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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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대전이 종결된 뒤,
장안성은 굶주림과 가난으로 허덕이게 되었다.
동탁 군이 사예주 정벌을 위해 민가의 곡량들을 대거 징발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곡물 가격은 폭등했고,
장안 백성들은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굶주린 배를 채우고자 가족과 이웃들을 잡아먹는 잔혹한 식인(食人)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나라꼴이 엉망이오! 백성들의 시체가 길거리에 가득하지 않소!”
장안 조정의 조정대신들을 아우르는 위치에 있었던 대홍려(大鴻臚) 주환이 더 이상 참상을 묵과할 수 없었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소리쳤다.
백성들이 굶어 죽고 있다.
굶주린 백성들은 구휼조차 받지 못한 채 죽어 가고 있었다.
황실과 조정은 얼마 안 남은 가산까지 모두 팔아치워 구휼미를 마련했으나, 표기장군(驃騎將軍) 동황의 총애를 받는 이각과 곽사가 도중에 구휼미를 가로채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런 죽일 놈들!”
“동탁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로 덜하지는 않을 겁니다!”
성문교위(城門校尉) 최열과 월기교위(越騎校尉) 왕기가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백성들이 굶어 죽고 있건만,
동탁의 주구들은 가렴주구를 일삼으며 향락을 즐기고 있었다.
이를 본 한나라의 충신들은 ‘장안 탈출’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장안 탈출은 시일을 빨리 서둘러야 한다는 풍익태수 송익의 건의가 받아들여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풍익태수 송익과 부풍태수 왕굉의 군사들에게 지원을 받는다면 능히 가능합니다. 저와 월기교위 휘하의 병력들을 동원하여 황제 폐하의 마차를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문교위 최열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조정대신들은 지옥도(地獄道)나 다름없는 장안성을 빨리 탈출해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조정대신들은 주구 노릇을 하는 이각과 곽사를 특히 두려워했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장안성에서 탈출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농서동씨 놈들의 경계가 만만치 않지 않습니까? 몰래 군대를 움직이려 했다간 십중팔구 놈들에게 발각될 겁니다.”
“우리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황제 폐하께서 위험에 처하게 두실 순 없소이다.”
우려를 표하는 관료들의 말에 최열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 장안성에 있어도 죽습니다! 놈들의 잔악무도한 짓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필시 저 간악하고 무례한 서량 놈들은 황상 폐하를 시해하려 들 게 틀림없습니다!”
동탁 군 장수들의 포악과 폭정은 날이 갈수록 그 잔인성을 더해 가고 있었다.
환관을 망설임 없이 베었으며,
무관들이 궁궐에서 궁녀를 간살하기에 이르렀다.
머지 않아 황후에 책봉될 위양군(渭陽君) 동백이 황제의 혈육을 회임하게 된다면 분명 그들의 잔인무도함은 더욱 극심해지게 되리라.
그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조정대신들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마등과 한수의 포섭은 어찌 되었소?”
“예, 그들은 장안성 밖에서 기마부대를 이끌고 호응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고릉(固陵)에 병력을 매복해 두겠다고 합니다.”
마등과 한수는 동탁으로부터 정서장군(征西將軍), 진서장군(鎭西將軍)의 벼슬을 받은 서량의 군벌들이다.
그들은 서량의 주구였으며,
동탁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서량의 역적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황제와 함께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장안성에서 무사히 탈출해야 했던 조정대신들은 서량의 역적과 손을 잡는 치욕을 감수하면서 마등과 한수를 휘하로 포섭하기에 이르렀다.
“고릉, 고릉이라….”
“장안성을 무사히 탈출하여 위남(渭南)에 도착하면 고릉에 매복하는 마등과 한수가 합세하여 황제 폐하를 엄호할 겁니다.”
계획은 순차적으로 잘 진행되는 듯했다.
시일을 너무 성급하게 서두르는 것 같아 우려스러웠지만 말이다.
장안을 탈출해야 한다.
삼보 지역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사예주에 있는 조조군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동탁 군의 잔당이 장안에서 범하는 전횡과 폭정에 지친 조정대신들은 머리를 맞댄 채 탈출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 * *
전횡과 폭정을 벌어지고 있는 장안성에서 탈출하기 위해 조정대신들이 모의하고 있었을 때,
표기장군 동황은 주지육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각종 진귀한 술과 기름진 고기들,
황제의 수발을 드는 궁녀들을 모두 처첩으로 삼으며 제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 집중했다.
“이 동황이 한나라의 표기장군이거늘 또 누가 표기장군이란 말이냐!!”
두강주를 꿀꺽꿀꺽 들이켜던 동황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술잔을 바닥에 힘껏 내던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술잔이 박살 났다.
벼락이 떨어진 듯한 굉음이 주연의 흥을 돋우던 악공들이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항상 동황은 제 기분이 나빠질 때마다 매번 포악한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그를 두려워했다.
“숙부님께서 돌아가신 것도… 이 궁핍하기 짝이 없는 장안성에 다시 처박히게 된 것도 모두 그놈 때문이다! 모두 그 씹어죽일 놈 때문이란 말이다!!”
조조 군의 보호를 받는 황후 당씨와 조정대신들은 이성휘를 낙양대전의 영웅으로 치켜세웠음은 물론, 그를 한나라의 표기장군에 임명했다.
동황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출신과 가문도 모를 잡놈을,
어떻게 표기장군에 임명할 수 있단 말인가?
농서동씨 가문의 적손임을 내세운 동황은 숙부였던 동탁을 도와 패업에 가세했던 자신이야말로 한나라의 표기장군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황후와 조정대신들의 환대받으면서 표기장군이 된 이성휘를 ‘가짜’라고 부르면서 욕지거리를 했다.
“그렇습니다, 표기장군 어르신!”
“어느 누가 감히 표기장군의 정통성에 의심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표기장군께서는 황제에게 직접 벼슬을 하사받은 분입니다!”
동황과 함께 동석하고 있던 이각과 곽사가 혀를 나불대면서 아부를 떨어댔다.
낙양대전에서 살아남은 뒤,
동황을 의지하여 그의 심복이 된 이각과 곽사는 주구 노릇하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농서동씨 가문의 명령을 빙자하여 백성들로부터 빼앗은 재물을 가로챈 이각과 곽사는 제 주머니를 채우는 데만 혈안이 된 상태였다.
“내 어찌 그를 모르겠나. 중원 놈들이 스스로 왕후장상(王侯將相)을 자청하면서 오만과 위선을 떨어대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황실과 조정에 상주하여 관직을 받는 군벌들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군벌들은 스스로 벼슬을 자청하면서 세력권을 확보했다.
기주의 원소가 그러했으며,
또한 유주의 공손찬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황후와 진류왕의 이름을 동원하여 부하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있는 조조 또한 황제를 옹립하는 동탁 군이 보기에는 뻔뻔하게 명분과 정통성을 주장하는 도적에 지나지 않았다.
“중원 놈들이 뭘 저지르든 간에… 나는 절대로 군세를 일으키지 않을 걸세! 중원의 잔적들이 서로 물어뜯건 말건, 우리 농서동씨 가문은 장안성에서 천손만대에 걸쳐 부귀영화를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을!”
동황은 숙부 동탁이 계획했던 사예주 정벌을 매우 비관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굳이 중원의 패권을 거머쥘 필요가 있는가?
이미 천하의 서쪽을 거머쥐었거늘,
혈겁과 시산혈해가 벌어지고 있는 중원에 눈을 돌릴 이유가 없었다.
“숙부님도 참 미련하셨지….”
천하를 향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숙부를 떠올린 동황은 씁쓸함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숙부는 천하의 영웅이었으나,
결국 그 야욕 때문에 명줄을 앞당기고 말았다.
서량의 호걸이라 불리었던 숙부가 12만에 육박하는 대군을 동원하고도 사예주 정벌에 실패했다. 그에 동황은 숙부가 못한 일을 자신이 어떻게 해내겠냐며 중원을 향한 관심을 아예 끊어 버렸다.
“뭣들 하느냐! 어서 표기장군 어르신에게 새 술잔을 가져다드려라!”
이각이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로 동황에게 새 술잔을 진상했다.
뒤이어 악공들이 연주를 이어 나갔고,
동황은 좌우에 앉은 이각과 곽사에게 간사하기 짝이 없는 아부를 들으면서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 * *
동황이 아부꾼들의 사탕발림에 빠져 주지육림을 이어 나가고 있었을 때,
위양군 동백은 은밀히 군대를 움직였다.
황제와 조정대신들이 도망치려 한다.
조정에 심어둔 세작들을 통해 정보를 입수한 동백은 서영과 고석의 도움을 받아 중앙군을 동원했다.
“정서장군 마등과 진서장군 한수의 군세가 고릉에 주둔할 것입니다.”
“책상물림에 불과한 조정대신들은 분명 마등과 한수가 자신들을 도와줄 것이라도 철석처럼 믿고 있을 거예요.”
멍청한 작가들 같으니라고.
회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늘어뜨린 소녀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조정대신들을 비웃었다.
이미 예상하였다.
군권을 모두 빼앗긴 채 가택에 감금된 상태나 다름없는 조정대신들이 마등과 한수를 의지하리라는 것은 너무도 뻔한 경우였다.
“황제와 조정대신들이 감히 도망치지 못하도록 성문들을 모두 봉쇄하겠습니다.”
“아뇨, 그냥 두세요.”
“…예?”
동백의 대답에 서영이 놀라 되물었다.
그냥 방치하라니.
성문들을 모두 봉쇄하면 쉽게 제압할 수 있거늘.
황제와 조정대신들이 장안성을 탈출하도록 방치하라는 동백의 말에 서영은 물론, 옆에서 경청하고 있던 고석 또한 놀란 표정으로 동백을 바라보았다.
“황제와 조정대신들이 위남에 이르렀을 때 모두 생포하세요.”
“송구하나… 그 연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표기장군이랍시고 거들먹대는 숙부를 치기 위함입니다.”
숙부.
동황을 뜻하는 것이리라.
대장군(大將軍) 동민에게 군권을 위임받게 된 표기장군 동황.
동백은 동황을 먼저 꺾어 버리려 했다.
“숙부는 세력을 이끌 재목이 못 됩니다.”
주지육림과 비겁한 간신들의 사탕발림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내는 작자가 어떻게 세력을 이끌겠는가.
중원의 원수들이 발호하고 있거늘,
술과 계집에 빠져 야망과 복수를 망각한 동황은 동백에게 있어 한낱 걸림돌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