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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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司徒) 왕윤이 조정대신들과 함께 발걸음을 서둘렀다.
황제 폐하께서 장안을 탈출하셨다.
만승천자와 조정의 공경들이 역적의 무리를 피하여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는 유례없는 사태에 조정대신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부디 무사해야 할 터인데…!”
“일단 지금은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지 않소.”
분명 역적들에게 쫓기고 계실 터.
서량의 포악한 무리가 틀림없이 그 뒤를 쫓을 것이었다.
혹시라도 장안성을 탈출한 황제와 공경들로부터 비보가 전해질까, 왕윤과 조정대신들은 몹시 두려워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폐하께서… 역적의 무리를 피해 장안성을 탈출하셨단 말인가.”
황급히 달려온 조정대신들로부터 장안성에서 날아든 급보를 듣게 된 황녀가 작고 왜소한 몸을 바르르 떨면서 새하얗게 질린 표정을 지었다.
오라버니께서,
역적들에게 구금되었던 오라버니께서 공경들과 함께 장안성을 탈출했다.
창검으로 무장한 흉악한 병사들에게 쫓기는 오라비의 모습을 떠올린 유협은 고사리 같은 두 손을 애처롭게 떨면서 두려움을 느꼈다.
“들개 같은 역도들이 가만두지 않을 텐데….”
비록 유협은 어리지만 명석하고 영민했다.
그렇기에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역도들이 오라비를 순순히 놓아줄 리 없다는 것을.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오라비를 다시 붙잡아서 치욕을 가할 게 틀림없었다.
자신을 연주로 피신시킨 채 낙양에 홀로 남아 역적들에게 붙잡히게 된 착한 오라비의 모습을 떠올린 유협은 두 눈을 끔뻑끔뻑 뜨면서 슬픔을 발산했다.
“장안성을 빠져나왔다고 해도…, 동관이 막고 있지 않습니까?”
“동관을 피해 강을 건너야 할 겁니다. 무사히 강을 건널 수만 있다면 폐하께서 하동군(河東郡)에 입성할 수 있을 터인데.”
동관(潼關)은 관중(關中)과 관서(關西) 지역을 나누는 경계이며, 조조 군의 서진을 가로막기 위해 동탁 군의 주력군단들이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장안성을 탈출한 황제와 공경들이 동관을 뚫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동탁 군의 집요한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드넓게 펼쳐진 사예주의 강을 건너는 뿐이다.
“전하!”
조정대신들이 비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을 때,
상석에 앉은 황녀에게 시녀가 다가왔다.
작약꽃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낙양제일미였다. 갓 짜낸 우유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미녀가 다급히 유협에게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
“명공께서… 방금 출정하셨다고 하옵니다.”
“그, 그게 정말이냐?!”
“출정하시기 직전에 소녀에게 귀띔을 먼저 전하셨사옵니다. 무사히… 무사히 폐하와 공경들을 이곳 진류군으로 모시고 오겠다고 하였사옵니다.”
초선을 통해 이성휘가 전한 소식을 듣게 된 유협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두 눈을 끔뻑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는 게 분명했다.
오래전에 나눴던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리라.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번 출정한 이성휘의 모습에 유협은 눈물을 왈칵 쏟을 정도의 고마움을 느꼈다.
그 누구보다도 필사적으로 역적들에게 붙잡힌 오라비를 구하려는 이성휘의 헌신과 노력에 유협은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의 격정을 품게 되었다.
“분명 명공께서는… 황제 폐하와 함께 무사히 돌아오실 것이옵니다. 소녀는, 소녀는 믿사옵니다.”
초선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유협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유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는다.
나 또한 그를 믿는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던 나를 몇 번이고 구해주었던 영웅이라면 분명 약속을 지킬 것이었다.
“표기장군이 출정하였단 말인가….”
“일단 표기장군에게 명운을 맡겨보도록 하십니다.”
앞서 기병부대를 이끌고 출격했던 평동장군 조홍에 이어 표기장군 이성휘 또한 나섰다.
조조 군의 두 필두들이 나섰다.
분명 그들은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할 것이었다.
낙양에서 믿을 수 없는 완승을 거둔 이성휘의 무명을 떠올린 왕윤과 조정대신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는 듯한 염원을 담아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심려 마시옵소서. 명공께서는 분명 역적들을 모두 물리치고 황제 폐하를 구원하실 것이옵니다.”
“믿는다… 믿겠다…! 오라비를 반드시 구해 올 것이라고….”
어머니처럼 상냥한 초선의 위로에 유협은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그런데도 황녀는 간절한 염원을 보냈다.
분명해낼 것이라고…
틀림없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 * *
대장군부와 궁궐의 전각들을 불태우며 기염을 떨쳤던 반란군은 공세를 유지하지 못한 채 결국 진압되고 말았다.
반란 소식을 들은 미양(美陽)의 병력이 달려와 봉기를 일으켰던 하급무관들을 제압했다.
주모자였던 송과가 참살되었고,
또한 상층부에 앙심을 품고 창검을 빼 들었던 하급무관들 역시 전멸하고 말았다.
“대체 대관절 무슨 말이냐! 우리 백아가 황제를 데리고 도망치다니!”
조카 동황으로부터 믿기 어려운 소식을 듣게 된 동민이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공경들의 간사한 계획을 미리 간파하여 군세를 동원했던 동백이 장안성으로 귀환하기를 거부하고 풍익(馮翊)으로 향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동민은 주먹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침음을 흘렸다.
“이게 모두 숙부님들께서 가당찮을 정도의 총애를 거듭했던 결과입니다! 중영 숙부께서 돌아가신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 앙칼진 것이 권력을 탐한답니까!!”
자신을 제치고 권력의 옥좌에 오르려는 동백의 야욕에 동황이 이를 빠득 갈았다.
길들인 집고양이인 줄 알았더니,
설마 부와 권력을 탐하는 살쾡이였을 줄이야.
중앙군을 이끄는 서영과 고석을 거느린 채 위세를 떨치고 있던 동백이 시커먼 욕망을 품은 야심가였음을 알게 된 동황은 경각심을 느끼게 되었다.
“숙부님, 제게 장안성에 주둔하는 모든 병력들을 맡겨 주십시오! 제가 당장 풍익으로 달려가 황제를 데려오겠습니다!”
무력을 동원하여 황제를 끌고 오겠다는 동황의 말에 동민이 격노하여 소리쳤다.
“지금 우리 농서동씨 가문이 분열하여 반목하고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하겠다는 게냐!”
“수, 숙부님…!”
노여움에 물든 숙부의 모습에 기가 죽었는지 안하무인과 다름없는 동황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인자하던 숙부가,
이렇게까지 분개하며 소리칠 줄이야.
군권을 친히 맡길 정도로 자신을 총해했던 숙부가 설마 잘못을 꾸짖을 줄은 몰랐는지 당혹감에 찬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든 백아를 잘 타일러서 데려와야 한다! 절대로 우리 농서동씨 가문은 분열돼선 안 된다!”
황제가 탈출을 감행했다는 소식이,
농서동씨 가문이 분열되었다는 소식이 중원에 알려지게 된다면 필시 조조군이 군세를 움직일 터였다.
동민이 우려하는 바가 그것이었다.
분명 황후와 진류왕을 보필하는 조조 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황제를 빼앗으려 들 것이었기에 동민은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장군!”
동민이 우둔하기 짝이 없는 동황의 과격한 행동에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을 때,
무관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홍농군에 주둔하는 조조 군의 척후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동관에서 올라왔습니다! 분명 놈들이 사태를 눈치챈 게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놈들이… 벌써 알아차렸단 말이냐!”
조조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급보를 듣게 된 동민은 대경실색한 모습을 보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다.
풍익으로 향한 동백을 한시라도 빨리 장안으로 데려와야 했다.
“내가 직접 백아를 설득해야겠다! 만약 내 설득으로도 안 된다면… 어머니를 모실수밖에.”
“조, 조모님을 말씀입니까?!”
황제를 데리고 풍익으로 떠난 동백을 설득하기 위해 지양군(池陽君)에 책봉된 조모를 동원할 것이라는 동민의 말에 동황이 놀라 소리쳤다.
사태가 급박하다고는 하나,
이런 일에 아흔이 넘으신 조모님을 동원하다니.
동황은 제 분수를 모르는 야심으로 조모와 숙부를 번거롭게 만들고, 또한 농서동씨 가문의 명성에 먹칠하는 동백에게 강한 멸시를 보냈다.
“어찌 아흔이 넘으신 조모님의 힘을 빌린단 말씀입니까! 숙부님, 제게 군사를 맡겨 주십시오! 그러면 백아도 제 잘못을 깨닫고서 순순히 백기를 들 겁니다!”
“철따구니 없는 소리 마라! 이 일에 절대로 군세를 동원해선 안 된다!”
이번 일에 기필코 군세를 동원하려는 동황의 완고한 주장에 동민이 두 눈을 날카롭게 뜨며 반대했다.
물리적 충돌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동관 너머에 있는 조조군이 감히 이번 사태에 개입할 수 없도록 더욱 신중해야 행동해야 했다.
“내가 직접 백아를 설득할 터이니, 너는 이각과 곽사와 함께 장안을 지키고 있거라.”
갑주를 걸친 동민은 동황에게 장안성의 수비를 명령하고는 보고를 전한 무관과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대장군!”
“또 무슨 일이냐!”
뒤이어 또 다른 무관이 도착했다.
방금 집무실에 도착했던 무관이 동관 전선에서 온 전령이었다면, 다급함에 찬 모습으로 달려온 다음 무관은 장안성을 수비하던 북군(北軍)의 교위였다.
“장안성의 민심이 심상치 않습니다! 황제가 달아났다는 소식이 민서에 널리 퍼졌는지… 모두 장안성을 버리고 떠나겠다며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가당찮은 말이냐!”
장안성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동탁 군의 가혹한 전횡과 폭정에 숨을 헐떡이며 삶을 연명해나가던 민중들은 황제가 장안성을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들도 그 뒤를 따르겠다며 구름처럼 모여 들기 시작했다.
그 수는 수천 명에 불과했으나,
이대로 계속 좌시한다면 장안성을 떠나겠다는 규모가 수십만 명을 헤아리게 될 게 분명했다.
결코 혼란을 좌시할 수 없었던 동민은 당장 민중들을 강경하게 진압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