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화 〉 269. 양자택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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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면서 병장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을 뒤덮었다.
전장에 출현한 새로운 군세.
찬연하게 빛나는 황금 갑주를 걸친 흑발의 여인이 군세를 지휘했다.
우렛소리처럼 우렁찬 나팔소리와 함께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군세는 위풍당당한 기염을 발산하면서 살육을 이어나가던 동백군을 압도해버렸다.
“자… 렴?”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면서 필사적으로 분전하던 조인이 놀라 군세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대장기.
분명 평동장군(????) 조홍의 군세였다.
황제와 공경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것을 어떻게 눈치 채고 군세를 움직였단 말인가. 조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뜨며 군세를 지휘하고 있는 사촌을 바라보았다.
‘급박한 상황 탓에 미처 전령을 보내지 못했는데….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전령을 보내어 증원을 요청한 적이 없었음에도 조홍이 군세를 움직였다.
분명 아군은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거머리처럼 질긴 동탁군 놈들이 뒤를 위협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렇게 판단한 조홍은 일선지휘관의 권한으로 군세를 동원했다. 직감과 본능을 바탕으로 한 임의적 판단으로 군세를 움직인 것이었다.
“자렴 님.”
검을 휘두르며 동백군 무관들을 무자비하게 베어내던 이성휘가 고개를 들어 군세를 바라보았다.
포판현의 군세가 당도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던 병사들에게 있어 증원부대의 등장은 한 줄기의 광명처럼 느껴졌다.
“조조군이다!”
“놈들이 강을 넘어 쳐들어왔다!”
조조군이 삼보(三?) 지역으로 진입했다.
포수를 건넌 뒤,
삼보 지역을 도모하기 위해 온 것이 분명했다.
낙양대전의 완패로 인한 후유증이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였으므로 조조군의 군세를 본 동백군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뭐… 뭣! 놈들이 군세를 동원했단 말인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놈들! 우리들과 전면전이라도 벌일 셈이냐!!”
뒤늦게 전장에 도착한 이각과 곽사가 두 눈을 부릅뜨면서 조조군 군세를 바라보았다.
놈들은 배수진을 치고 있었다.
강을 도하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수천 명에 달하는 조조군은 배수진을 친 채 기세를 발산했다.
이윽고 쩌렁쩌렁한 고함소리와 함께 배수진을 치고 있던 조조군이 움직였다. 급습에 휘말린 황제와 공경들을 구하기 위해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 폐하를 구원하라!”
“동탁의 주구들을 모조리 격멸하라! 황실과 조정을 기만한 역적들을 쳐라!!”
선두에 선 날랜 기병들이 달려들면서 황제와 공경들을 습격한 동백군을 급습했다.
추격전을 계속 이어나가느라 진형이 와해된 상태였던 동백군은 조조군의 공세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 적의 증원부대를 예상했겠는가.
황제와 공경들의 신병을 탈환하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기에 취약한 빈틈이 생기고 말았다. 군세를 동원하여 강을 도하한 조홍은 그 빈틈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조조군이 몰려온다!”
“젠장, 어서 퇴각하라! 놈들이 온다!”
가장 먼저 철퇴를 결정한 병력은 이각과 곽사가 보낸 추격부대였다.
작은 개미떼를 짓밟듯이 도망치는 관료와 궁인들을 끔찍하게 살육하면서 잔인한 쾌감을 즐기던 병사들은 강성한 힘을 가진 강자의 등장에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실로 비겁하고 추잡하다.
잔악을 떨치던 서량 병사들이 강을 도하한 증원부대에 놀라 도주하는 광경은 필부들의 향연을 보는 듯했다.
“큭!”
뿔뿔이 흩어진 채 도망치는 병사들을 바라보던 동백이 굴욕감에 찬 침음을 흘렸다.
적의 증원부대가 도착했다.
손을 조금만 더 뻗으면 황제와 공경들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었거늘… 손아귀에 거의 잡힐 뻔한 황제와 공경들이 빠져나갔다.
그 안타까움이 동백의 마음을 찢어발겼다.
“당장 이각과 곽사에게 중앙군 병력을 더 동원해서 놈들을 저지하라고 이르세요! 절대로 황제와 공경들을 놓쳐선 안 됩니다!!”
회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광분을 토해냈다.
절대로 황제를 놓쳐선 안 된다.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황제는 결코 없어선 안 될 정통성이다.
전쟁에서 군주가 잃었음에도 농서동씨 가문이 세력을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은 황제와 공경들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대로 황제를 눈앞에서 놓치게 된다면 장안성을 중심으로 형성한 잔존세력은 그대로 사분오열하여 흩어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걱정 마십시오, 위양군. 이각과 곽사가 이끄는 중앙군이 2만에 달하지 않습니까.”
절박함에 찬 고함을 내지르던 동백에게 서영이 말했다.
잠시 변수가 발생했으나,
판세가 완전히 뒤집힌 것은 아니었다.
적의 증원부대가 출현하였다고 하여 전력의 격차가 달라지진 않는다. 2만에 달하는 증원군과 동관 전선에 주둔하고 있는 대규모 병력을 모두 동원한다면 조조군을 격파하고 황제를 되찾을 수 있을 터였다.
“오랜 싸움으로 이성휘는 크게 지쳤을 겁니다! 계속해서 군세를 보내어 소모전을 펼친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고석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포기하긴 이르다.
아니,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잠시 허를 찔렸지만 아군은 여전히 강성했고, 또한 삼보 지역에는 수만 명에 달하는 군세가 있었다.
감히 알량한 위세를 믿고 강을 도하한 조조군 군세는 스스로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격에 지나지 않았다.
머지않아 사방에서 아군 군세들이 달려들어 만용을 범한 조조군을 찢어발길 것이었다.
“어서 이각과 곽사에게 전령을 보내라!”
“예!”
서영의 외침에 무관이 달려 나갔다.
도움을 청하는 것이 영 껄끄러웠지만,
놈들 또한 이대로 황제와 공경들을 놓치게 된다면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은 매한가지였으므로 분명 증원을 파견할 것이라고 여겼다.
‘놈들이 강을 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반격을 가하며 증원부대들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번다면… 다시 황제를 잡을 수 있다!’
동백이 손톱을 콱 깨물면서 흙먼지가 가득 휘날리고 있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조조군의 증원부대가 황제와 공경들의 신병을 확보했다. 이윽고 조조군은 사방으로 날카로운 창검들을 뻗으면서 원진(??)을 펼쳤다.
“위양군!”
동백을 호위하던 고석이 소리쳤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듯,
한쪽을 바라보면서 날카롭기 그지없는 고함을 내질렀다.
“이각과 곽사의 병력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예?”
적 증원부대의 등장으로 잠시 물러섰던 중앙군 병력이 아예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다는 듯,
전의를 상실한 장안성의 중앙군 병력이 마치 썰물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 광경을 본 동백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영과 고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계속해서 병력을 투입하여 장기전으로 이끈다면 결국 적들은 지리멸렬하여 흩어질 게 분명했음에도 이각과 곽사는 절대로 해선 안 될 최악의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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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성에서 권세를 누리면서 여생을 보내면 그뿐인 것을 구태여 꼭두각시 황제와 무능한 공경들을 무리하게 추격할 필요가 있겠는가.
놈들은 빈껍데기일 뿐,
굳이 황제와 조정대신들에게 집착한 이유가 없다.
정치적 판단력이 전무했던 이각과 곽사는 계속해서 병력을 급파하여 조조군을 압박하라는 동백의 지시에 불응하여 군세를 뒤로 물렸다.
“분명 그 계집은 우리를 화살받이로 세우려는 모략을 꾸미고 있는 것일세.”
“빌어먹을 년, 감히 우리들을 제 종처럼 부리려 들다니!”
이각과 곽사는 휘하에 둔 2만의 중앙군 병력을 희생시킬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농서동씨 가문에 집중된 권력을 빼앗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중앙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반역을 심중에 품기 시작한 이각과 곽사는 오로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움직일 뿐, 더 이상 농서동씨 가문을 위해 싸우려 들지 않았다.
“우리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사냥개처럼 뒤를 쫓아야 한단 말인가!”
“그 말이 맞네. 무리하게 추격하여 희생을 감수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 필시 동백, 그 년의 모략이 분명하네.”
날카로운 병장기를 치켜든 이각과 곽사가 말머리를 돌리면서 군사들에게 철군을 명령했다.
눈앞에 황제가 있음에도,
서량의 두 장수들은 철퇴를 선택하는 최악의 결정을 내렸다.
‘우리에게 장안성이 있는데 대체 뭐가 아쉬워서 황제에게 집착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판단을 내린 이각과 곽사는 전력을 보존하는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내 조카들을 죽인 원흉이 바로 저기에 있지 않은가!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미는군!”
“지금은 원한에 집중할 때가 아닐세.”
곽사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이각은 휘하 장수들과 함께 뒤로 물러나 군세를 수습하는 일에 집중했다.
수십 척에 달하는 선박들이 조조군의 퇴각을 지원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음에도 이각과 곽사는 동백의 지시를 일절 무시한 채 농서동씨 가문이 독점하고 있는 권력을 강탈하겠다는 흉계를 품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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