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화 〉 278. 승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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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위 소식은 이성휘의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만들었다.
죽간에 적힌 요구조건이,
자신이 유변에게 건넨 죽간에 양위를 요구하는 조건이 적혀 있었다는 사실에 침음을 삼켰다.
유변과 유협… 난세 속에서 가슴 아픈 이별을 겪어야 했던 가련한 남매가 다시 재회하여 해후의 기쁨을 나누기를 진심으로 바랐건만, 결코 난세는 황실 남매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째서 제게 미리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성휘가 물었다.
그에 흑발의 여인은 불안감에 젖은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귀관에게 알리기 두려웠네. 물론 귀관을 불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잠깐 망설였던 것뿐일세!”
조조는 이성휘가 유변, 유협 남매와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무한한 총애를 받은 것은 물론,
직접 이복동생의 신병을 맡길 정도로 신뢰하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혹시라도 이성휘가 자신의 결단을 정면으로 배격할까, 두려운 마음이 들어 이성휘에게 알리지 못한 것이었다.
“저는 아만의 결정을 따를 뿐입니다.”
기별도 없이 사공부(???)에 온 이유가 양위 계획의 철회를 요구하기 위함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 예상과는 달리,
이성휘는 양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망설임 없이 결정에 따르겠다는 뜻을 보냈다.
“헌데 아만… 왜 이렇게 서두르려 하십니까.”
이성휘가 물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무리하게 서두르려는 조조의 모습이 위태롭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곡이 찔린 것일까. 이성휘의 물음을 들은 흑발의 여인은 입술을 꾹 깨물면서 작은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서두르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항상 제가 아만의 옆에 있을 테니까요. 저는 아만의 결정이라면 그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만… 위태롭게 보일 정도로 크게 서두르는 아만이 너무 걱정스럽습니다.”
날카로운 결단과 추진력은 분명 조조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러나,
무분별한 결단과 추진력은 독이 되는 법이다.
중원 3개 주를 제패한 조조군은 분명 황제를 갈아치울 수 있을 만한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탈출한 황제가 진류군에 갓 입성하자마자 양위를 거론하는 것은 위태로운 작두타기나 다를 바 없었다.
“패국조씨 가문의 천하를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서둘러야 하네.”
“머지않아 천하를 거머쥐실 겁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서두르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성휘의 대답에 조조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이성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와 귀관의 아이에게… 한시라도 빨리 천하를 물려주고 싶기 때문일세.”
“예?”
“권력을 거머쥐기 위해 온갖 더러운 권모술수를 일삼는 내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네.”
조조가 떠안은 속마음을 알게 된 이성휘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며 당혹감을 내비쳤다.
그녀가 서두르려 했던 이유가,
바로 아이를 위해서였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까지 강압적으로 서두를 생각은 없었네. 그런데…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점점 서두르게 되더군.”
목적을 위해 황제를 갈아치우는 폭거를 일으킨다면 조정대신과 사대부들로부터 무수한 비난과 멸시를 받게 될 것이었다.
그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기존 권력계층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혈겁이 벌어지게 될 게 분명했기에 조조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숙청을 끝내려 했다.
“아만.”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이는 조조의 모습에 이성휘가 쓴웃음을 지었다.
두 손을 뻗으면서,
여인의 새하얀 손길을 맞잡았다.
“아만의 곁에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패국조씨 가문을 위협하는 자들은 천하제일검이 모두 대적할 것입니다.”
이성휘는 낯간지러운 말을 입에 담으면서까지 그녀의 불안을 해소해주려 했다.
도래하지 않은 상황을,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그녀를 위로했다.
패국조씨 가문의 천하를 이룩하기 위해선 두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주저해선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혹시라도 내가 저지른 죄가 아이에게 전가되진 않을까…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 철혈의 군주는 끊임없이 주저하고 망설이게 되었다.
“저와 아만의 아이입니다. 그 어떤 시련과 위험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잘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
자상하게 위로하는 이성휘의 말에 조조는 깊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관.”
“예, 아만.”
“그럼 심중의 불안과 두려움을 모두 떨쳐낼 수 있도록… 나를 꼭 안아주겠나?”
“물론입니다.”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서 귀여운 제안을 건네는 조조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이성휘는 작은 체구를 꼭 끌어안으면서 가녀린 등을 쓰다듬었다.
작은 다람쥐처럼,
흑발의 여인이 품에 쏙 들어왔다.
사륵사륵 흐트러지는 검은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은 이성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체취를 맡으면서 사랑하는 여인과 태중에 있는 아이에게 진심어린 사랑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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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숙고하여 논의한 끝에,
조조는 유변에게 3년의 유예를 내렸다.
하지만 가까스로 황위를 유지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외조(外?)와 내조(??)의 모든 권한들이 조조에게 위임되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유변은 불과 아홉 살 밖에 되지 않은 유협에게 책임과 부담을 떠넘기고 싶지 않았으므로 결국 조조의 통보를 받아들여 빈껍데기 황위를 뒤집어쓰기로 결정했다.
“선황의 소생인 진류왕(??王) 유협을 황태제(?太?)로 책봉한다.”
조조가 황제를 대신하여 교서를 발표했다.
황태제,
유변은 황위를 계승할 후계자에 이복동생인 유협을 임명했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진행된 황태제 책봉 소식에 조정대신들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동생을 황실의 후계자로 임명하는 것이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매우 특수한 경우에서만 이뤄지는 일이었기에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청춘이 구만리인데 어찌하여 벌써 내정하십니까!”
“진류왕의 영특함과 총명함은 소신들도 당연히 알고 있사오나, 이는 너무도 갑작스러운 결정이십니다.”
동생을 후계자로 임명하는 것은 곧 스스로가 아이를 보지 못하는 불구임을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또한,
황후가 불임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기도 했다.
남매 사이에 우애가 깊은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후계로 삼는 것은 별개의 경우였다. 황실의 위신이 달린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진류왕은 짐을 대신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고 민심을 수습해주었소…. 그리고 여기 있는 사공과 협력하여 중원을 평정하였으니, 응당 황실의 후계자로 삼는 것이 지당할 것이오.”
유변이 조조의 참모들이 전한 대사들을 그대로 읊으면서 책봉의 이유를 밝혔다.
그를 들은 조정대신들은 조조의 의중이 깊게 반영되어 있음을 눈치 챘다. 황태제 책봉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짐은 사공의 간언을 받아들여 수도를 옮기려 하오.”
전쟁의 참화로 인해 잿더미가 된 낙양을 완전히 복구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조조는 황제에게 물자들이 풍부한 예주를 새 도읍지로 삼을 것을 간언했다.
수도 이전을 두고 조정대신들이 웅성대며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관료들 중 대부분은 예주로 가게 되면 더 이상 굶주릴 일은 없을 것이라며 환대의 의사를 밝혔다.
“낙양을 버리고 떠난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소. 하루아침에 낙양을 복구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주는 하남 일대에서 물자들이 풍부하기로 유명한 지역이 아닙니까…! 저는 가문과 식솔들을 위해서라도 천도에 찬성하겠습니다.”
사공 조조가 제 입지를 넓히기 위해 새 도읍을 세우려 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어찌 그 시커먼 야심을 모르겠는가.
본거지인 연주와 가까우며,
또한 그녀의 고향인 예주 패국과 인접했다.
황실과 조정을 위리안치(????)하듯 가둬둔 뒤에 마음껏 부리겠다는 속셈이 보였다. 그 속셈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조정대신들은 권력을 거머쥔 조조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찬동햇다.
“또한 짐과 황후를… 황실과 조정을 구한 표기장군 이성휘에게… 친히 육군(?)을 맡기려고 하오.”
육군.
천자(?子)의 근위병단을 일컫는다.
무력을 동원하여 만승천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육군은 황실의 힘과 권위를 상징했다.
죽간을 통해 유변에게 보낸 요구사항들 중에 포함된 조건이었다. 황제군(???)의 군권을 표기장군 이성휘에게 양도한다, 유변은 그 조건을 받아들여 이성휘에게 황제의 고유권한을 위임했다.
“성심을 다해 받들겠습니다.”
황제 유변으로부터 황제군을 상징하는 보검을 받게 된 이성휘가 고개를 숙이면서 예를 취했다.
“표기장군….”
“예, 폐하.”
두 손으로 보검을 받든 이성휘가 유변의 부름에 대답했다.
그에 유변이 이어 말했다.
“황태제를 잘 부탁하네.”
“…명심하겠습니다.”
설령 한나라가 정해진 운명에 따라 멸망하게 되더라도 반드시 유변과 유협을 지키겠노라고, 보검을 받든 이성휘는 뼈에 새기는 심정으로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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