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화 〉 279. 흐릿한 기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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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주(??)에 속한 영천군(?川?) 허현(??)이 새로운 도읍지로 선정되었다.
도읍으로 선정된 이후,
조정대신들에 의해 허도(??)로 불리게 되었다.
황제 유변에게 간언하여 수도를 옮길 것을 명령한 조조는 전(?) 중심지였던 연주성을 사촌 하후돈에게 일임한 뒤에 세력의 중심지를 허도로 옮겼다.
“어서 짐들을 옮겨라!”
“오늘 밤까지 속히 모든 짐들을 옮겨야 한다!”
하루에만 수백 대가 넘는 수레들이 성 안팎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연주 북부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들 또한 예주로 이동했고, 조조의 참모들 또한 천도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모두 허도로 이동하였다.
한나라의 새 도읍을 쌓는 일이다.
황궁을 세우고 성벽을 보수하는 등,
해야 될 업무들이 산더미였기 때문에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쁜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정말 우리 같은 연놈들이 이렇게 출세를 해도 되는 거야? 조정군에 임명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영광이었는데… 이제는 황제군이라니.”
방천화극을 어깨에 올린 금발의 여인이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북쪽 변방의 촌놈들이,
이렇게 급속도로 출세를 해도 되는 걸까.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파격적인 출세의 연속에 여포가 부담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설마 이렇게까지 빠르게 출세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봉선 님께서 바라셨던 일이잖아요. 때로는 이렇게 벼락출세도 하는 법이죠.”
곤혹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여포의 모습에 흑발의 여인이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가련하고 청초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뺨에 보조개가 보일 정도로 활짝 웃었다.
한 떨기의 백합처럼 청초한 아름다움을 머금은 장료는 가느다란 눈웃음을 흘리면서 병주 무장들을 중용해준 ‘주인’에게 요염한 유혹을 보냈다.
“언젠가 반드시 은혜를 갚을게요, 표기장군. 그러니까 언제라도 불러주세요. 이왕이면 해가 완전히 떨어진 야심한 시각이면 좋겠네요.”
오해의 여지가 분명한 야한 농담을 던졌다.
일부러 노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골적으로 응큼한 미소를 지으면서 농담을 던질 리가 없었으니까.
온몸으로 은혜를 갚고 싶다는 마음이 진심이었는지 곧 유부남이 될 상관에게 눈웃음을 쳤다.
“혹시 이렇게 불러드리면 좋을까요… 주. 인. 님?”
이성휘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는 초선을 통해 ‘표기장군은 순종적인 시녀를 좋아한다.’라는 결과를 추출하게 된 장료는 언젠가 여포와 함께 시녀의 모습을 한 채 이성휘의 침소에 뛰어들 궁리를 하고 있었다.
몸으로 봉사하는 것,
그게 바로 진짜 보은이 아니겠는가.
여포가 이성휘를 남몰래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는 그 관계를 어떻게든 부추기려 했다.
“야, 야!”
장료의 입에서 나온 ‘주인님’이라는 가당치도 않은 호칭에 여포의 새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야릇한 망상이라도 했는지,
이성휘에게 풍만한 가슴을 살살 들이밀면서 유혹하는 장료에게 날카로운 목소리를 외쳤다.
주인님… 보은… 봉사… 침소….
생각만 해도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제아무리 일기당천의 용사라도 숙맥인 처녀라는 것은 숨길 수 없었는지, 음란하기 짝이 없는 부관의 말에 머리에서 열기가 솟구쳤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계신가요? 뭔가 여기서 야한 냄새가 난 것 같은데….”
음마(??)가 냄새를 맡고 다가왔다.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머금은 갈색 머리카락의 여인, 정숙하고 기품 넘치는 숙녀인 7촌 고모와는 달리 짓궂은 악동처럼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배시시 웃는 순유의 모습을 본 이성휘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축하해요, 애아빠가 되셨다면서요?”
종친들에게만 공유되었던 조조의 회임 소식은 이윽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결국 알려지게 될 일이었기에,
조조는 종친들로 하여금 방비와 대책을 마련한 뒤에 회임 사실을 공표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성휘 휘하의 장수들은 크게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주군인 조조와 혼인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고는 하나, 설마 이렇게 빨리 진도를 뺄 줄은 미처 몰랐던 모양이었다.
“고맙다.”
이성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축하를 보낸 순유의 말에 화답했다.
그 모습을 본 장료가 히죽 웃으면서 여포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괜찮아요, 봉선 님. 기회를 완전히 놓친 건 아니잖아요?”
“나, 난… 딱히 신경 안 써.”
“역시 병주의 비장이세요. 아이가 있는 유부남이라도 상관없다는 그 호기… 이 장문원, 평생 봉선 님을 본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거든!”
부성애가 담긴 미소를 짓고 있는 이성휘를 본 여포가 얼굴을 붉히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예전에도 물론 멋있었지만,
부성애가 느껴지는 이성휘의 모습은 부드러우면서도 매우 근사했다.
날카로운 칼날처럼 빈틈없는 모습들만을 보이던 사내에게서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유부남에게 이끌리게 되었다는 배덕감에서 성적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 * *
농서동씨 가문의 꼭두각시에서 패국조씨 가문의 꼭두각시가 된 유변은 유유자적한 삶을 보냈다.
모든 전권이 조조에게 넘어갔기에,
유변은 가만히 앉아 사공부의 관료들이 내미는 공문서에 도장만 찍으면 될 뿐이었다.
코흘리개라도 해낼 수 있는 간단한 업무들을 끝내면 널찍한 여가시간이 주어졌다. 이성휘가 유변을 내심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조조는 황제의 사생활에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폐하, 또 새들에게 먹이를 주십니까.”
유변은 평온한 여유를 즐기는 촌부처럼 전각의 대청마루에 걸터앉은 채, 견과류를 깎아 참새들에게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상서복야(書??) 종요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다가왔다.
“참새들을 여기서 배불리 먹이면…, 백성들이 구슬땀 흘리며 가꾼 밭은 건드리지 않을 게 아니오.”
진심이 느껴지는 농담이었다.
물론 지혜롭고 현명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곡식 낟알들을 먹어치운다며 참새들을 모두 박멸하라는 멍청한 우행을 범하진 않았기에 우스갯소리로 넘길 만한 말이었다.
“괜찮으시옵니까, 폐하.”
종요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에 유변이 견과류를 깎던 조각도를 옆에 내려놓고는 입을 열었다.
“사공 조조가 선정을 널리 베푼 덕분에 중원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고 있다고 들었소. 짐이 두 손을 놓은 채 태업을 일삼는 것으로 백성들이 기뻐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이려 하오.”
그 말은 곧 조조가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계속 베풀어나간다면 자신은 결코 권력에 욕심을 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전쟁과 굶주림으로 죽어갔는가.
선정을 행하여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개선한 조조의 능력에 감복하게 된 유변은 황제의 권위와 권한을 깨끗하게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 못난 황제가 유약하여 역적들의 준동을 막아내지 못했소. 그런 짐이 대체 무슨 염치로 정사에 미련을 둘 수 있겠는가.”
참새들에게 먹이를 주며 여가를 보내던 황제가 회의감이 느껴지는 미소를 흘렸다.
설령 암군으로 기록될지라도,
백성들이 예전처럼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탐욕의 권화였던 효령황제와 영사황후의 소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탈한 모습이었다.
“상서복야.”
“예, 폐하.”
종요를 부른 유변이 고개를 돌리면서 그를 응시했다.
“짐이 사공에게 잘 말해둘 터이니 이제부터 상서복야는 사공부의 막하로 들어가도록 하시오. 뛰어난 자질과 덕망을 갖춘 상서복야가 참새에게 호두나 줄 뿐인 촌부의 수발이나 들어서야 되겠소.”
“폐하, 어찌 그런 황망한 말씀을 하십니까…!”
“수발을 들 궁인들은 얼마든지 있지 않소.”
당장이라도 오열할 것처럼 어깨를 떠는 종요의 모습을 본 유변이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황제에게 어울리지 않는,
소박하고 순진무구한 웃음이었다.
백성들의 태평성대가 이어질 수 있도록 스스로 암군이 되기로 결심한 유변의 모습이 실로 안타까웠다.
* * *
인망이 두텁기로 명성이 높은 유주목(???) 유우가 저잣거리에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북방의 귀신이라 불리던 공손찬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어질고 현명한 성정으로 명망이 높았던 하북의 성군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끔찍한 만행을 범한 공손찬의 패악무도함에 하북의 수많은 사대부와 호족들이 분노하며 공손찬군에 등을 돌리기에 이르렀다.
“유주목 유우의 참모였던 유주종사(????) 선우보가 오환사마(???馬) 염유와 서로 연합하여 공손찬에 대항하기 위한 군세를 조직하였다고 합니다.”
“뒤이어 선비족 또한 공손찬군의 배후를 치기로 약속했다는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전풍과 심배가 연이어 보고했다.
그에 원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소식이군요. 이 기세를 몰아 아군 또한 군세를 출격하여 공손찬군을 압박하겠습니다.”
북방의 귀신이라 불리는 공손찬은 과연 뛰어난 용맹과 무력을 겸비한 장수였지만 그 포악함이 과연 동탁과 다를 바 없는 폭군이었다.
비정하고 난폭했으며,
인정과 자비를 베풀 줄 몰랐다.
공손찬의 포악한 성정에 질린 장졸들은 백기를 들며 원소군에 투항해왔고, 그때마다 공손찬은 부하들의 배신에 분노하여 더욱 가혹한 폭정을 벌여댔다.
“반드시 공손찬을 죽여 하북을 손아귀에 쥐겠습니다.”
안량과 문추,
장합과 고람을 동원하여 군세를 지휘했다.
무려 5만이 넘는 병력을 지휘하게 된 원소는 일제히 북상을 명령하면서 공손찬을 매우 집요하게 밀어붙였다.
드디어 공손찬에게 몰락이 찾아왔다.
그를 짐작한 원소는 두 번 다시 북방의 귀신이 맹위를 떨치지 못하도록 그 숨통을 끊어버리려 했다.
“…….”
엄격하고 철두철미한 모습을 보이면서 장졸들을 지휘하는 원소의 모습을 바라보던 봉기가 심려에 찬 표정을 지었다.
연주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남몰래 연모하던 사내가 죽마고우였던 호적수가 연분을 나누는 모습을 본 뒤부터 달라졌다.
특히 머리카락…,
둔부에 닿을 정도로 길었던 머리카락이 목덜미 언저리에 닿을 정도로 짧게 정돈되어 있었다.
명예와 영광을 상징하는 황금처럼 찬연하게 빛나던 금발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머리를 짧게 자른 이후부터 원소는 이따금씩 슬픔과 회한에 물든 미소를 지으면서 회한과 우수에 찬 마음을 흘렸다.
“병주와 청주의 호족들이 귀부의 뜻을 밝히기 시작했다는군! 공손찬을 따르던 유주 호족들도 대거 넘어오기 시작했네!”
참모 허유가 껄껄 웃으면서 쾌재를 불렀다.
대세는 결정되었다.
공손찬은 결국 철저히 고립된 채 쓸쓸하게 죽게 될 것이었다.
허유뿐만 아니라 다른 참모들 역시 공손찬군의 패망을 입에 담으면서 환희했다. 드디어 하북의 적수였던 공손찬이 무너질 때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 기쁜 소식에도,
슬픔에 찬 여인은 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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