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화 〉 285. 비장연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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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단법석을 떠는 자신과는 달리,
이성휘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들만 보여주었다.
무뚝뚝한 얼굴.
일말의 흐트러짐 없는 태도.
밤낮으로 업무에 매진하는 일과까지.
지금까지 계속 전전긍긍하면서 마음을 애태웠던 자신의 모습들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혹시 나만 마음 설레면서 기다린 걸까.
콩닥콩닥 떨렸던 마음이 금세 우울해지고 말았다.
‘뭐, 뭘 기대한 거람…. 그 녀석은 날 여자로 보고 있지도 않을 텐데. 내가 옆에서 무방비하게 자고 있어도 손 하나 건들지 않은 놈이잖아…!’
물론 그런 성실한 점이 녀석다웠지만.
그래도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 걸까.
설마 나를 아예 여자로 취급조차 하지 않는 건 안겠지?
‘그 녀석 옆에는 낙양제일미가 꼭 들러붙어 있으니까 당연히 내가 여자로 안 보일지도….’
속상함에 찬 심정으로 한숨을 깊게 내쉬던 여포는 작약꽃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성을 떠올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름이 초선이라고 했었나.
낙양제일미(??一美)라고 불리는 시녀.
같은 여성인 자신이 보더라도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였다.
만약 사도 왕윤의 수양딸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천계에서 내려온 선녀로 오해했을 정도로 고결한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는 여인이었다.
“안녕하시옵니까, 여포 장군.”
아름다운 시녀가 꽃봉오리가 만개하듯 활짝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업무보고를 위해 이성휘의 가택에 들르게 된 여포는 방금 세탁한 빨랫감들을 탁탁 털면서 걸어놓고 있는 초선과 만날 수 있었다.
직접 살림살이를 도맡고 있는지,
살구처럼 물든 초선의 뺨에는 땀이 한 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음, 그러니까….”
“편하게 초선이라고 불러주시옵소서.”
“그래도 돼?”
“봉선 님께서는 소녀의 부친을 구해주신 은인이 아니시옵니까.”
호의에 찬 웃음을 짓는 초선의 모습에 여포는 잠시 곤혹스러움을 느꼈는지 제 뺨을 긁었다.
아무리 수양딸이라고 해도,
삼공(三?)의 벼슬에 오른 태원왕씨 가문의 수양딸이 아닌가.
병주 출신의 촌년에 불과한 자신에게 허울 없이 친절한 모습을 보인 초선의 모습이 매우 낯설게 느껴진 듯했다.
“직접… 빨래도 해?”
“응당 소녀가 해야 될 일이옵니다.”
끙끙 앓은 소리를 내면서 무거운 이불을 폭 들어올린 초선이 빨랫줄에 내걸었다.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용모와는 반대로,
빨래와 청소 같은 가사노동에 매우 능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역시 나 같은 선머슴과는 다르다.
나는 청소는 물론,
정돈조차도 제대로 못하는 여자인데.
이성휘와 함께 동거하며 집안일을 도맡고 있는 초선의 모습에 여포는 강한 동경심과 함께 부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혹시 명공을 뵈러 오신 것이옵니까?”
“뭐… 그렇지.”
초선의 물음에 여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명공께서는 출타 중이시온데… 그럼 일단 내실에서 잠시 기다려주시겠사옵니까.”
곧 여포는 손님의 신분으로 내실에 들어왔다.
낯선 공간은 아니었다.
어젯밤에도 가택에 들렀으니까.
음란한 차림을 한 채 집주인의 침소에 숨어들어 동침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때만 생각하면 온몸의 열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내실로 들어서기 전에 잠시 이성휘의 침소를 힐끗 쳐다본 여포는 어젯밤 일이 떠올랐는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변변찮은 대접이옵니다만 드시옵소서.”
앞치마를 두른 시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면서 여포에게 고급스러운 화과자를 건넸다.
뒤이어 초선은 능숙한 다도 솜씨를 선보이면서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과연 유협의 전속시녀답게,
정갈하면서도 아름다운 손짓으로 차를 달여냈다.
예법은 물론, 서예와 다도에도 능통한 초선은 과연 수많은 남정네들의 마음을 애절하게 녹였던 낙양제일미답게 팔방미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1등 신붓감이었다.
“진짜 새색시 같네.”
화과자를 한 입 베어 문 여포가 말했다.
그에 초선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면서 제 뺨에 손을 올렸다.
“부, 부끄럽사옵니다.”
가택의 집안일을 모두 전담하고 있는 초선이 천하제일검의 안주인처럼 보였다.
물론 정실은 따로 있지만,
항상 이성휘에게 헌신하며 정성어린 마음을 다하는 초선이 오히려 안주인에 어울렸다.
적어도 여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장군, 소녀의 부친과 오라비들을 전화에서 구명해주신 것을… 소녀는 그 백골난망한 은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초선이 고개를 푹 숙이면서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그에 여포가 손사래 쳤다.
“괜스럽게 왜 그래? 당연한 일을 한 거라니까.”
“하오나 어찌 부친과 오라비들을 구해주신 그 은혜를 잊을 수 있겠사옵니까. 소녀는 평생 동안 장군에게 그 은혜를 갚을 것이옵니다.”
의외로 고집이 상당한 성격이다.
귀엽고 유순한 얼굴과는 반대로,
초선은 결심한 바를 결코 꺾지 않는 강단 있는 여성이었다.
결의로 반짝이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본 여포는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소녀…! 여포 장군께서 숨기고 계신 연심을 명공에게 전하실 수 있도록 적극 돕겠사옵니다!”
초선이 주먹을 불끈 쥔 채 당찬 목소리로 외쳤다.
주륵.
여포의 입에서 찻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두 눈에 경악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 아름다운 시녀에게 본심을 들키고 말았음에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대체 왜 들킨 거지?
여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찌나 부끄러웠는지,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무, 무슨…!”
“어찌 소녀가 모르겠사옵니까? 어젯밤 명공과 함께 동침까지 하시지 않으셨사옵니까.”
“…….”
여포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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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휘는 사흘에 한 번씩 진류군에 서한을 보냈다.
당연히 조조에게 보내는 서한이었다.
요즘 날씨가 부쩍 추워지고 있다.
특히 건강에 유의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과로는 몸을 해칠 위험이 있으니 술시(??)가 넘기 전까지 퇴궐하기를 바란다.
주군에게 보내는 서한이 아닌,
곧 혼례를 올리게 될 연인에게 보내는 서한이었으므로 내용 또한 사적인 것들이었다.
“무뚝뚝한 남자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하신 거예요? 절절하게 안부를 묻는 서한을 보내다니.”
평동장군(????) 조홍이 허도에 도착했다.
허도의 토목공사가 순탄하게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무관들과 함께 온 것이었다.
흑단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기른 미녀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성휘의 옆구리를 툭툭 두드렸다.
“날이 추워지고 있지 않습니까.”
“피이, 나한테는 안 보낸 주제에.”
사촌언니를 특별대우하는 이성휘의 태도에 무심코 질투를 품게 되었는지,
조홍이 아랫입술을 삐죽이면서 중얼거렸다.
이 무뚝뚝한 남자에게 뭘 바란다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으나, 사촌언니와 서한을 나누면서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는 모습에 짐짓 질투하는 모습을 보였다.
“앞으로는 보내겠습니다.”
“됐어요,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쀼루퉁한 표정을 지으면서 항의하는 조홍의 압박에 이성휘는 잠시 진땀을 빼야 했다.
그 반응이 재밌었는지,
심기가 불편하다는 모습을 보이던 조홍이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에게 쩔쩔 매는 이성휘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사실 서한은 필요 없어요. 표기장군이 보고 싶을 때마다 직접 오면 되니까.”
그래서 아무런 기별도 없이 허도에 온 건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기고만장한 반응을 보이는 조홍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보고 싶었어요.”
흑발의 여인이 보조개가 볼록 보일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환한 고백에 이성휘 또한 옅은 미소로 대답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조홍은 항상 걸치고 다니는 황금 무구처럼 환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황금처럼 아름다웠고,
또한 황금처럼 밝게 빛났다.
배시시 웃음을 지을 때마다 영롱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를 접할 때마다 폭 빠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토목공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원래 상서령에게 직접 보고를 받아야 하지만…, 그냥 표기장군에게 보고를 받을래요.”
조홍이 토목공사의 진척도를 물었다.
그에 이성휘는 조금의 가감 없이 보고했다.
“징발된 인력들을 계속 동원하여 궁궐을 쌓고 성벽들을 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곧 초겨울에 접어들게 될 터라 시일이 점점 늦춰지게 될 것 같습니다.”
“좀 더 인부들을 재촉할 순 없나요? 언니께서는 한시라도 빨리 허도가 완공되기를 바라고 계시거든요.”
“불가한 일입니다.”
조홍의 말에 이성휘가 고개를 내저었다.
머지않아 겨울이다.
곧 기온이 아래로 곤두박질 칠 터.
바쁜 농번기(???)에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하필 늦가을에 토목공사를 실시하게 된 탓에 곧바로 겨울을 앞두게 되었다.
조조는 내심 강행군을 명령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현장에서 직접 토목공사를 감독해온 이성휘는 불가하다며 선을 그었다.
“아, 표기장군.”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조홍이 입을 열었다.
“곧 병주(??) 태원군(太??)에 똬리를 틀고 있는 흑산적들을 토벌하기 위한 원정군이 조직될 예정이에요.”
“지금 시기에 말입니까?”
“원소, 그 성가신 여자와 약조를 나눴었잖아요. 점거하고 있는 동평국(??國)을 아군에게 양도하는 것을 조건으로 흑산적의 배후를 공격해달라고 감히 언니에게 요구했었죠.”
순우경을 대리인 자격으로 보낸 원소는 연주 동평국의 양도를 조건으로 공손찬과 동맹을 맺고 있는 흑산적의 토벌을 주문했다.
흑산적은 매우 성가신 적이다.
그 규모가 무려 수십만에 달했으며,
또한 험준한 산세에 의지한 채 기습공격을 매번 감행했기에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현재 원소군은 공손찬이 농성하고 있는 역경루(???)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배후를 교란하고 있는 흑산적 세력을 칠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원소는 한시라도 빨리 공손찬군을 멸망시킬 수 있도록 조조군 세력을 흑산적 토벌에 동원하려 했다.
“아마 표기장군이 가게 될 것 같아요.”
“…….”
“그 먼 상당군(上??)과 태원군(太??)까지 진출할 원정군을 이끌 적임자가 표기장군 말고 천하에 어디 있겠어요?”
조홍의 말에 이성휘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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