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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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 군의 전횡과 폭정에 이어 가뭄으로 인한 기근까지 들이닥치게 되면서 장안성은 굶주린 아귀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생지옥이 되고 말았다.
기아와 가난에 빠진 장안성,
이웃끼리 서로 자식을 바꿔 잡아먹는 비참한 생활을 이어 나가던 백성들은 황제와 공경들이 전횡과 횡포를 보다 못해 결구 장안성을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장안성에서 폭동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분명 황제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겁니다.”
동태를 살피고 돌아온 척후들이 동백에게 장안성의 상황을 보고했다.
현재 장안성은 아비규환 상태로,
폭동으로 인한 폭력과 무질서가 반복되고 있었다.
실낱같은 희망이었던 황제마저 전횡과 폭정을 이기지 못한 채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장안성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키면서 동탁 군을 뒤흔들었다.
“되도록 빨리 장안성으로 복귀해야겠네요.”
어가에 몸을 숨긴 채 좀처럼 바깥으로 나오질 않는 황제의 모습에 동백이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풍익(馮翊)까지 불편한 동행하게 된 이후,
계속 숨 막히는 대립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공경들 중 일부가 동백에게 석방을 조건으로 한 거래를 제안하였으나, 오로지 자기 가문에 충성할 뿐이었던 동백은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명만 내려주신다면 날랜 병사들을 동원하여 황제를 포박하겠습니다.”
“옥체에 상처가 생겨선 안 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동백은 사로잡은 황제와 공경들을 이용하여 대장군 동민과 교섭하려 했다.
연이어 실책과 태만을 범한 표기장군 동황을 직위에서 해임하는 것을 조건에 붙였다. 조부께서 남기고 떠난 세력을 사치와 향락으로 말아먹을게 분명한 동황을 권력 구도에서 떨어트리기 위한 묘수였다.
황제와 함께 풍익으로 향한 이유,
그것은 숙조부와의 교섭에서 우위에 서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탐욕스러운 표기장군이 과연 스스로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오겠습니까? 소장은 자칫 내란으로 불거질까 우려스럽습니다.”
장수 고석이 우려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장안성에 폭동이 발생했다.
분명 끔찍한 소요에 휘말렸을 터.
이런 급박한 상황에 신경전을 이어나가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저도 길게 끌 생각은 없습니다. 최대한 일을 빨리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고석의 말에 동백이 대답했다.
본인 또한 그것을 원치 않노라고,
숙조부가 교섭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곧바로 장안성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말을 덧붙였다.
“숙부는 절대로 후계자가 되선 안 되는 파락호입니다. 이각과 곽사…, 그 빌어먹을 간신들의 사탕발림에 놀아나 사치를 일삼는 모습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제 안위가 위험해지자 곧바로 줄행랑을 치던 이각과 곽사의 모습을 떠올린 동백은 고운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증오를 내비쳤다.
이것은 반드시 해야 될 일이다.
무능한 숙부를 떨어트리기 위해서라도.
빌어먹을 간신들을 모두 척결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이 기회를 놓친다면 두 번 다시 적기가 오지 않을 것이었기에 동백은 굳게 마음을 다잡으면서 장안성의 소식을 기다렸다.
“위양군.”
휘하 장수들과 대책을 논의하던 동백에게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무관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복잡함에 물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황제가 위양군에게 소식을 보내 왔습니다. 지금 소식을 가져온 황제의 환관이 군중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황제가…?”
꽤 의미심장했다.
나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대하고 있을 황제가 환관을 보내오다니.
설마 미운정이라도 들었다는 건가.
아니,
그럴 일은 없겠지.
갑자기 없던 정이 생겨날 정도로 원수지간으로 점철된 관계는 녹록지 않았다. 만약 장안성으로 돌아간 뒤에 책봉식을 거쳐 황후가 되더라도, 농서동씨 가문을 증오하는 황제는 절대로 자신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것이었다.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위양군을 인질로 잡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유변은 환관을 통해 동백에게 부름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서영과 고석은 필시 황제를 따르는 교활한 공경들이 벌인 수작질이라고 외쳤다.
왜 황제가 부른단 말인가.
어떻게든 궁지에서 벗어나려는 술책이 분명했다.
“흠, 황제가 부른다라…. 받아들이도록 하죠.”
잠시 심사숙고하는 모습을 보이던 회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말의 관심이 생겼는지,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모르는 황제의 부름을 받아들였다.
함정일 게 뻔한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동백의 행동에 서영과 고석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을 보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위양군!”
“함정일 게 분명합니다!”
휘하 장수들의 격렬한 제지에도 동백은 황제의 부름을 받아들였다.
무예에 능한 무관들을 대동한 채 황제를 만나겠노라고 설득한 뒤, 동백은 황제가 보낸 환관을 불러들였다.
* * *
유변과 동백이 담소를 나누게 된 장소는 고릉현(高陵縣)에 위치한 좌풍익(左馮翊)의 치소였다.
황제의 처소로 사용하게 된 치소에서 얼굴을 마주하게 된 유변과 동백은 주변 시선들이 날카로운 경계심을 품고 있음을 깨닫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뒤,
황제와 위양군을 호위하던 무관들이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물러서면서 자리를 비웠다.
“무슨 용무로 부르셨습니까. 황상.”
갑주를 걸친 회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두 눈을 날카롭게 뜨면서 물었다.
유변이 어깨를 떨었다.
마치 뱀을 앞에 둔 양서류처럼,
동탁을 떠올리게 하는 동백의 눈빛에 질겁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치와 향락에 빠진 채 태업을 일삼을 뿐인 동황과는 달리, 동백은 서량의 군벌들을 이끌고 천하의 패권을 장악한 동탁처럼 살벌하고 무자비한 위압을 자랑했기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위, 위양군…. 짐과 공경들을 부디 풀어 줄 순 없겠는가? 무사히 풀어 준다면… 그대의 죄는 절대로 묻지 않겠네.”
뭔가,
이 패기 없는 모습은.
애처로운 목소리로 자신을 설득하는 유변의 모습에 동백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 목숨을 협박소재로 삼으면서 수만 명의 군세들을 위협했던 그 패기 넘치던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한숨만 나오게 만들었다.
‘만약 태평성대에 즉위했다면 분명히 이 남자는 훌륭한 성군이 되었을 테지.’
동백은 유변의 소심한 모습에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도 그를 나름 높게 평가했다.
물론 그 평가에는,
‘태평성대에 즉위했을 경우’라는 가혹한 조건이 붙었지만 말이다.
“저는 농서동씨 가문의 여식입니다. 황상의 부탁을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동백의 대답에 유변은 허탈감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동백이 실소했다.
표정과 반응을 통해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유변의 모습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목숨을 담보로 소동을 부릴 생각은 부디 접으시길 바랍니다. 두 번은 통하지 않을 테니까요. 만약 또다시 소동을 부리신다면… 황상께서 계신 현장에서 공경들의 목을 하나씩 베겠습니다.”
탈출을 감행했던 공경들을 아직 살려 두고 있는 것은 오로지 변덕 때문이다.
황제가 보인 그 용기에,
동백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목숨을 담보로 걸고 장졸들을 호령했던 유변의 기개를 높게 평가하여 공경들의 목숨을 지금까지 유예해 두고 있었다.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황상과 공경들을 다시 장안성으로 모시겠습니다.”
말을 끝낸 동백은 더 이상 담소를 이어 나갈 이유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섰다.
그에 상석에 앉은 유변이 몸을 일으켰다.
한 가지 의문을 품은 듯,
농서동씨 가문의 여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찌하여 그대는 역신의 길을 걷게 된 것인가.”
황제의 물음에 동백은 눈썹을 까딱 움직이면서 불쾌감을 드러냈다.
물론 속내는 짐작하고 있었으나,
설마 유약한 황제가 속내에 담아둔 말을 꺼낼 줄은 몰랐기에 당혹스러웠다.
“그대들은 황실과 조정을 능욕하고, 전횡과 폭정을 일삼을 뿐이거늘… 대체 그 끝에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혈육을 아끼고 백성들을 사랑할 뿐인 유변에게 있어 탐욕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동백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존재였다.
어째서 그토록 권력을 탐하는지,
어째서 그렇게 패권에 욕심을 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민들이 화목하게 평화를 누리는 태평성대가 도래하게 된다면 모두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폭정과 싸움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하는 그들의 행동에 유변은 원초적인 의문을 품게 되었다.
“황상께서는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존재할 뿐인 지옥을 경험한 적 있으십니까? 살기 위해 죽이고, 위에 올라서기 위해 빼앗아야 하는지옥을… 황궁에서 유복한 삶을 보내신 황상께서 겪으신 적 있으십니까.”
회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맹금처럼 두 눈을 날카롭게 뜨면서 황제를 노려보았다.
태평하게 의문이나 품는,
날카로운 창검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현장 속에서도 의문이나 제기하는 황제의 모습이 실로 안일해 보였다.
지옥을 겪은 적이 없기에… 유복한 삶을 보내며 살아왔기에 가능한 안일함이었다.
“저희 농서동씨 가문의 고향인 농서군은 하루가 멀다 하고 오랑캐들이 침략과 약탈을 벌이던 군현이었습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서량의 반란군들이 몰려오기도 했었습니다.”
뒤이어 동백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영원토록 이어질 것만 같은 살육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철이 들기 전부터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두 눈에 담아야 했습니다.”
군현을 쑥대밭으로 만든 오랑캐와 학살을 반복하던 반란군들. 책상머리들이 그토록 열변하던 인의와 성덕이 존재하지 않는 무법지대에서 살아왔다.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끔찍한 무간지옥 속에서 삶을 부르짖었다.
동백은 눈꺼풀을 슬며시 내리면서 서량에서 겪었던 참상들을 회상했다. 뇌리에 떠오른 기억들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오랑캐들이 약탈을 반복해도, 반란군들이 끊임없이 살육을 이어나가도… 고상하기 짝이 없으신 황실과 조정에서는 아무런 답도 없더군요. 당신들의 정치놀음에 서량은 관심 밖일 테니까요.”
약육강식의 무간지옥에서 가장 먼저 포기해야 했던 것은 ‘기대’였고, 그다음으로 ‘희망’을 버렸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버리게 되자,
마지막으로 독기만이 마음속에 남게 되었다.
기대와 희망을 버린 뒤, 할아버지 동탁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약육강식의 법칙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황상의 말씀대로 전횡을 벌였습니다. 지금까지 황실과 조정이 독점하던 부와 권력을 우리도 누려보고 싶었으니까요! 말씀대로 폭정도 벌였습니다. 지금까지 짓밟히기만 했으니, 우리도 한 번 짓밟아보고 싶었습니다!”
독기와 회한,
동백의 목소리에는 복잡한 격정이 담겨 있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황실과 조정으로 인해 탄생된 지옥에서 살아온 소녀는 누구보다도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탐욕의 화신이 되었다.
변방을 지키던 무인에서 전횡과 폭정을 일삼는 만고의 역신이 된 제 조부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