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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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 군의 사예주 침공을 저지해낸 조조 군은 연주와 예주를 중심으로 형성한 세력권을 점점 넓히기 시작했다.
하내군(河內郡)을 복속 시킨 뒤,
동탁 군이 점령 하에 두었던 하동군(河東郡)과 홍농군(洪農郡)으로 세력권을 더욱 확대했다.
반면 조조군과의 싸움에서 완패한 동탁 군은 전투에서 패배했음을 시인하듯 사예주를 침공했던 모든 병력들을 다시 장안성으로 철수시켰다.
“명부, 중원제일 검에게 숙부를 잃은 장수가 살아남은 장졸들을 이끌고 남양군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남양군…? 남양군은 원공로의 영토일 텐데.”
교위 장수.
그 이름을 몇 번 들어 본 기억은 있지만 딱히 위협거리라고는 생각지 않은 인물이다.
동탁을 따른 똘마니에 불과한 놈이 어디로 도망치건 간에 딱히 상관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장수가 병력을 이끌고 원술군의 중심지인 남양군을 도망쳤다는 말에 잠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낙양대전에서 완패한 동탁 군의 주구가 남양군으로 도망쳤다는 말이 석연찮게 들렸기 때문이다.
“원술은 아군과 동탁 군이 교전을 치르는 틈을 노려 구강군(九江郡)으로 세력권을 옮겼다고 합니다.”
“구강군이라면….”
크게 펼쳐진 지도를 바라보고 있던 조조의 눈길이 동남쪽을 향했다.
구강군.
아홉 개의 강들이 크게 뻗은 지역이라고 하여 구강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원술이 새로운 세력권으로 삼았다는 구강군은 중원과 남방을 연결하는 요충지로, 강동(江東)을 비롯하여 남쪽 군현들로 쉽게 진출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을 가진 지역이었다.
“남방을 도모할 속셈이군. 중원을 도모하겠다는 목적을 포기한 건가? 원공로, 제 분수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더냐.”
조조는 동탁 군의 잔당들이 남양군으로 도주했다는 사실보다도 원술이 구강군으로 세력을 옮겼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여남원씨 가문의 빌어먹을 적손.
환관의 더러운 핏줄이라며 자신을 멸시했던 원술에게 깊은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조는 기필코 그 오만한 공자의 높은 자존심을 짓밟아버리겠다며 이를 빠득 갈았다.
“남양군으로 달아난 동탁 군의 잔당들은 아마도 형주자사 유표를 의지할 듯 보입니다.”
진궁은 장수가 유표를 의지하여 세력을 형성할 것을 정확히 예견했다.
원술에게 살해당한 왕예를 대신하여 형주자사에 임명된 유표는 의심이 많고 결단력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진궁은 유표가 사예주로 진출한 아군을 두려워하여 남양군에 당도한 장수를 중원 세력을 막는 번병(藩屛)으로 삼을 것이 분명하다며 말을 덧붙였다.
“원소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순우경과 의논하여 동평국을 받는 대가로 흑산적을 치기로 했다.”
“잘하셨습니다. 동평국을 받게 된다면 연주에 깊숙이 뿌리내린 친(親) 원소 여론을 일소할 수 있을 겁니다.”
연주의 사대부와 호족들 중에 여남원씨 가문의 거두인 원소를 흠모하는 자들이 많았다.
원로(元老) 변양을 위시한 호족들,
조조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대하는 사대부와 호족들이 원소군과 내통하고 있었다.
훗날 원소군과 천하의 패권을 두고 전쟁을 치르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들은 연주 내부에서 옹호할 게 분명했다.
“명부, 연주성으로 돌아가면 제가 그들을 재차 설득하도록 하겠습니다.”
변양과 그를 따르는 호족들을 조조가 번번이 눈엣가시로 여겨 온 것을 진궁 또한 알고 있었기에, 진궁은 자신이 다시 한번 그들을 설득하겠노라고 조조에게 부탁했다.
그에 조조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거칠게 두드리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까지 그들의 행태를 좌시한 채 두고 보라는 말인가, 군사? 그대는 할 만큼 했네. 회유를 무시한 것은 그쪽이지.”
“하지만 명부… 변양과 그를 따르는 호족들은 여러 대에 걸쳐 연주를 다스려온 토착세력입니다. 만약 그들을 엄히 다스린다면… 분명 큰 반발이 뒤따르게 될 겁니다.”
“감내하겠다.”
“명부!”
언젠가 다가오게 될 거대한 전쟁을 위해 연주의 불만 세력들을 모두 숙청해야 한다.
숙청을 감행할 것 같은 조조의 모습에 진궁은 강한 우려를 드러냈다.
“나는 그들에게 두 번이나 기회를 주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본초를 선택했지. 군사, 내가 대체 얼마나 더 그들을 포용해야 한단 말인가?”
“…잠시만, 그럼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제가 기필코 호족들을 설득하겠습니다.”
숙청을 결단하려는 조조에게 진궁은 마지막 기회를 간청했다.
* * *
눈치가 빠르고 영리한 성격의 조홍이었다면 흉터를 이용하여 이성휘의 마음을 붙들어 맸을 것이다.
그러나 조인은 그러지 않았다.
유리한 편법을 선택하기엔 조인은 너무도 강직하고 성실한 성격이었다.
죄책감에 빠진 이성휘의 마음을 이용한다면 단번에 관계를 좁힐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조인은 그러지 않았다.
이성휘에게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우… 그래도 어림총사의 마음을 끌 좋은 기회였을 텐데…. 아니, 어림총사의 죄책감을 악용하는 그런 약삭빠른 편법은 자렴에게나 어울릴 교활함이다! 설령 어림총사께서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림총사에게 심려를 끼치게 할 순 없다!’
일말의 아쉬움을 느꼈는지 흑발의 여인은 침울함에 빠진 모습을 보이면서도 고개를 홱홱 돌리면서 미련을 애써 털어냈다.
설령 평생 이어지지 않더라도,
남몰래 연모하는 사내의 마음을 이용하는 그런 사도(邪道)는 행할 수 없다.
나는 진심으로 그를 연모하고 있었으니까.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장졸들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명령한 뒤,
온몸으로 차가운 한기를 발산하면서 번뇌를 이어 나가던 흑발의 여인에게 갈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빙그레 웃으면서 한 걸음 다가왔다.
전(前) 황문시랑(黃門侍郞)이었으며,
현재 이성휘의 휘하에서 군사를 역임하는 순유였다.
영천순씨 가문의 여식은 흥미로운 낌새라도 느꼈는지 호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조인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조인은 순유의 물음에 고개를 내저으면서 철저하게 본심을 숨겼다.
“혹시 어림총사를 향한 연심이라든지…?”
“…….”
영원토록 한기를 머금고 있는 만년설처럼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던 조인의 얼굴에 변화가 감지되었다.
아주 잠깐,
잠깐이나마 흉터가 내려앉은 뺨이 흔들렸다.
그것을 놓칠 순유가 아니었다.
빠른 눈썰미로 조인의 내심을 눈치챈 순유는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악동처럼 입가에 환희를 머금었다.
“어림총사는 출중한 용모와 능력을 겸비하신 분이시고, 게다가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까지도 두루 갖추신 분이니까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순유는 언질이라도 받아 낸 것처럼 확신에 찬 목소리로 조인에게 말했다.
두 눈을 빛내면서 기뻐하는 순유의 모습에 조인은 어떻게든 항변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달변가에 가까운 재치와 말재주를 자랑하는 순유를, 안타까울 정도로 언변이 부족한 조인이 설득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언제부터 어림총사를 마음에 두게 된 건가요, 혹시 처음 봤을 때부터?”
“…….”
순유의 물음에 조인은 무표정을 고수하면서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청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만큼은 진정시킬 수가 없었는지 좌우로 빠르게 떨리고 있었다.
이성휘를 측근에서 보필하는 순유에게 본심을 들키게 된 것을 낭패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 아마… 숭산에서부터… 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낙양에서도….”
계속해서 묵비권을 행사하던 조인은 순유의 끈질긴 물음에 결국 본심을 털어놓게 되었다.
‘어림총사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두 번 다시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사내에게 반했던 순간은 분명,
언니의 명을 완수하기 위해 숭산에서 혈투를 벌였던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보았을 때였다.
수만 명에 달하는 적군들을 상대로 거침없이 활약하던 이성휘의 모습은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충장(忠將)들과 같았다.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모든 장수들의 우상과도 같은 그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언니에게 일편단심으로 사랑과 충성을 맹세하는 그의 모습에 다시 한번 반하게 되었다.
“그렇군요!”
순유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손뼉을 쳤다.
혹시 지나가는 사람이 듣기라도 할까,
순유의 손뼉에 놀란 조인은 고개를 빠르게 홱홱 돌리면서 주변을 확인했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장에라도 넘어갈 것처럼 숨을 헉헉 토해내면서 연병장을 달리고 있는 휘하 병사들의 모습만 저 멀리서 보일 뿐이다.
“제가 듣기로는… 사공 어르신뿐만 아니라, 평동장군께서도 어림총사를 마음에 두고 계신 듯한데.”
순유가 조인에게 슬며시 눈치를 보내면서 중얼거렸다.
의중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언니는 어림총사와 장래를 약속했다.
게다가 자렴은 언니의 허락을 받아 어림총사의 첩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경애하는 언니와
어릴 때부터 악우처럼 지낸 종제.
항상 함께 해온 사촌들이 한 사내를 진심으로 연모하고 있었다. 그 사내는 자신이 계속 짝사랑해온 상대였다.
‘역시 조조 군에 임관하기 잘했네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폭포처럼 흥밋거리들이 줄줄 나오다니!’
패국조씨 가문의 여식들이 모두 한 사내를 진심으로 연모하고 있었다.
실로 흥미롭지 않은가.
천하에서 손꼽히는 개국공신 가문의 재녀들이 모두 한 사람을 연모하고 있다니!
분명 질투와 시기로 범벅된 치정싸움이 격렬하게 벌어질 게 틀림없었다.
주군이 올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충성과 신의를 담아 봉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7촌 고모와는 달리, 순유는 본인의 흥미와 관심거리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여인이었기에 조인의 내심을 알아차리고는 그녀에게 흥미에서 유발된 응원을 보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도와 드릴 테니까요! 저한테 맡겨 주시면 최선을 다해 보필해드리겠습니다!”
순유는 속마음을 밝히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는 그녀를 위해 기꺼이 나서기로 했다.
물론 본인의 흥미 때문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