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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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온 사실을 고백한 이후,
이성휘는 주군 달래기에 전력을 집중했다.
조조는 냉철한 이성과 판단력을 겸비한 여걸이었지만, 서주 침공에서 알 수 있듯이 뜻밖에 감정에 자주 휩쓸리는 성격이었다.
이대로 계속 둔감한 모습을 일관한다면 필시 큰 불화로 다가오게 될 터. 도매금처럼 내걸리게 된 조홍을 구명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조조의 불편한 심기를 가라앉혀야만 했다.
“물은 어떻습니까?”
대야에 물을 받은 뒤,
흑발의 여인이 뻗은 새하얀 발을 손수 씻겨 주던 사내가 물었다.
어떻게든 불편한 심기를 진정시켜야 한다.
그래서 이성휘가 꺼내 든 첫 번째 방법이 족욕이었다.
“흥…. 내가 이까짓 것으로 귀관을 용서할 성싶은가? 나는 쉽게 용서를 해 줄 정도로 값싼 여자가 아니네. 괜한 기대는 말도록.”
“용서를 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아만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입니다.”
대야에 담은 물이 찰박찰박 흐르고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의자에 앉은 흑발의 여인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정성스럽게 자기 발을 씻겨 주는 사내를 보며 새하얀 얼굴을 붉혔다.
계속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업무에 지친 발바닥을 꾹꾹 누르면서 피로를 달래주는 예비 남편의 호의에 가슴이 두근두근 떨렸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마음에 조조는 ‘반나절도 못 버티고 사촌 동생과 바람을 핀 사내에게 다시 마음을 빼앗기다니! 한심하군!’이라고 자신을 향해 소리쳤지만, 요동치는 마음은 계속해서 이성휘를 갈구하고 있었다.
“자렴에게도 이리 해줬겠지.”
“맹세컨대 아닙니다.”
“흥.”
이성휘의 대답에 조조는 쑥스러운 마음을 억누르면서 콧방귀를 꼈다.
겨우 이 정도로 용서할 줄 알고?
내 마음을 돌리려고 용을 쓰는 모양이다만 이 정도로 화를 풀 정도로 이 조맹덕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앞으로의 상하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본때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조조는 끝까지 심드렁한 표정을 유지하기로 했다.
“귀, 귀관은… 대체 자렴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가?”
조조의 질문에 이성휘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어깨를 움찔 떨었다.
매우 난감한,
그리고 위험한 질문이었다.
각종 살벌한 함정들이 잔뜩 도사리고 있는 질문이라고 할까. 정답을 말하지 못하면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리라.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두 손으로 붙잡고 있던 새하얀 발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만을 닮은 머리카락과 눈동자에 그만 제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자렴은 아만과 많이 닮았으니까요.”
“단순히 나와 닮았기 때문이란 말인가?”
섣불리 조홍의 아름다운 용모를 칭찬한다면 그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터.
중원제일 검은 생애 다시없을 최악의 함정을 유연하게 회피하면서 고비를 넘겼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렇다면 귀관은 자효에게도 마수를 뻗겠군. 자효도 나와 많이 닮았으니.”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예비 남편의 감언이설에 완전히 넘어간 흑발의 여인은 쑥스러움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샐쭉한 반응을 보였다.
위기 회피를 위한 아부였지만,
그 아부가 썩 듣기 나쁘지 않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자기 새하얀 발을 면포로 꼼꼼하게 닦아주는 이성휘의 모습을 힐끗 쳐다본 조조는 심드렁한 표정을 일관하면서도 남몰래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만.”
이성휘가 조조의 새하얀 발을 두 팔로 들어 올리면서 발등 위에 입맞춤했다.
정중한 사과의 표현이었으며,
또한 그녀를 향한 충성과 복종의 의미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부위에 입맞춤을 당하게 된 조조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면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연모하는 부관이 이렇게까지 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죄송합니다.”
“…읏.”
숙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연 이성휘의 사과에 조조의 마음속에는 당장에라도 그 사과받아들이고 싶다는 충동이 무럭무럭 자라게 되었다.
그가 바람을 핀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있으니까 한 번 정도는 용서해 줘도 되지 않을까?
일편단심으로 자신만을 사랑해주기를 원했지만, 그는 중원제일 검이라 불리는 사내가 아닌가. 관용을 크게 베풀어 첩 한 명 정도는 허용해 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성휘는 향후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 줘야 하겠지만 말이다.
첩은 욕정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일 뿐,
지아비로부터 지고지순한 사랑을 받는 것은 정실인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귀관이 진심으로 사죄를 청하고 있으니…, 징계는 내리지 않을 걸세. 물론 지금까지 나를 기만하고 양다리를 걸친 귀관의 죄는 사해를 범람하게 만들 정도로 무겁지만 말이네.”
“감사합니다.”
이번 일을 잠시 덮어두겠다는 조조의 말에 이성휘는 감읍함을 담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뒤,
의자에 앉은 흑발의 여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두 손으로 조조를 번쩍 안아 든 이성휘는 놀란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내, 내려주게!”
“이대로 침소까지 옮겨드리겠습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다들 수군댈 걸세!”
“받아들이겠습니다.”
수줍음에 물든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성휘는 조조는 번쩍 안아 든 채 침소로 이동했다.
대청마루를 거닐었다.
수많은 시녀들이 그 모습을 목격했다.
마치 신혼부부처럼 알콩달콩한 애틋함을 보이는 두 남녀의 모습에 조조를 보필하던 시녀들은 얼굴을 붉히면서 응원을 보냈다.
“우으으…! 나, 나중에 두고 보세!”
연모하는 사내의 두 팔에 안긴 흑발의 여인이 수많은 시선들이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음을 느끼고는 제 얼굴을 폭 가렸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는지,
두 발을 동동 구르면서 힘껏 부끄러움을 내비쳤다.
항상 위엄과 냉혹함을 떨쳐야 할 군주가 팔불출처럼 흐물흐물해진 모습을 보이다니,
한없이 기쁘면서도 한없이 부끄러운…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심정을 떠안은 채 침소로 옮겨졌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만. 평생 사죄해도 모자랄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시녀들이 미리 침소에 깔아둔 이부자리 위에 흑발의 여인을 상냥하게 눕히면서 말했다.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이는 주군과 이성휘가 이대로 함께 잠자리를 보낼 것으로 생각했는지, 조조의 시녀들은 열애(熱愛)와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두 쌍의 원앙들을 수놓은 원앙금침을 깔아두었다.
‘쓰, 쓸데없는 짓을…!’
조조가 얼굴을 붉히면서 중얼거렸다.
이러면 마치,
혼례를 올린 첫날밤 같지 않은가?
은은하게 침소를 비추고 있는 등불을 바라보던 조조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자신을 소중하게 안아주었던 이성휘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서, 설마 이대로 갈 셈은 아니겠지…? 아직 귀관을 진심으로 용서한 게 아니네. 그러니… 오, 오늘 밤은 내 곁에서… 슬픔과 비통함에 빠진 나를 계속 위로해주게.”
이부자리에 누운 채 팔을 뻗으면서 귀엽게 조르는 조조의 애교어린 모습에 이성휘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최선을 다해 위로해드리겠습니다.”
뒤이어 침소에서 교성이 흘러넘쳤다.
발정기에 빠진 암컷 고양이가 내는 듯한 울음소리가 조조의 침소를 가득 메웠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것을 입증하듯, 이성휘의 진심 어린 사과에 결국 철옹성과 같았던 조조의 마음은 스르륵 함락되고 말았다.
* * *
부관과 함께 하룻밤을 보내면서 응어리를 모두 털어놓은 조조는 결국 둘을 용서하기로 했다.
이성휘를 용서하고,
사촌 동생 조홍을 첩으로 들이는 것을 허락했다.
물론 정실과 소실의 상하관계를 명확하게 차별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겠지만,
질투와 투기의 화신이라 불릴 만했던 조조가 연모하는 부관과 내연관계였던 사촌 동생을 용서해준 것은 혼비백산하여 경악할 정도로 놀라운 결과였다.
“자렴.”
“…예, 언니.”
조조는 조홍에게 명한 연금을 취소한 뒤, 사촌 동생을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자기 결정을 직접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전날에 내 말이 지나쳤다. 사과하마.”
“괘, 괜찮아요….”
말이 지나쳤다며 사과를 건넨 조조는 굳은 표정을 지으면서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사촌 동생에게 연민을 느꼈다.
어깨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얼마나 이 사촌언니가 무섭게 굴었으면 이리도 애처롭게 떨고 있을까?
매번 목숨을 바쳐가며 자신을 보필했던 소중한 사촌 동생을 너무 강압적으로 압박했음을 깨닫게 된 조조는 무릎을 꿇고 있던 사촌 동생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한껏 자애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와 부관의 관계를 인정하마. 너를 부관의 첩으로 받아들이겠다. 생면부지의 불여우가 감히 부관에게 꼬리를 쳤다면 사생결단을 벌였겠지만…, 너는 내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지 않느냐.”
내가 너무 지나쳤다.
믿고 지금까지 종군해준 동생을,
사적인 이유로 일언지하에 내치려고 했다니.
광기와 집착에 빠져 서주 침공을 일으켰던 자기 극단적인 행동을 계속 반성해온 조조는 같은 실수를 다시 범할 뻔한 자신을 경계하면서 잘못을 인정했다.
“흐윽! 감사합니다…! 흑흑! 흐아앙! 정말 감사합니다, 언니…!”
사촌언니의 겸허한 사과에 조홍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기대를 배반한 나를,
애욕과 욕망을 참지 못하고 불륜을 범해 버린 나를,
부드럽고 인자한 미소로 관용을 베풀어 준 언니에게 울음을 터트리면서 감사를 전했다.
매번 못난 모습만 보여 왔던 자신을 포용해준 사촌언니의 관용어린 용서에 조홍은 자기 생명이 진멸할 때까지 충성을 바치겠노라고 굳게 맹세했다.
“우으으, 우아아앙!!”
어깨를 토닥여주는 손길에 조홍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면서 소리 높여 우는 사촌 동생을 본 조조는 쓴웃음을 지었다.
“흐끅! 흐으윽, 흑흑! 죄송해요, 언니가 어림총사를 좋아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 있었는데도…!”
“괜찮다. 용서하마.”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 언제부터인가 그 사람이 점점 눈에 들어오게 돼서…! 저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사람을 좋아하게 돼 버렸어요…. 이러면 안 됐는데…. 언니를 위해서라도 끝까지 참았어야 하는 건데…!!”
눈물을 세차게 쏟아 내던 흑발의 여인이 구슬픈 울음소리를 터트리면서 심정을 고백했다.
그 진심 어린 고백에 조조는 그동안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사촌 동생에게 동정심을 보냈다.
사람의 마음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하물며 사내를 사랑하게 된 여인의 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당장 자신만 하더라도 무려 2년 동안 연심을 이어오지 않았던가. 조조는 마음을 계속 애태우면서 이성휘를 연모해온 자기 과거 모습을 떠올리면서 사촌 동생을 향한 미움을 그만 거두기로 했다.
“결국 마음을 못 참고… 단둘이서 진류군에 시찰을 나갔다가 연주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림총사와 관계를 맺었어요.”
“…뭐?”
울음을 터트리는 사촌 동생의 어깨를 토닥이던 조조의 손길이 멎었다.
손이 그대로 허공에 멈춘 채,
사촌 동생의 충격적인 발언에 당혹감어린 감정을 발산했다.
‘단둘이서 진류군으로 시찰…. 분명 진류왕과 그 추종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부관과 자렴을 보냈었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그래, 동탁을 토벌하기 위한 전쟁에 착수하기 전이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는 것은.
부관의 처음은….
내가 가졌다고 생각한 부관의 처음은….
나는 이제야 부관과 정식으로 맺어지게 되었는데, 이 빌어먹을 불여우는 이미 수개월 전부터 부관과 살결을 접하면서 정을 통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
관용과 용서를 머금었던 얼굴에 싸늘한 살의가 맴돌기 시작했다.
* * *
황하(黃河).
누런 흙탕물이 흐르는 거대한 강.
백 년하청(百年河淸)이라는 말이 존재할 정도로 황하는 항상 흙탕물이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거칠게 몰아쳤다.
“남길 말은?”
“사,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지 다 할게요!”
황하를 유영하는 한 척의 어선.
싸늘한 살의에 젖은 여인과 필사적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여인, 그리고 형부(刑部)의 무관들이 함께 동승하고 있었다.
“감히 내 부관의 처음을… 나를 위해 소중하게 간직해온 부관의 동정을 네가 먼저 따먹어?”
“그건 어쩔 수 없이… 저,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으슥한 밤에 어림총사와 방앗간에 있었으니까….”
“죽어라.”
냉혹함을 두른 군주가 갑자기 첫 경험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기 시작하는 사촌 동생을 뻥 걷어찼다.
그 순간,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꼬르륵 가라앉았다.
꼬르르….
꼬르르르륵…!!
수면 위로 물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것을 본 철혈의 군주는 무관들에게 턱짓하며 신호를 보냈다.
그에 무관들은 죄인의 발목에 꽁꽁 묶어두었던 밧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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