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 275. 승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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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내외를 형양도위의 치소로 안내한 조조는 개봉현(???)에 있는 사대부의 가택에서 머물렀다.
감히 사공 조조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사대부 일가는 망설임 없이 가택을 대여해주었다. 덕분에 조조는 이성휘와 함께 단둘이서 대화를 나눌 공간을 얻게 되었다.
“귀관도 어서 마시게. 설차일세.”
“…감사합니다.”
후우,
이성휘가 한숨을 내쉬면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설차. 미용과 건강에 탁월한 효과를 자랑했기에 사대부의 여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이름은 썩 기분이 나쁘지만 효과는 상당한 듯했다.
“삼보 지역의 활약상을 들은 백성들이 귀관을 천하제일검이라 부르더군. 후후, 중원제일검이 드디어 천하제일검이 된 것일세.”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성휘가 천하제일검(?下?一?)이라는 낯 뜨거운 별칭에 학을 떼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한 모습에 흑발의 여인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천하제일검,
과연 부관에게 어울리는 별칭이었다.
“난세 속에서 천신만고를 겪어야 했던 황제와 황후가 해후의 환열을 나누는 모습을 본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했다고 하더군.”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던 조조가 황실 내외를 떠올리면서 침음을 흘렸다.
그들이 딱히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황실 내외를 동정하고 있었다.
선대 황제들이 쌓은 원죄들을 모두 떠안아야 했던 유변의 삶은 철혈의 군주조차 일말의 동정심을 느낄 정도였다.
“황제와 황후의 재회를 보며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이성휘가 찻잔을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중얼거렸다.
오랜 시련과 비극 끝에 해후의 행복을 맞이하게 된 황실 내외.
마치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꿋꿋하게 위기를 이겨낸 끝에 재회를 이뤄낼 수 있었던 황실 내외에게 감탄을 품게 되었다.
“만약에 내가 황제처럼 역도들에게 붙잡힌 채 끌려가게 된다면 귀관은 어쩔 텐가?”
“반드시 구해낼 겁니다.”
이성휘가 진지한 목소리와 함께 진심을 담은 시선을 조조에게 보냈다.
기필코 구하겠노라고,
역적들을 모조리 섬멸한 뒤에 연주로 돌아오겠노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단 한 번도 조조를 향한 마음을 의심해본 적 없었던 이성휘였기에 그 물음에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동쪽의 도적들을 모두 토벌했고 서쪽의 역적까지도 척살했습니다. 아만에게 만약 위해를 가하는 자가 있다면 절대로 망설이지 않을 겁니다.”
중원을 위협했던 백만 명의 도적떼를 도륙했고 사예주를 도모하려던 만고의 역적을 척살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조조와 패국조씨 가문의 천하를 위해서였다.
천하사방을 모두 시산혈해로 물들이는 혈겁을 달성해낸 천하제일검은 매우 진지하게 조조의 물음에 대답했다.
“큼, 큼큼…! 과연 천하제일검이로군.”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거침없이 소신을 밝히는 이성휘의 모습에 머쓱한 마음이 들었는지, 조조는 헛기침을 하면서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옆으로 홱 돌렸다.
흥,
자렴과 바람을 피운 주제에….
작은 목소리로 그를 향한 불만을 쏟아냈지만, 자신을 향한 마음을 끝까지 관철하는 이성휘의 모습이 싫진 않았는지 입가에 미소가 걸리게 되었다.
‘그, 그래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니… 겸허하게 한 번쯤은 용서해줘도 되겠지. 자렴에게 이야기를 듣자하니 하룻밤 불장난처럼 치른 관계라던데….’
부관은 천하가 내로라하는 최고의 맹장이다.
중원제일검이라 불렸으며,
또한 지금은 한나라의 표기장군이었다.
언젠가 군부의 정점에 등극하게 될 부관에게 일편단심으로 자신만을 사랑하라는 것은 어쩌면 너무 표독스러운 요구일지도 모른다.
결국 부관이 첩을 들이게 된다면,
차라리 사촌동생을 소실로 들이는 게 현명한 결정일지도 모른다. 부와 권력을 노리고 부관에게 접근해올 여우들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물론 그런 빌어먹을 년들이 있다면 직접 내 손으로 없애버리겠다만.’
조홍을 소실을 들이기로 결정하였음에도 여전히 조조는 이성휘를 향한 독점욕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사촌동생이기에 허락했을 뿐,
만약 이름도 못 들어본 년들이었다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부관, 진지하게 할 말이 있네.”
“하명하십시오.”
이성휘가 고개를 들며 조조에게 말했다.
독대가 이뤄지게 된 이유.
잠자코 그녀가 본론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본론을 경청한 다음에 자신 또한 용건을 밝히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군. 대체 무슨 용건이기에 길게 늘여서 말하는 건지….’
효율과 실리를 중시하는 조조는 거두절미하고 요점만 전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렇기에 쓸데없이 미사여구를 넣어 대화를 질질 끄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의 조조는,
본인이 몹시 싫어하는 행위를 스스로가 하고 있었다.
중원으로 돌아온 황제를 어떻게 조처할지에 대하여 의논하기 위함인 걸까, 이성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초조한 심정으로 본론을 기다렸다.
“귀관….”
흑발의 여인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작은 어깨를 바르르 떨며,
궤좌하고 있던 두 다리를 흔들기까지 했다.
황제를 끼고 중원의 제후들을 호령하게 된 여걸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이면서 두려움에 찬 표정을 짓는 조조의 모습에 이성휘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아이를… 가졌네.”
“예?”
“귀, 귀관의… 귀관의 아이를 가졌네. 귀관의 아이를 회임했단 말일세…!”
“…….”
사고가 멈췄다.
생각이 정지했다.
두 눈을 뜬 채 기절했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로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조조의 발언에 이성휘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게 된 것처럼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귀관의 간청을 받아들여 의원에게 진찰을 받았을 때… 맥을 살폈던 의원이 전한 사실일세.”
불안감에 몸을 떠는 것은 조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거부할까봐.
자신과 아이를 부담스럽게 생각할까봐.
지금까지 순조롭게 이어져온 부관과의 관계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진 않을까, 조조는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성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습니까.”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 뒤,
마침내 이성휘가 입을 열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귀, 귀관?”
회임 사실을 들은 이성휘가 보인 모습은 조조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채,
격정에 사로잡힌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옅은 미소를 짓는 게 고작이었던 무뚝뚝한 성정의 사내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 모습에 크게 놀랐는지 조조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제게 정말… 가족이 생긴 거군요.”
“아.”
만감이 묻은 듯한 이성휘의 중얼거림에 조조가 탄성을 흘렸다.
잊고 있었다,
부관에게는 혈육이 없다는 것을.
가문은 물론 가족 또한 없었다.
그렇기에 아이가 생겼다는 말에 더욱 기뻐하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까지 얼마나 외로웠을까.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고독과 쓸쓸함을 떠안은 채로 지금까지 살아와야 했을 그 아픔을 상상한 조조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연모하는 사내를 응시했다.
“귀관의…, 귀관과 나의 아이일세. 틀림없는 귀관의 아이일세.”
어깨를 떨며 기뻐하는 사내의 모습을 보며 흑발의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무명 높은 천하제일검이,
처음으로 연약하게 느껴졌다.
혹시라도 회임 소식을 듣고 부관이 매몰찬 모습을 보이진 않을까, 그를 경계했던 의심암귀가 얼마나 무가치한 기우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우읏!”
숙연함에 찬 표정을 지은 이성휘가 두 팔을 벌리면서 조조를 껴안았다.
연모하는 부관의 품에 안기게 된 조조는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부관의 어깨가 움찔움찔 떨리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유독,
부관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흑발의 여인은 몸을 애처롭게 떠는 이성휘의 등을 상냥하게 쓰다듬으면서 격정을 달래주었다.
“귀관과 나의 첫 아이이며… 패국조씨 가문의 소중한 후계일세.”
“예.”
“그러니 애지중지하며 키우도록 하세.”
“…예.”
한없이 사랑스러운 여인의 작은 체구를 꼭 끌어안은 이성휘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생애 다시없을지도 모르는,
천하제일검의 울먹거리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은 조조는 모성애를 담은 미소를 지으면서 사랑하는 부관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부디 이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말일세, 귀관.”
품에 안긴 조조가 방긋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분명 내게… 전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
흑발의 여인을 꼭 끌어안은 채로 이성휘의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대로 망부석이 된 것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입술만이,
파르르 떨리는 입술만이 혼란스러운 이성휘의 속내를 대변하고 있었다.
이윽고 두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였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좌우로 빠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 저는….”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이성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조홍뿐만 아니라 조인과도 관계를 맺게 되었다.
지금 만약 그 말을 전한다면 자신은 생물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철저히 매장당하게 될 것이 분명했기에 이성휘는 생애 처음으로 ‘융통성’이라는 것을 발휘했다.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아만에게 그리 전하려 했습니다.”
“후후, 싱겁기는….”
달달하고 낭만적인 이성휘의 고백에 조조는 수줍은 미소를 띠우면서 쑥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어서 오게, 귀관.”
만약 태중에 있는 아이가 부모의 속마음을 들었다면 깊은 한숨을 내쉬었으리라.
동상이몽 속에서,
이성휘와 조조는 함께 회임의 기쁨을 나누면서 서로를 온기에 의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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