기장군부에 발을 들이자마자 검은색 시무복을 입은 남성이 맞이해주었다.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상서롭지 못한 일로 불미스러운 수고를 끼치게 만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표기장군, 비서랑에게 용무가 있어 왔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이성휘는 곧바로 순욱을 집무실로 안내했다.
달빛처럼 고운 상아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의 방문에 화려한 의복을 입은 흑발의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스승님의 고모가 표기장군부를 방문한 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조카님!”
순욱은 이성휘를 따라 표기장군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들였다.
이윽고 순욱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사달을 낸 조카님을 맹렬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기가 죽었는지,
갈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히익!”
도둑이 제 발 저리듯 7촌 고모의 싸늘한 눈빛에 놀란 연상의 조카가 비명을 터트렸다.
들켰다.
결국 발각당한 게 분명하다.
인왕(?王)처럼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고모님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항상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만 보이던 고모님이 두 눈을 번뜩이면서 극대노한 반응을 보이자, 순유는 이제 드디어 인과응보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잠시 고정하십시오, 상서령.”
이성휘가 팔을 뻗으면서 말했다.
우렛소리에 놀란 다람쥐처럼 극대노한 고모님의 눈치를 슬슬 살피던 순유가 이성휘의 뒤에 숨었다.
그 모습에 순욱이 이를 빠득 갈았다.
하지만 감히 은인 앞에서 경거망동을 할 순 없었기에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마음속 열불을 잠시 꺼트렸다.
“후우…! 죄송합니다, 표기장군.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일에 공연히 표기장군을 휘말리게 만든 것 같아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순욱은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일”이라는 내용을 특히 강조하면서 이성휘에게 말했다.
모든 수사력을 동원하여 색출하려 했던 간적이 사실 7촌 조카였음에 순욱은 얼굴을 들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심을 느꼈다.
자승자박(????)이다.
지금까지 공이와 달이,
풍속과 기풍을 어지럽히고 백성들을 현혹시킨 간적을 색출하느라 들인 시간과 노력들이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되어 몰려들었다.
정작 당사자인 7촌 조카는 딱히 죄책감을 못 느끼는 듯 보였지만.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조카님!”
순욱이 극대노하여 소리쳤다.
말투가 워낙 거칠었기에,
‘조카’가 아닌 ‘조까’로 들리는 듯했다.
온실 속 화초처럼 가녀리고 부드러운 여인의 입술에서 저런 상스러운 말이 나올 줄이야. 순욱과 순유의 사이에 선 이성휘는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표기장군…. 잠시 빌리겠습니다.”
두 눈을 번뜩이던 순욱이 서책을 들었다.
그 서책은 논어(?)였다.
공자와 제자들이 남긴 언행을 기록한 서책답게 상당한 두께를 자랑했다.
두꺼운 서책을 돌돌 말아서 몽둥이처럼 만든 순욱은 이성휘의 뒤에 숨은 채 눈치를 보던 조카님의 뒷덜미를 붙잡고는 그대로 끌고나갔다.
“아악! 악! 악악!! 살려줘요, 고모님!!”
문 너머로 들리는 비명소리.
뒤이어 목탁을 힘껏 내리치는 듯한 청아한 소리가 들려왔다.
“꼴불견 같은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표기장군.”
2각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순욱이 굳게 닫고 나갔던 문을 다시 열면서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
9층 석탑을 쌓은 것처럼 불룩 솟은 혹들을 머리 위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순유가 바닥을 기면서 들어왔다.
“당장 조카님의 주리를 틀러 가보겠습니다.”
순욱이 말했다.
그에 이성휘는 진땀을 빼면서 백발마녀처럼 흉흉한 기세를 발산하고 있는 그녀를 만류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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