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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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와 공경들을 억류한 동백이 대장군(大將軍) 동민에게 교섭을 제안한 것은 분명 숙조부라면 자신이 건넨 조건을 받아들이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와 공경들을 확보했다.
유약한 성정의 숙조부라면 황제와 공경들의 신병을 다시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조건을 받아들일 터.
그렇게 동백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숙부를 후계 구도에서 떨어트린 뒤, 이각과 곽사 같은 간신들을 모조리 척결한 다음에 너덜너덜하게 변한 세력을 다시 확립시키려 했다.
“위양군 동백!”
“대장군부의 명이다! 어서 투항하라!”
장안성에서 출병한 2만 명의 중앙군이 풍익군(馮翊郡)에 주둔하고 있던 동백의 군사들을 포위했다.
앞으로 겨눈 창검들.
활시위에 내걸린 날카로운 화살들까지.
이각과 곽사가 이끄는 중앙군이 동백에게 무조건적인 투항을 요구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선진을 담당하는 서량 기병대를 통해 이각과 곽사의 으름장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위양군!”
“이각과 곽사… 장안성의 중앙군입니다!”
서영과 고석이 놀라 동백에게 다가왔다.
갑주를 걸친 회색 머리카락의 소녀는 좌우에 장수들을 거느린 채 풍익군을 새카맣게 포위하는 중앙군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각과 곽사,
빌어먹을 두 역적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분명 숙부를 충동하여 중앙군을 움직인 것일 터.
만약 후계 구도에서 숙부가 떨어지게 되면 자신들은 결국 죽은 목숨을 테니 자구책으로 군세를 동원한 것이리라. 군사적 재능은 눈곱만큼도 없는 주제에 정치적 식견만큼은 꽤 제법이었다.
“위양군은 황제와 공경들을 납치했다!”
“어서 병장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너희들은 위양군의 간사한 꾀에 넘어갔을 뿐이니 죄를 묻지 않겠다!”
동백을 따르는 병력들은 수천 명에 이른다.
비록 2만의 군세를 가지고 있더라도 풍익군에 주둔하는 모든 병력과 싸우는 것은 큰 부담이다.
그렇기에 이각과 곽사는 풍익군을 포위하면서 수적 우위를 자랑한 뒤, 역모에 가담한 죄를 묻지 않겠다며 동백의 장졸들을 회유하려 했다.
“표기장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숙부는 제 손을 더럽힐 배짱도 없는 인물이니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이각과 곽사, 저 간신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뒷전으로 물러난 채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실로 한심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제 손을 더럽힐 용기도 없는 작자가,
분수도 모르고 권좌를 차지하려 하니 기가 찰 수밖에.
절대로 숙부가 권좌를 차지해선 안 된다.
마치 자신들이 왕이라도 된 것처럼 중앙군을 거느린 채 거들먹대는 이각과 곽사의 모습을 바라보던 동황은 반드시 이 후계 구도 싸움에서 이겨야겠다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공격 준비를 갖춰라!”
“호위병들은 위양군을 보호하라!”
긴장된 시선으로 서로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서영과 고석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검을 빼 들었다.
날카로운 칼끝을 높게 치켜들며,
새카맣게 몰려든 중앙군 병력을 보며 위축된 모습을 보이던 장졸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윽고 전의를 회복한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반격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활을 든 동백군의 궁병들이 화살을 겨누는 것을 본 이각과 곽사는 방패를 든 보병들을 의지한 채 고함을 내질렀다.
“이런 역적 놈들!”
“좋게 구슬리려 했더니 표독스러운 독부의 군사들답게 물러설 줄 모르는군!”
수적 우위를 동원한 회유책은 결국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놈들,
감히 2만에 달하는 중앙군을 상대로 결전을 벌이겠단 말인가.
무려 두세 배에 달하는 중앙군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려는 저들이 실로 우둔해 보였다. 그에 이각과 곽사는 우둔한 만용을 응징하고자 중앙군을 통솔하는 모든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위양군과 주모자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황제와 공경들의 신병을 확보하라!”
휘황찬란한 갑주를 걸친 이각과 곽사가 보검을 뽑아 들면서 크게 소리쳤다.
이윽고 중앙군이 움직였다.
풍익군을 포위하고 있던 2만의 군세가 마침내 공세를 시작했다.
동탁이 낙양대전에서 참살된 뒤, 빈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권력투쟁이 마침내 본격화되면서 전쟁이라는 물리적 충돌로 빚어지게 된 것이었다.
* * *
풍익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장안성의 중앙군과 풍익군의 동백군,
동탁 군 소속의 병력들 중에 정예로 손꼽히는 두 군단이 충돌했다.
마치 철천지원수와 맞붙은 것처럼 두 병력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윽고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혈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폐, 폐하!”
“병사들의 비명 소리이옵니다…! 분명 방금 전에 고함이 들리지 않았사옵니까?!”
고릉현에 위치한 좌풍익의 치소에 구금된 공경들이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를 듣고 경악을 토해냈다.
이 비명 소리는 분명,
처절하게 죽어갈 때 내지르는 단말마였다.
비명과 함께 들리기 시작한 금속음에 공경들의 불안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분명 가까운 지척에서 병사들끼리의 교전이 벌어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대체 누구와 싸우고 있단 말이오?”
“제가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황제와 조정대신들,
그리고 궁인과 황실 무관들에 이르기까지.
좌풍익의 치소에 구금된 인원들은 무려 수백 명에 달했다.
일제히 폭동을 일으킨다면 경계병들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도 모르나, 구금된 인원들은 모두 비무장 상태였기에 지척에서 날카로운 고함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음에도 별다른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구금된 황제와 조정대신들은 그저 전전긍긍하며 천운에 맡길 뿐이었다.
“큭!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밖에서 잠군 게 분명하오…! 감히 황제 폐하와 조정대신들을 구금하다니…!”
태복(太僕) 노욱이 굳게 닫힌 문을 두들겼으나 자물쇠를 걸었는지 요지부동이었다.
문을 뜯어낸다면 되겠으나,
바깥에서 지키고 있는 경계병들을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에 힘을 동원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대체 어디서 들리는 비명 소리란 말이냐!!”
대홍려(大鴻臚) 주환이 문을 두들기면서 바깥에 있던 경계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다급한 물음에도 묵묵부답일 뿐이다.
문 너머로 보이는 그림자를 통해 경계병들이 있음을 알 수 있었으나, 치소를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경계병들은 그저 침묵만을 지켰기에 조정대신들은 바깥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조조군이 온 게 아닌가? 분명 황상 폐하를 역적들의 손아귀에서 구원하고자 군세를 몰고 이곳 풍익군으로 온 것일 수도 있지 않나!”
태상(太常) 충불이 막연한 희망을 담아낸 목소리로 소리쳤다.
조조군,
마침내 조조군이 당도한 것이다!
동탁의 총애를 받고 열후에 봉해진 동백을 누가 감히 공격할 수 있겠는가.
조조군이 분명했다. 불바다가 된 낙양에서 황후와 조정대신들을 구출했던 중용무쌍한 군대가 마침내 풍익군에 도달한 것이리라.
“역적들이 천치가 아니고서야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은 동관(潼關)을 철저히 웅거하고 있을 텐데…, 어떻게 조조군이 온단 말입니까?”
“조조군이 분명하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농서동씨 가문의 계집을 친단 말인가!”
일말의 희망마저 버리고 싶진 않았는지,
현실적 어려움을 들며 지적하는 문관의 말에도 충불은 조조군이 분명하다며 목청을 높였다.
목소리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충불의 일방적인 주장에 조정대신들 중 일부가 정말로 조조군일지도 모른다며 일말의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분명 변고가 벌어진 것이 틀림없다. 궁인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황제 폐하를 모시게.”
“알겠습니다.”
비명 소리들이 연이어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달은 상서복야(尙書僕射) 종요가 지엄한 목소리를 내며 궁인들에게 명령했다.
그에 궁인들이 각오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상서복야… 일이 어찌 되겠는가.”
유변이 어깨를 떨며 물었다.
그에 종요가 입을 열었다.
“폐하, 위기가 경각에 달한 상황일수록 더욱 강건하게 대처하셔야 합니다! 소신들이 목숨을 바쳐 폐하를 보필할 것이오니 부디 안심하소서.”
금속음과 비명 소리들이 울려 퍼지는 아비규환 속에서도 오직 종요만이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종요의 모습에 안정을 얻게 되었는지 유변은 벌벌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적습이다!”
“놈들이 담장을 넘어왔다! 막아라!!”
조정대신들이 상황을 전혀 모른 채 추측만을 쏟아 내고 있었을 때,
바깥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들려온 비명 소리들과는 달리 문 너머에서 곧바로 들려오고 있었다. 분명 창검을 든 경계병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좌풍익의 치소에 의문의 병력들이 쳐들어온 것이었다.
“카학!!”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시뻘건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치면서 황제와 조정대신들이 구금되어 있던 건물에 흩뿌려졌다.
촤하악─!
물감처럼 점철된 붉은 핏물,
흩뿌려진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소름 끼치는 광경을 본 조정대신들은 비명을 내지르면서 뒤로 물러섰다.
“피, 피다!”
“문 너머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소이다!”
금속음이 연신 울렸다.
그때마다 끊어질 듯한 비명이 들렸다.
독 안에 갇힌 쥐처럼 건물에 갇힌 유변과 조정대신들은 좌풍익의 치소를 급습한 병력이 우호적인 세력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폐하.”
남성의 목소리와 함께,
자물쇠로 굳게 닫힌 문짝이 뜯겨 나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격전을 치렀음을 보여주듯 온몸에 피칠갑한 남성은 다급함에 물든 목소리로 유변을 부르면서 치소의 문을 좌우로 열어젖혔다.
“무사하십니까.”
병력을 이끌고 급습하여 수십 명에 달하는 경계병들을 베어내는 놀라운 기염을 토해낸 무장이,
표기장군 이성휘가 온몸에 피칠갑한 채로 황제와 조정대신들을 알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