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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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양 지역을 통과한 조조 군은 마침내 폐허로 변해 버린 낙양에 도달하게 되었다.
시커먼 잔해 들만 남은 수도.
번영과 영광의 몰락을 상징하는 폐허가 펼쳐졌다.
수개월 만에 낙양으로 돌아오게 된 조조 군은 그 당시의 참상을 떠올리면서 동탁 군을 향한 증오와 원망을 키워나갔다.
“홍농군과 하동군을 제압한 동탁 군이 대양(大陽)을 돌파하여 기관(驥關)에 도달했습니다.”
기관은 낙양, 하내군과 마주 보는 곳에 있는 관문이었다.
동탁 군이 기관에 도달했다는 말은 곧,
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그들이 언제든지 재차 낙양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강행군을 거친 끝에 동탁 군보다 먼저 낙양에 도달하게 된 조조 군은 넓게 전선을 형성하면서 하내군을 방어했다. 그를 예상한 듯 동탁 군은 기관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
이성휘는 참모들과 더불어 동탁 군의 공세를 저지할 방책을 논의했다.
그 모습을 흑발의 여인이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주시하기만 할 뿐.
얼음장처럼 차가운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기에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 복잡함에 물든 심정을 떠안고 있는 듯했다.
“자효 님.”
“…예.”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순유에게 하내군으로 가 사대부와 호족들로부터 지원을 이끌어 줄 것을 부탁한 이성휘는 고개를 돌려 조인에게 물었다.
계속 뒤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이성휘는 무거운 침묵을 두르고 있던 부관에게 용무를 물었다.
그에,
조인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차가운 한기가 돌 것 같은 새하얀 뺨에 불그스름한 색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 반응은 너무도 작고 옅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녀의 심정을 알 수 없었다.
“…….”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할 수 없었다.
겁에 질린 것처럼 입술을 우물우물 달싹이면서 긴장감에 찬 한숨을 흘릴 뿐이었다.
혹시라도 긁어 부스럼일까 봐,
분수 모르는 행동으로 상하관계가 무너지게 될 것만 같았기에 책임감이 강한 조인은 선을 넘으려 하지 않았다.
“자렴 님께서는 서황과 함께 척후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동탁 군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파악해주셔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이성휘의 명령에 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떨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명령을 받게 된 조인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제 마음을 억누른 채, 일군을 이끄는 장수로서 본분과 책무에 집중했다.
* * *
동탁 군의 재림은 사예주 백성들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았다.
놈들이 다시 돌아왔다.
철저히 망가뜨리고 떠난 사예주를 다시 황폐화시키려고 온 게 분명했다.
홍농군과 하동군에서 대규모 살육과 약탈이 벌어졌다는 소문을 듣게 된 하내군 백성들은 동탁 군을 척결하기 위해 군세를 몰고 온 중원제일 검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게 되었다.
“동탁 군의 공세가 시작되면 백성들이 크게 동요할 것입니다. 부디 어르신께서 하내군 호족들과 함께 백성들을 위무하여 주세요.”
“알겠네, 그리하도록 하지.”
이성휘의 명령받고 하내군에 온 순유는 하내군의 유력인사였던 사마방을 예방했다.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온현(溫縣)에 위치한 사마씨 가문의 가택에는 하내군을 대표하는 사대부와 호족들이 모여 있었다.
그 덕분에 사절의 자격으로 하내군에 온 순유는 수월하게 입장을 전달했다.
“무명 높은 중원제일 검이라면 능히 동탁 군을 사예주에서 몰아낼 것이라고 믿네.”
상석에 앉은 중년남성이 늘어뜨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이성휘에게 강한 믿음을 보였다.
그라면 분명해낼 것이다.
지난 전쟁에서 큰 활약들을 세우지 않았던가.
낙양령(洛陽令)과 경조윤(京兆尹)을 역임한 바 있는 고관대작 출신의 사마방은 사예주를 수호하려는 중원제일 검을 위해 무엇이든 협조하겠노라고 호족들과 함께 입장을 밝혔다.
“그대들이 서둘러 사예주로 오지 않았다면 필시 동탁 군은 홍농군과 하동군에 이어, 이곳 하내군까지 집어삼켰을 걸세. 위험을 미리 깨닫고 와주어 고맙네.”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르신.”
하내군을 대표하는 전(前) 조정대신이 고개를 숙이면서 예를 취했다. 그에 순유 또한 예를 취했다.
“여기 사대부들과 십시일반하여 물자를 마련해 보겠네. 우리 하내군을 위해 참전해주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하내군이 동탁 군의 손아귀에 넘어가면 모든 게 끝장이다.
낙양을 흔적도 없이 폐허로 만들어 버린 것처럼 하내군 또한 쑥대밭이 될 게 분명했다.
동탁 군의 침략으로 아비규환이 된 홍농군과 하동군의 소식을 들은 하내군 호족들은 이 전쟁에 자신들의 명운이 걸렸음을 깨닫고는 망설임 없이 조조 군의 편에 섰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말하게.”
“감읍한 말씀입니다, 어르신.”
동탁 군의 준동은 조조 군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로 작용하게 되었다.
관동 제후들에게 우호적이었으나 어느 세력에도 전향하지 않은 채 중립을 유지하던 하내군이 이번 동란으로 인해 조조 군의 군문에 들어왔다.
완전히 전향한 것은 아니나,
사예주를 침공한 동탁 군을 모두 몰아낸다면 하내군은 조조 군의 세력권에 자연스럽게 편입될 터였다.
“아버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순유가 사마방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을 때,
젊은 남성이 사마방에게 다가왔다.
사마방의 장남,
사마랑이었다.
백면서생처럼 생긴 사마랑은 창고에 저장된 곡식들을 모두 수레에 실었다고 보고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가산을 털어 군량을 마련해준 사마씨 가문에게 순유가 예를 취하며 감사를 전했다.
그에 사마방이 허허 웃음을 지었다.
“그럼 언젠가 이 노구의 부탁을 들어 주게나.”
“중달 말입니까?”
“지금은 비록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있으나, 조정에 임관하게 된다면 재능과 자질을 한껏 개화할 수 있지 않겠느냐.”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아버지 사마방의 말에 사마랑이 씁쓸함에 찬 웃음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사마씨 부자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순유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 * *
사예주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폭풍전야(暴風前夜),
거센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불쾌한 고요함이 전운을 자극했다.
철천지원수였던 조조군과 동탁 군이 사예주의 패권을 두고 군세를 일으켰다. 필시 사예주가 시산혈해로 뒤덮이게 될 게 분명했다.
사대부와 호족들 중 어느 누구도 이 전쟁에 흐지부지하게 끝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하지 않았다. 절대로 평화롭게 끝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격하라!”
“역적들을 쳐라!”
전선에 투입된 척후병들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비록 소규모 교전이었으나,
철천지원수였던 조조군과 동탁 군은 서로를 발견하자마자 창검을 휘두르면서 살벌한 싸움을 벌였다.
두 세력들 중 하나가 멸망해야만 끝나게 될 적대관계였다.
만약 조조군과 동탁 군,
두 세력들이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면 지난 전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참상이 펼쳐지게 될 것이었다.
“크학!”
“온몸에 철판을 두른 저 괴물은 뭐냐!”
무거운 갑옷을 걸친 조조군 장수가 날 선 도끼를 휘두르면서 동탁 군의 척후병들을 때려눕혔다.
도끼로 머리를 쪼개버렸으며,
과격한 육탄공격으로 적진을 단번에 와해시켰다.
“그때 그 백파적이다! 감히 상부 어르신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도망친 잡놈들!”
척후병들 중에 서황을 알아본 자가 있었는지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백파적의 잔당.
암살에 실패한 뒤 달아났던 패잔병.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으나 백파적의 잔당이 조조 군에 편입되어 있었다. 두터운 갑옷을 걸친 장수가 도끼를 휘두르면서 도륙할 때마다 동탁 군 척후병들은 뒷걸음질 치기 바빴다.
“…네놈, 들을… 황천, 에… 묻어 주겠다…!!”
동탁 군의 손에 주군을 잃은 서황은 살의를 번뜩이면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주군을 잃은 원한과 증오,
적들이 손에 잔인하게 살해당한 주군의 모습을 떠올린 서황은 거친 호흡을 토해내면서 원수들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퇴각하라!”
“으, 으아아아!!”
20여 명이 넘는 인원을 잃은 척후병들이 결국 전의를 상실한 채 도망쳤다.
서황은 두 손으로 도끼를 치켜든 채 그들을 추격하려 하였으나, 절대로 동탁 군의 유인에 말려들어선 안 된다는 가후의 말을 떠올리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교위!”
피칠갑한 갑옷차림의 여성이 분기에 찬 한숨을 토해내면서 도끼를 늘어뜨리고 있었을 때,
부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서쪽에서 대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흙먼지가 크게 일면서 기마군단을 선봉으로 한 대군이 몰려오고 있었다.
동탁이 직접 이끄는 본대였다.
서영, 장제를 좌우에 거느린 채 대군을 이끌고 사예주에 들어온 것이다.
최전선에서 척후를 담당하던 부하로부터 다급한 소식을 듣게 된 서황은 곧바로 몸을 돌리면서 본진으로 향하기 위해 말에 올랐다.
“동탁이 직접 움직였다!”
“그 빌어먹을 역적이… 무슨 낯짝으로 사예주에 쳐들어왔단 말인가!”
서황의 휘하였던 백파적 출신의 장졸들이 대경실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이건 전면전이다.
사예주의 패권을 건 전쟁이 벌어지려 하는 것이었다.
손녀 동백이 이끄는 5만의 군세는 선봉 역할을 하는 군단이었을 뿐, 서량 기마군단을 포함한 정예군단을 이끄는 총대장은 상국(相國) 동탁이었다.
‘동탁이 직접 동관을 넘다니!’
천하를 향한 관심을 일절 끊은 채 장안성에 틀어박혀 폭정과 전횡을 저지르고 있어야 할 동탁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사예주로 들어왔다.
말에 거침없이 박차를 가하면서 속도를 높이던 서황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천하를 먹어치웠던 괴물이 온다.
태후와 대장군부를 동시에 무너뜨리고 중앙 권력과 중앙군을 모두 점거했던 서량의 이리가 다시 천하를 넘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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